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진秦 ( BC221~206 ) 진秦의 시황제

지식창고지기 2009. 6. 1. 09:06

시황제 始皇帝


BC 259~210/209.

중국 진(秦)나라의 황제.


성은 영, 이름은 정(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나, 통일제국 진은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붙들려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여불위는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원래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던 장양왕을 재위에 올려놓았다. 

정은 13세이던 BC 246년 재위에 올랐다.


이때 진은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중국의 나머지 나라를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중원의 국가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산지로 이루어진 서부 변방에서의

강력한 위치 때문에 진은 법가, 즉 전체주의적인 국가 철학을 바탕으로 강력한 관료체제를

갖춘 정부와 군사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BC 238년에 공식적으로 친정(親政)을 선언하기 전까지 사실상 여불위가 정권을 담당했다.

왕으로서 그가 취한 첫번째 행동은 자기 어머니와 정을 통한 반대파의 신하를 살해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것이었다.

뒤에 승상(丞相)이 된 이사(李斯)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능한 조언자들을 왕 주변에서

떼어냈을 수도 있는 이방인 추방 법령을 폐지했다.

진나라는 첩자, 많은 뇌물, 재능 있는 장군들의 가혹하고 효과적인 지도력 덕택으로

나머지 여섯 경쟁국을 차례로 점령하여 마침내 BC 221년에 제(齊)나라를 멸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었다.

이로써 중국은 최초로 통일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그는 전설적인 지배자의 신성한 칭호를 취해서,

자신을 시황제라고 선언했다. 또한 무한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나라가 만세(萬歲)를

지속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황제로서 그는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지방관리의 독립된

통치지역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또한 그 이전 진나라에서의 사례와 이사의 제안에 따라 봉건세력을 철폐하고, 각지의

부호(富豪)들을 강제로 수도 셴양[咸陽]으로 이주시켰다.

전국을 36개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임명한 수(守:행정)·위(尉:군사)·

감(監:감찰)을 파견하여 각 군·현을 통치하게 했다.

군은 다시 몇 개의 현으로 나뉘었다. 또한 도량형을 비롯하여 마차바퀴의 폭과 법률·

문자를 통일했다.

도로와 운하망도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북방 변경에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가

세워졌는데, 훗날 이것들이 연결되어 만리장성을 형성했다.


BC 220년에 시황제는 각지를 순행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조직을 감독하면서 신성한

여러 지역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자신이 마침내 제국을 통일했음을 알리고 각지에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웠다.

시황제가 전국을 순행한 또다른 동기는 마술과 연금술에 관한 자신의 관심 때문이었고,

나아가 자신을 불로장생하게 해주리라고 여겼던 연금술사와 마술사를 찾기 위함이었다.

BC 219년 동쪽 바다에 있는 어느 섬(일본으로 추측됨)에서 이러한 것을 구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계속 조정으로 주술사들을 불러들였다.

유가들은 그 조치들이 사기성이 짙은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

가운데 460여 명이 처형되었다.


옛 봉건적 질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유가와 황제와의 끊임없는 논쟁은 213년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분서갱유는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학·점술·농경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및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었다.


시황제의 말년은 측근들의 증대하는 불만과 백성들로부터의 고립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실제로 그에 대한 암살기도가 3번이나 있었다.

거대한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그는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서의

생활을 영위했다.

BC 210(또는 209)년 그는 순행 도중에 죽었고, 우주의 상징적인 형태를 본떠 만들어진,

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능에 묻혔다.

약 51.8㎢ 규모의 이 능은 197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발굴 초기에 죽은 황제를

보위하기 위한 군대라고 추정되는 실물크기의 토우(土偶)가 6,000점 이상 발견되었다.


강력한 지배자가 사라진 후 각지에서 옛 봉건 파벌의 지지자들간에 항쟁이 발생하여

결국 BC 206년 진은 붕괴되었고, 황족들이 제거되었다.


시황제에 대한 대부분의 기사는 진을 계승한 한(漢)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한나라는 유교를 숭상했으므로 법가를 중시한 진을 비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아마 그 시대의 조작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그가 지나치게 잔인했다거나 인격파탄자였다고 비방하는 얘기 등은 법가 철학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 의해 각색되었을 것이다.

시황제는 확실히 위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제국을 강화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전제적인 지배와 가혹한 형벌은 법가사상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전통적인 역사서에서 그를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교양없고

미신적인 사람으로 취급했다.


반면에 근대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가 실시한 제도화된 관료 행정구조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역대 국가들은 이 제도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으나, 사실상 후대 국가들의 통치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