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진秦 ( BC221~206 ) 진秦 왕조계보, 진의 흥망 - 여불위와 진시황

지식창고지기 2009. 6. 1. 08:40

진秦 왕조계보 

 

시황제(始皇帝) 정(政)                   BC 221~210/209 

2세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             210/209~207 

진왕(秦王) 자영(子)                       207~206 

 

 

여불위와 진시황

呂不韋   秦始皇



전국시대는 각국을 왕래하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이는 점차 확대되어 전국시대 말에는

대상인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여불위(呂不韋)는 이시대를 대표하는 대 상인으로서 여러나라를 돌며 장사를 하여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여불위가 어느날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갔다가 우연히 조나라에 인질로 와있던 진(秦)

나라왕의 손자인 자초(子楚)를 만나게 된다.

자초는 진 소왕(昭王)의 둘째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차남으로 그다지 비중있는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의 어머니인 하희(夏姬)는 정부인도 아니었으며, 안국군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미 그는 왕위 계승에는 관계가 먼 자였다.

하지만 진의 태자가 세상을 뜨자 둘째 아들이었던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자초는 한단계 왕위에 다가섰다.

그렇지만 안국군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멀리까지 인질로 와있는 자신보다는

국내에 있는 아들들이 유리한 입장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편 여불위는 여러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였기에 진나라의 속사정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는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이 태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계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입김은 대단할 것이었다.

마침내 생각이 이에 미치자 여불위는 자초에게 다가가 자신이 가진 천금으로 하여금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섬겨 자초를 후계자로 삼게 하겠다고 하였다.

자초는 여불위의 이말에

“그대의 계책대로 된다면 진나라를 양분하여 그대와 함게 나누어 가지겠소.”

라고 하였다.


한편 여불위는 5백금을 자초에게 주어 빈객들과 두루 사귀어 친교를 넓히게 하고,

자신은 진귀한 예물들을 마련하여 진나라로 떠났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녀의 언니라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에게 뵙기를 청한 후, 가져간 예물을 모두 화양부인에게

바치게 하였다.

“자초는 어질고 지혜가 있을뿐만아니라, 여러 제후의 빈객들과 친교를 맺어 명성을 천하에

널리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여기며, 사모하고 있습니다.”

여불위는 언니를 시켜 화양부인을 설득케 했다.

그러자 여불위의 언니는 화양부인에게

“지금 부인께서는 태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아들이 없습니다.

나이가 젊고 아름다울때 태자의 여러아들중 현명하고 효심이 큰 자로 후계자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있다가 태자의 사랑이 식어버린 뒤에는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조나라에 인질로 있는 자초는 현명하고 명성이 있지만 서열이 낮음을 알고 있어

진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을 줄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부인께서 그를 택해 후계자로 삼는다면 자초에게는 없는나라가 생기는 것이고

부인께서는 없는 아들이 생기는 것이니 부인은 일생동안 자초의 은행이 되어 부귀를

누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말을 알아들은 화양부인은

매일밤 아들이 없는 자신의 아픔을 들어 자초를 후계자로 삼기를 간청하여, 안국군으로

부터 허락을 받아내게 된다.


한편 여불위는 한단(邯鄲)에서 미녀를 얻어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자초가 술자리에서 그녀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여불위에게  그녀를 달라고 청했다.

이때 그녀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이를 속이고 자초에게 보내게된다.

그후 그녀는 정(政)이란 아이를 낳았다.

이가 바로 후일의 시황제(始皇帝)이다.


이로부터 6년의 진의 소왕이 죽고 마침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니,

이가 효문왕(孝文王) 이다.

효문왕은 즉위하자 자초를 태자로 삼았는데 즉위 3일만에 효문왕이 죽으니, 태자로 있던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진왕이 된다.(莊襄王)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는 한편 10만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만에 죽으니, 태자 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의 나이 13세로 정치는 모친인 태후와 여불위에게 일임되었다.

그리되자 진나라에서는 여불위의 권세를 따를자가 없었다.

그는 국력을 증강시키고, 또한 자신의 가문도 크게 번성시켜 식객이 1만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천하에서 유능한 사람을 구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였다.


한편 여불위는 일찍이 자신의 첩이었던 진왕 정의 생모와 계속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정이 성장함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일었으나, 태후가 쉬이 놓아주질 않았다.

고민하던 여불위는 비밀리에 남근이 크기로 유명한 노애 라는 사람을 구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때때로 잔치를 벌여 노애로 하여금 그의 큰 남근으로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끌고 다니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곧 태후의 귀에 들어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이내 태후는 그 사람을

궁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여불위에게 청하였다.

여불위는 그가 궁형(宮刑 - 남근을 자르는 형벌)을 받은자라 속여 환관의 신분으로

위장시켜 태후에게 보냈다.

태후는 노애와 정을 통하다가 임신을 하게되자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하여 옹(雍)땅으로 거처를 옮겨 줄기차게 정을 통했으며,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진왕정이 22세가 되자 손수 정치를 하게되었는데, 그는 권위를 바로잡기 위해 생모에 관한

불미스러운 소문을 없애고자 조사한 결과, 노애를 잡아 극형에 처하고, 그의 삼족(三族)을

멸하였으며,태후가 낳은 두명의 아들도 죽였다.

뿐만아니라 여불위가 이 일에 연계된 사실도 알게되어 숙청하려 하였으나, 진나라 최고의

공신인 그를 함부로 숙청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정은 여불위를 관직에서 파면하고 그의 식읍이 있던 하남, 낙양에서 은거토록 하였다.

