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국가 진의 정비체계
진은 통일 전쟁을 시작한지 17년만에 중원을 통일하였다.
그에 이어 북쪽의 흉노를 물리쳤으며, 남으로도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여 통일된 대제국
건설을 비로소 성공하였다.
진왕 정은 스르로 그 권위와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하기위해 왕 이상의 왕이라는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전설상의 삼황(三皇)의 ‘황’, 오제(五帝)의 ‘제’ 자를 따 황제라 칭하였고,
그 앞에 처음을 뜻하는 시(始)자를 붙여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기로 하였다.
한편 진시황에게는 또다른 고민이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그것이었다.
주나라의 봉건제(封建制)는 시대가 흐르면서 천자가 제후들을 통치할 힘이 없어졌으며,
그 때문에 전쟁또한 끊이질 않고, 마침내 멸망의 길로 치닫았으므로 이사(李斯)는 황제가
직접 모든 영토를 통치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시황제는 이사의 뜻을 받아들여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縣)을
두어 전국을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였다.
또한 중앙기구도 승상(丞相, 정치담당), 태위(太尉, 군사담당),
어사대부(御史大夫, 감찰담당)의 삼공을 두었다.
이는 특정의 신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권력을 황제 단 한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하자마자 여산(驪山)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만들기 시작하여
50세가 될 무렵에야 완성시켰다.
36년이나 걸린 이 공사는 실로 대공사 였으며, 이 묘를 여산릉(驪山陵)또는 시황릉(始皇陵)
이라고도 하였다.
1974년 발굴된 이 릉에서는 7천여 병사들의 도용, 군마, 전차등이 늘어서 있으며
사방이 600m에 달하고, 높이가 120m, 주위의 길이는 2.5km에 달한다.
여산릉의 대공사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또하나의 공사가 아방궁(阿房宮)의 건설이었다.
이는 동서가 약 700m, 남북이 약 120m 이며, 위층에는 1만명이 앉을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북쪽 흉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시황제는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3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오랑캐를 쫓아내고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만리장성으로 요동(遼東)에서부터 서쪽으로 감숙성 에 달하는 1만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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