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荀子
BC 300 ~ 230.
중국 고대의 3대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
이름은 순황(荀況). 자는 순경(荀卿).
공맹사상(孔孟思想)을 가다듬고 체계화했으며, 사상적인 엄격성을 통해 이해하기 쉽고
응집력 있는 유학사상의 방향을 제시했다.
유학사상이 2,000년 이상 전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유교철학을 위해 공헌한 순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후대의 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그의 염세주의적
관점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그가 이룩한 많은 지적인 업적이 흐려졌다.
12세기초 성리학의 출현과 함께 그의 사상은 냉대를 받기 시작했는데, 최근에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의 본명은 순황이지만 보통 순자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자'(子)라는 글자를 철학자들의
이름에 존칭으로 붙였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나라 출생이라는 것,
몇 년 동안 동쪽에 있는 제(齊)나라의 직하(稷下) 학파에 있었다는 것, 그후 중상모략을
받아 남쪽의 주(周)나라로 옮겼고 BC 255년 그 나라의 지방 수령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곧 죽었다는 것 등이 알려진 사실의 전부이다
유가철학의 발전에서 순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의 주요저작인〈순자>의 역사적인
영향력에서 볼 수 있다.
전체 32장인 〈순자〉는 대부분 그 자신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데, 후대에 수정되거나
위조되지 않아서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순자〉는 중국 철학 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논어〉·〈도덕경〉·〈맹자〉·
〈장자〉
등과 같은 초기 철학 서적들은 일화·경구(警句)로 채워진 서술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더이상 설득력 있게 전달해주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순자는 유가 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스승의 말·대화를 기록한 제자들의
글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쓴 체계적인 논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또한 총론적인 설명, 연속적인 논증, 세부적인 상술, 명료성에 중점을 두는 엄격한
서술형태를 취했다.
순자의 가장 유명한 말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수양에 의한 것일 뿐이다"이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수양철학이다.
만일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둔다면 이기적이고 무질서하며, 반사회적·본능적 충동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는 개인이 도덕의식을 가진 인간이 될 때까지 점차적으로 이끌고 도야시켜 사회에
교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禮:예법, 의식적인 관행, 사회적 행동 등에
관한 규범, 전통적인 관습)와 '악'(樂:순자는 플라톤처럼 음악에 심오한 도덕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음)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순자의 견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맹자의 낙관적인 견해와
근본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모든 인간이 잠재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이것이 맹자에게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선(善)의 '4단'(四端)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내부에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면에 순자에게는 모든 인간이 사회로부터 자기 내부에 있는 반사회적인 본능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이러한 견해차로부터 유가의 주요논쟁이 시작되었다.
맹자와 순자의 이러한 차이는 도덕론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차이이기도 했다.
맹자에게 하늘[天]은 비록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신성(神性)은 아닐지라도 포괄적인
도덕적 힘을 갖는다.
인간은 선함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선함은 불가피한 것이다.
반면에 순자에게 하늘은 어떠한 도덕적 원리도 포함되지 않은, 단순한 우주(서양의 '자연
'[nature]과 뜻이 비슷함)의 기능적 운행을 가리킬 따름이다.
그는 하늘의 운행은 거의 기계적이며, 도덕의 기준은 형이상학적인 천리(天理)의 산물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만든 문화·문명의 산물일 뿐이라고 파악했다.
만일 인간이 날 때부터 '악'하다면(순자에게는 '교화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함), 어떻게
인간에 의해 높은 문명의 창출이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순자〉의 예론편(禮論篇)에 나타나 있다. 그는 예론에서 자신의
모든 철학체계의 중심개념을 정립했다.
또한 인간이 다른 동물과 1가지 점에서 특히 다르다고 했는데, 그 점은 인간이 본능적
충동뿐만 아니라 상호협조적인 사회조직을 구성할 수 있는 '지'(知)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투는 혼란한 상태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성인이 '지'를
사용하여 사람들간의 상호 침해를 막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사회적 구별과
사회행동의 규칙을 만들었다.
이러한 설명은 사회제도의 형성에 대해서 상당히 공리주의적인 해석을 한 것이다.
'예'는 인간의 도덕·양식·습속을 규제하는 의식적인 규범이다.