그런데도 여불위의 집에 방문하는 식객과 사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에 진왕 정은 그를 촉땅에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여불위는 진왕 정이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을 보고는 장차 자신을

참형에 처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스스로 독약을 먹어 목숨을 끊었다.(시황제 12년, BC 235)

呂不韋   秦始皇



전국시대는 각국을 왕래하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이는 점차 확대되어 전국시대 말에는

대상인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여불위(呂不韋)는 이시대를 대표하는 대 상인으로서 여러나라를 돌며 장사를 하여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여불위가 어느날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갔다가 우연히 조나라에 인질로 와있던 진(秦)

나라왕의 손자인 자초(子楚)를 만나게 된다.

자초는 진 소왕(昭王)의 둘째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차남으로 그다지 비중있는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의 어머니인 하희(夏姬)는 정부인도 아니었으며, 안국군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미 그는 왕위 계승에는 관계가 먼 자였다.

하지만 진의 태자가 세상을 뜨자 둘째 아들이었던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자초는 한단계 왕위에 다가섰다.

그렇지만 안국군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멀리까지 인질로 와있는 자신보다는

국내에 있는 아들들이 유리한 입장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편 여불위는 여러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였기에 진나라의 속사정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는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이 태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계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입김은 대단할 것이었다.

마침내 생각이 이에 미치자 여불위는 자초에게 다가가 자신이 가진 천금으로 하여금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섬겨 자초를 후계자로 삼게 하겠다고 하였다.

자초는 여불위의 이말에

“그대의 계책대로 된다면 진나라를 양분하여 그대와 함게 나누어 가지겠소.”

라고 하였다.


한편 여불위는 5백금을 자초에게 주어 빈객들과 두루 사귀어 친교를 넓히게 하고,

자신은 진귀한 예물들을 마련하여 진나라로 떠났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녀의 언니라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에게 뵙기를 청한 후, 가져간 예물을 모두 화양부인에게

바치게 하였다.

“자초는 어질고 지혜가 있을뿐만아니라, 여러 제후의 빈객들과 친교를 맺어 명성을 천하에

널리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여기며, 사모하고 있습니다.”

여불위는 언니를 시켜 화양부인을 설득케 했다.

그러자 여불위의 언니는 화양부인에게

“지금 부인께서는 태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아들이 없습니다.

나이가 젊고 아름다울때 태자의 여러아들중 현명하고 효심이 큰 자로 후계자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있다가 태자의 사랑이 식어버린 뒤에는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조나라에 인질로 있는 자초는 현명하고 명성이 있지만 서열이 낮음을 알고 있어

진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을 줄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부인께서 그를 택해 후계자로 삼는다면 자초에게는 없는나라가 생기는 것이고

부인께서는 없는 아들이 생기는 것이니 부인은 일생동안 자초의 은행이 되어 부귀를

누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말을 알아들은 화양부인은

매일밤 아들이 없는 자신의 아픔을 들어 자초를 후계자로 삼기를 간청하여, 안국군으로

부터 허락을 받아내게 된다.


한편 여불위는 한단(邯鄲)에서 미녀를 얻어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자초가 술자리에서 그녀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여불위에게  그녀를 달라고 청했다.

이때 그녀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이를 속이고 자초에게 보내게된다.

그후 그녀는 정(政)이란 아이를 낳았다.

이가 바로 후일의 시황제(始皇帝)이다.


이로부터 6년의 진의 소왕이 죽고 마침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니,

이가 효문왕(孝文王) 이다.

효문왕은 즉위하자 자초를 태자로 삼았는데 즉위 3일만에 효문왕이 죽으니, 태자로 있던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진왕이 된다.(莊襄王)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는 한편 10만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만에 죽으니, 태자 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의 나이 13세로 정치는 모친인 태후와 여불위에게 일임되었다.

그리되자 진나라에서는 여불위의 권세를 따를자가 없었다.

그는 국력을 증강시키고, 또한 자신의 가문도 크게 번성시켜 식객이 1만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천하에서 유능한 사람을 구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였다.


한편 여불위는 일찍이 자신의 첩이었던 진왕 정의 생모와 계속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정이 성장함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일었으나, 태후가 쉬이 놓아주질 않았다.

고민하던 여불위는 비밀리에 남근이 크기로 유명한 노애 라는 사람을 구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때때로 잔치를 벌여 노애로 하여금 그의 큰 남근으로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끌고 다니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곧 태후의 귀에 들어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이내 태후는 그 사람을

궁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여불위에게 청하였다.

여불위는 그가 궁형(宮刑 - 남근을 자르는 형벌)을 받은자라 속여 환관의 신분으로

위장시켜 태후에게 보냈다.

태후는 노애와 정을 통하다가 임신을 하게되자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하여 옹(雍)땅으로 거처를 옮겨 줄기차게 정을 통했으며,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진왕정이 22세가 되자 손수 정치를 하게되었는데, 그는 권위를 바로잡기 위해 생모에 관한

불미스러운 소문을 없애고자 조사한 결과, 노애를 잡아 극형에 처하고, 그의 삼족(三族)을

멸하였으며,태후가 낳은 두명의 아들도 죽였다.

뿐만아니라 여불위가 이 일에 연계된 사실도 알게되어 숙청하려 하였으나, 진나라 최고의

공신인 그를 함부로 숙청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정은 여불위를 관직에서 파면하고 그의 식읍이 있던 하남, 낙양에서 은거토록 하였다.

그런데도 여불위의 집에 방문하는 식객과 사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에 진왕 정은 그를 촉땅에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여불위는 진왕 정이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을 보고는 장차 자신을

참형에 처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스스로 독약을 먹어 목숨을 끊었다.(시황제 12년, BC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