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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2]"롤모델은 父…혁명기질은 대물림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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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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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기자 yrlee@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이같은 미래학자들의 기질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러가지 면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학혁명에 뛰어들었던 아버지의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는 태생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심, 그리고 경험해 보려는 욕구가 높았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큰 일을 하고 싶다는 갈증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박정희의 일생에서 미래전략가, 미래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그런 일화는 많다.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은 일제 강점기다. 시골 중에서도 오지였던 구미 상모동이란 마을은 한량없이 가난한 9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었다. 그의 선친은 무과과거에 합격하여 효력부위(效力副尉)란 벼슬까지 받은 바 있으나, 원래 성격이 호방한데다가 당시 조선조 말엽 척도정치(戚道政治)와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반항하여, 20대에는 동학혁명에 가담하였다 체포돼 처형 직전에 천운으로 사면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늘 "쾌활하고 호담하였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어릴 적 성주(星州) 어느 산길을 밤에 혼자 지나다 범을 만나서 길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부싯돌을 치니 섬광이 튀자 범이 사라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담대한 분이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박정희는 선친을 롤모델로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권력을 잡아, 뭔가를 이뤄내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반항정신, 혁명의 기질을 물려받은 박정희와 허먼 칸의 만남은 이런 측면에서 운명적이다. 그의 아버지도 혁명가였고 그도 늘 혁명을 꿈꾸었다. 아버지의 반항정신, 혁명기질을 가진 그는 기존질서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늘 선택했다. '미래학자들은 남들이 이미 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의에 비춰 보면 그는 뼛속 깊이 미래학자로서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상희 형님이 처가인 김천(金泉)에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산골에서 자라서 촌뜨기이기 때문에 김천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형님과 같이 시내를 걷다가 고깔같이 생긴 용기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조그마한 나무 스푼으로 먹었다. 생전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아이스크림 용기가 깨어졌다. 먹고 그릇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줄만 알고 '형님! 이것이 깨어졌어요'라며 울상을 짓자 그릇도 같이 먹는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하여 안심했는데, 그때부터 형님이 나를 '촌놈'이라고 불렀다." 박정희 평생 스스로를 괴롭히던 자괴감은 '촌놈'이라는 수식어였다. 변방출신. 경상도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구미 상모동에서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던 '촌놈'이었다. 그러나 그는 촌놈이라고 불리는 것이 무척 싫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외국유학을 다녀왔던
이런 측면도 있었다. 그 당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거의 없었는데 학교를 가기위해 상모동에서 구미면 까지는 약 8㎞, 시골서는 20리 길 기찻길을 따라 걸어 다녔다. 당시 기찻길에 대한 추억은 행복한 추억으로, 늘 먼 길을 떠나고 싶은, 먼 미래가 보고 싶었던 꿈을 키웠다. 그때만 해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글로벌 인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박정희는 소년시절에 군인을 무척 동경했다.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며 군인을 동경하게 됐고,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으며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그리고 결국 군인이 되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미래학자들은 그의 꿈을 지지해주고 이론적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박정희가 처음 허먼 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실컷 먹일 수 있느냐"면서 '통일벼 등 벼종자 개량 이야기'에 관해 꼬치꼬치 물었다. 허먼 칸은 수출을 하여 돈을 벌면 쌀값이 싸기 때문에 실컷 먹일 수 있다고 수출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리고 외국에 '코트라' 같은 해외수출기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줬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엄청난 반대속에서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대구∼마산)를 만들 때 주변 땅값이 너무 올라가서 확장공사를 못할 것에 대비해 40년 앞서, 8차로 12차로도로의 땅을 미리 수용하게 만들기도 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희망의 미래를 꿈꾸는 그의 의지는 한장의 사진에 투영되어 있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홍보용 사진으로 쓰기를 주문했다. 그 사진은 팔을 길게 뻗어 검지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선글라스를 손에 쥐고 저 멀리를 가리키고 있는 이 사진을 통해 박정희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먼 곳, 즉 미래를 바라보고 더 좋은 날을 약속하는 영웅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 듯하다. 색안경 즉 검은 선글라스의 박정희는 트레이드 마크다. 색안경을 낀 이유는 맥아더 장군을 본떴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신의 눈이 누구를 보는지 알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깔려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남자가 대세를 읽고 있는 눈, 즉 나의 감정을 눈으로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는 욕망도 있었겠지만, 그가 행사장이나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을때 먼산을 바라보거나 딴 곳에 눈을 팔거나 하면서 나름의 새로운 구상을 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즐겨썼을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해석한다. 이처럼 박정희는 미래에 부상하는 기술이나 산업 등 항시 새로운 것을 국민들에게 만들어 줘야겠다는 긍지와 끈기를 가진 사람이어서 미래학자와의 조우는 준비된 만남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래 어떤 산업이 부자를 만들어 주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허먼 칸과 토론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 ||||||||||||||||||||||||
2010-09-24 08:06:24 입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