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陳勝), 오광(吳廣) 의 난
진승과 오광은 원래 옛 초나라 땅이었던 하남성 남부의 농민출신이었다
209년 이들은 북쪽 변방의 수비를 받고 어양(漁陽)으로 향하던 중 장마철에 이르렀다.
때문에 연일 큰비가 내려 길이 막힘으로 정한 기일내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진나라 법에는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모두
참형(斬刑 -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벌)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참형을
당할 운명인 셈이었다.
그러자 진승과 오광은 그 대책을 논의하였고, 이미 참수될 것이 확실하기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나이로서의 뜻을 펼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둘은 곧바로 일행의 인솔책임자를 찾아가 설득하였는데, 그는 오광의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호된 매질을 하였다.
이런 그의 행동은 도리어 대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매를 맞던 오광이 대장의 칼을 뽑아 그
목을 베었고, 그와 동시에 진승또한 다른 장수들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일행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기한안에 어양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었소. 어양에 도착한다해도 참수될
것이고, 요행히 참수를 면한다하여도 변방의 부역에 종사하게 될 것이오.
부역에 종사했다가 사고없이 고향에 돌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소.
어차피 죽을 바에야 한번 보람 있는일을 해봐야 하지 않겠소?
어찌 왕후장상(王侯將相 - 왕,제후,장수,재상, 곧 고귀한 신분)의씨가 따로 있단 말이오!”
라고 말하자 일행은 모두 함성을 지르고 이들을 따랐다.
진승과 오광의 예견대로 봉기 소식을 접한 전국각지의 백성들은 항쟁에 참여했었고,
그 여세를 몰아 진승은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陳)을 함락하여,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는 대개 농민으로 구성되었기에 진의 정예병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그들이 진의 장수 장한(章邯)에게 패한 후에는 내부동요까지 일어나 급기야는 진승,
오광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되기에 이른다.
최초의 농민반란은 불과 6개월만에 몰락하였으나, 이를 시작으로 진(秦)은 통일을 이룩한지
불과 15년만에 전국에서 빗발치는 농민봉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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