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孟子
BC 371 추(鄒)나라~ BC 289경.
중국의 고대 철학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 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성선설은 현대에 와서도 유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띠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 (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BC 1111경~255)나라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善政)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
(恒有産 恒有心)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經〉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맹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선설
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
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왔지만 특히 송대(960~ 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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