순자는 이러한 '예'가 있은 후 비로소 유가에서 말하는 '도'(道)가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예'는 원래 예로부터 있었던 초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경배 등을 행동양식화한 것이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극도로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초경험적인 대상을 부정하는
지식인들이 점차 증가하여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예'가 점점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봉건제의 몰락과 함께 나타난 상업, 사회적 유동성, 기술에 유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전환이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로부터 내려온 사회적·종교적인 제도를 버리도록 만든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또한 제도와 연결된 '의례의 실천'인 '예'는 결코 세속화하여 사라져버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상호협조적인 경제활동에 생존이 달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가 문화적인 결속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는 개개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데, '예'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일종의
심미적·정신적인 차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본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편안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계속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그는 유가의 대표적 철학자가 되었고, 종교적 측면이 점차 감소하던
'예'에 윤리적·심미적인 철학기반을 제공했다.
〈순자〉에서 묘사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가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이상사회를 다스려야 할 학자·관리의 첫번째 임무는 '예'의 보전과 전달이다.
초기의 다른 유학자들과 같이 순자는 통치자가 되는 자격은 가문이나 재산이 아니라 교양과
도덕성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통치자의 세습적인 특권을 부정했다.
또한 자격요건의 근본은 높은 문화적 전통, 즉 '예'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예'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데, 학자는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 관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자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예'를 사용해야 한다.
〈순자〉의 구성에서 보이듯이 순자의 1차적인 관심은 사회철학과 윤리였다.
32장 가운데 18장이 이 문제를 다루었고 나머지 장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술적·언어학적 논설인 정명편(正名篇)에서도 언어의 오용과 남용이 가져온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를 자유롭게 언급하고 있다.
악론(樂論)은 중국음악에 대한 고전적인 논설로 사회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는 음악의 중요성을 음악이 사람들간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찾았다.
또다른 유명한 논설은 천론(天論)이다.
여기에서 순자는 미신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논박했다.
천론의 주요주제 가운데 하나는, 일식·월식 등은 드물게 일어나는 불규칙한 자연현상일
뿐 불길한 징조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힘을 부정한 그는 이어 일반 백성의 종교적인 의식·미신에 대해서도 세련된 해석을 했다.
기우제와 같은 미신적인 의식은 단지 '인간의 감정을 좋게 해줄 뿐'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그러한 의식들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출구가 되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지만, 지식인은 그것을 감정의 꾸밈 정도로 여길 뿐 귀신의 일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유가사상 속에서 과학적 사고와 일치하는 합리주의의 흐름을 처음으로 열었다.
또한 순자는 심리학·교육·논리학·인식론· 변증론·어의론(語意論) 등에 공헌을 했다.
특히 변증론에 1차적인 관심을 두었는데, 이는 다른 사상가들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위로부터의 이념적 통일을 가져다줄 수 있는 중앙의 정치적 권위자인 성군(聖君)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오류가 생겨난다고 보았고, 올바른 변증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실상 그는 권위주의자로서, 유가와 전제주의적인 법가를 잇는 논리적 고리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2명의 법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법가의 이론가인 한비자(韓非子:BC 280경~233)와 정치가 이사(李斯:BC 280경~208)가
그들로서 이들은 이후 유교사가들의 증오심을 샀다.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 받은 비난은 그들의 스승에 대한 평가에도 악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인용되는 〈순자〉의 성악편(性惡篇) 때문에 순자의 글은 다른 대부분의
주장에 앞서 도덕적 거부감을 샀다.
맹자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성악편이 맹자를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도덕과 관련이 없는 철학이나 법가의 강압적 방법은 확고하게 반대했고,
사회의 기반으로서 유교적인 도덕성을 주장했다.
순자가 죽은 후 몇 세기 동안 그의 영향력은 맹자보다 컸다.
10세기에 성리학이 일어나면서 그의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12세기까지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맹자〉가 유교의 4서(四書)에 포함되고 맹자가 유교의 2번째 성인으로 추앙됨으로써
그는 이단으로 몰렸다.
순자가 바라던 사회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순자 이전의 유가사상가인 공자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 속에 가득 차 있는 합리주의, 종교에 대한 회의,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관심,
정치적·문화적 감각력, 고대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선호 등은 2,000년 이상 중국 지식인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누구도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으며, 유가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는 철학적 이념과 역사적 현실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고대 유교의 틀을 형성시킨 위인이라는 올바른 평가를 받아왔다.
방대한 영토와 거대한 인구를 지닌 중국은 전통적으로 유교 국가였으므로 그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철학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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