공자孔子 - 2 (생애)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
(〈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유교전통에서 가장 성스러운 문헌으로 존경받는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제2세대가 편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전(口傳)과 문서로 보존된 공자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이 책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공자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논어〉가 서로 관련이 없는 대화들을 되는 대로 모아 놓은 책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공자가 일상생활에서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충고를 해주는
상식적인 도덕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릇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어〉는 여러 사람의 공동 기억을 기록한 것으로, 자신을 유생(儒生)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자에 대한 기억을 계승시키고 공자의 생활양식을 현재에도 살아 있는 전통으로
전수시켜주는 문서로서 수세기 동안 숭배해왔다.
〈논어〉 속의 대화는 생각하고 움직이는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때 공자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개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논어〉 속의 말씀은 공자의 인품, 즉 야망·공포·환희·신념·자기발견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자를 초점으로 하는 이같은 농축된 말씀을 편찬한 목적은 논증이나 사건의 기록을
위한 것은 아니고, 독자들이 지금도 계속되는 대화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논어〉를 통해 유생들은 수세기 동안 공자와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장엄한 의식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문장은 공자의 정신사(精神史)에 대한 짧은 자서전적 기술로
가장 중요한 신상발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고,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고,
60세가 되어서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爲政篇 4장)
제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공자의 일생은 교육이 끊임없는 자기 실현의 과정이라는
그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의 인물됨을 잘 표현할 수 없었을 때
공자는 자로를 이렇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너는 왜 '그분(공자)의 사람됨이 학문에 발분하면 식사를 잊고 그러한 것을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 늙음이 닥쳐오리라는 것조차 모르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述而篇 18장)
공자는 그가 숭상하는 문(文)이 잘 전수되지 않고 그가 주창하는 학(學)이 잘 가르쳐지지
않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같은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배운 것을 기억해내는 능력, 끊임없는 학문연구,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 등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덕(德)이 닦아지지 아니하는 것과 학문이 익혀지지 아니하는 것과 정의임을 알고도
그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내 근심이다."
(술이편 3장)
그가 제자들에게 바랐던 것은 자발적인 향학열이었다. "알려고 답답해 하지 않으면
지도하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으면 일깨우지 않는다."(술이편 8장)
공자의 문하생들은 다른 나이, 다른 배경, 다른 나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학자지망생들이었다.
그들은 공자의 이상에 동참했고 점점 더 분열되는 정체(政體)에 도덕심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자의 사명의식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공유했기 때문에 공자의 문하로 몰려들었다.
공자의 사명의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위험하기조차 했다.
공자 자신도 실직·향수·기아,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가 숭상하는 문화의 생명성과 그가 주창하는 학문적 태도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그 자신과 문하생들에게 하늘이 도와주리라고 확신시켰다. 광(匡)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졌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왕(文王:주나라의 창시자)이 돌아가버리고 나서는 그가 이룩한 문화가 나한테 전하여져
있지 않으냐?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 했다면, (나같은) 뒤에 죽을 사람들이
이 문화에 관계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광의 사람들이 나를 어쩌겠느냐?"
(子罕篇 5장)
강렬한 사명의식에 불탄 나머지 이같은 자신감을 드러낸 것을 보고 공자의 인물됨이
교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은 절대로 성현이 아니며, 자신이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뿐(公冶長篇 27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은 지식을 넓히고 자의식을 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지식인도 아니고 지식의 도움없이 사회를 변모시킬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라고 솔직히 시인했다.
자신이 귀를 활짝 열어놓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중에서 선한 것을 애써 행하며,
눈으로 두루 살펴 자신이 본 것을 마음 속에 남겨놓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자의 학문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지식'(술이편 27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공자는 신에게 호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선지자도, 진리를 환히
꿰뚫는 철학자도 아니었다.
단지 인(仁)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자기 실현이라는 길에 나선 여행자들 가운데 다소
앞선 지점에 있는 여행자일 뿐이었다.
인을 설파했던 공자는 인간을 위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말했다. "늙은이들은 편안하게
하여 주고, 벗들은 신용있게 대하도록 하여 주고, 젊은이들은 따르게 하여 주는 것이다."
(공야장편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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