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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3] 칸 著 '…1979년 이후' 속의 5개년 계획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34

[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3] 칸 著 '…1979년 이후' 속의 5개년 계획
 경제개발계획, '일급 참모' 허먼 칸의 조언이 결정적 역할
 차관 도입·정권유지…두 토끼 잡기위해 제안
 1차-공업, 2차-인프라, 3차-중공업·금융국영화, 4차-교육·기술 강조 등 20년간 단계별 주문
 개발관련 특혜 관해선 "역사가 판단할 것" 조언
 70년대 중반 노동이슈땐 "농촌개발로 선회" 충고
 한국 선물문화에 대해 "좋은 인간관계 위한 것 거부할 필요 없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허먼 칸 박사의 '세계경제발전, 1979년 이후(World Economic Development, 1979 and Beyond)'라는 저서 표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허먼 칸 박사의 '세계경제발전, 1979년 이후(World Economic Development, 1979 and Beyond)'라는 저서 표지.

기록을 통해 보면 1961년 설립된 허드슨 연구소 초대소장이었던 허먼 칸 박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급 '참모'였다. 그것은 1960년대 당시 허드슨연구소 조교로 근무하면서 허먼 칸 박사의 방한 자료 준비를 지원했던 유엔미래포럼 제롬 글렌 회장이 최근에 찾아낸 허먼 칸 박사의 '세계경제발전, 1979년 이후'(World Economic Development, 1979 and Beyond)라는 저서에서 드러난다.

이 책 속에서 허먼 칸은 한국의 근대화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 허먼 칸이 세계에서 2~3위하는 특강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그를 불러 그냥 강의만 청해 들었다기 보다는 자문을 구했다고 보는 측면이 옳다.

이 책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미국인들에 의해 외국 홍보용으로 우선 계획됐다. 한국정부(박정희정권)가 62년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세계은행 등 원조금, 대외차관을 결정하는 미국인 자문위원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결정됐다. 차관을 결정하는 국가에 한국경제발전계획을 청사진으로 내놔 신뢰도, 당위성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세계은행 등 외국투자전문가들이 개발국가에 차관이나 금융지원을 하려면 자신의 정부에 한국개발청사진을 보여주고, 미래에 차관회수가 가능함을 보여줘야 했다.

경제개발계획은 또 한국정부를 강하게 각인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데 도움이 됐다. 혁명정권이 국민들에게 몇 년 후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비전을 제시, 국민지지를 얻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사실 개도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이런 용도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약속이 실현되고 그 성과에 정부 자체도 놀랄 만큼 초과달성하는 결과가 나왔다. 애초 계획이나 국민들에게는 단순히 살기가 더 좋아진다는 말보다, 계획표나 수치를 보여주는 정부의 목표가 생기고, 목표달성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기'를 해서 목적초과달성에 국민통합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허먼 칸은 "한국 등 개발도상국은 정권유지를 위해서도 미래비전을 보여주고, 국민들에게 목표를 만들어 주어, 그 목적이 달성되면 잘 산다는 미래비전, 미래계획(Images of Future)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 즉 5개년 개발계획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은 한국 자본주의경제가 본격 도입된 때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 한국 정부는 쌀 생산 증가, 농업증진을 목표로 매진했다. 이에 대해 허먼 칸은 유연한 경제를 강조했고, 필요할 경우 과감히 수정, 농산물에서 공산품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요약하면, 농업 생산력 확대로 소득 증대, 전력·석탄의 에너지원을 확충하고 유휴자원을 활용해 고용의 증대와 국토의 보전·개발, 수출을 증대하여 국제수지를 맞추고, 기술을 진흥하여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제조업에서 수입대체산업과 수출산업 확충, 석유정제·비료·화학섬유·전기기계, 전력·수송·항만·창고의 확충을 강조했다.

또 허먼 칸은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2)에 대해서는 사회 인프라 깔기, 도로, 철로, 항만, 통신시설 시설에 투자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인플레 등을 막기 위해 국영금융기관이 나서고, 20% 화폐평가 절하를 과감히 밀고 가는 그야말로 힘이 있는 한국이 돼야 한다고 권유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2차 계획에서는 식량의 자급화와 산림의 녹화, 수산의 개발, 화학·철강·기계공업 등 공업 고도화, 수입대체 촉진으로 국제수지 개선 기반조성, 고용확대, 가족계획 추진으로 인구증가 억제, 농업 다각화와 농가소득 확대, 과학기술 진흥, 교육인적자원 배양을 강조했다. 베트남파병 결정에서 73년 3월까지 8년간에 걸친 베트남특수로 한국경제를 윤택하게 했다. 수출 의존도를 높이고 공업건설이 본격화됨에 따라 외자의존도가 높아졌고, 직접투자가 이뤄졌다.

이와 관련해 해외 강연을 많이 다녔던 허먼 칸 박사는 가는 곳마다 "한국은 국민들의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 즉 허리띠를 졸라매는 국민통합이 가능한 훌륭한 문화(good culture)가 있고, 개발을 선호하는 국민의지가 강하고 대통령의 리더십(허먼 칸은 정치적 결정 혹은 특혜를 준다는

울산의 정유공장 모습. 중화학공업의 육성 발전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 확충이 목적이었다. (정부기록사진집)2
울산의 정유공장 모습. 중화학공업의 육성 발전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 확충이 목적이었다. (정부기록사진집)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맨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중앙포토>3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맨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중앙포토>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수출진흥밖에 없다고 판단, 62년 청와대에 수출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출드라이버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4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수출진흥밖에 없다고 판단, 62년 청와대에 수출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출드라이버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지방고등학교를 순시하며 과학기술교육현황을 살피는 박 전 대통령.5
지방고등학교를 순시하며 과학기술교육현황을 살피는 박 전 대통령.
반대에 신경 쓸 필요 없고, 역사가 판단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이 단호한 가운데 자유신경제학자가 등장해 대통령을 지원하므로 박정희 정권은 성공할 것"이라고 해외 만방에 강의했다고 한다.

허먼 칸은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77)에서는 노동인권 문제가 이슈화되자 도시 산업개발에서 농촌개발로 선회하라고 조언하였다. 또한 중공업, 화학공업 투자를 시작하는 등 중공업 드라이브정책을 펼 것을 조언했고, 정부가 은행 금융을 국영화시켜 조절 가능한 투자자본을 보유할 것을 주문했다. 2차 경제개발계획 또한 목적초과 달성했지만, 1차 오일쇼크로 외국자본이 한국탈출을 시작하고 한국은 외자유치에 곤란을 겪는다고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허먼 칸은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7~82)때 가장 많이 방한했다. 이 시기는 산업 중점이 전자, 기계, 조선 등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그것은 외국자본, 차관 투여 없이 할 수 있는 산업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한국은 노동단가가 높아지고 제조업이 동남아로 이전이 가속화되므로 앞으로는 인적자원개발(human)이 산업(business)보다 훨씬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된다고 조언했다. 따라서 교육에 집중투자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과학기술발전의 급속한 변화가 오므로 기술에 집중 투자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4차 경제개발이 끝나기도 전에 2차 오일쇼크가 덮치고 경제위기가 오면서 사회혼란이 가속되는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은 79년 피살됐다. 허먼 칸은 박정희의 유고 사실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했다고 제롬 글렌 박사는 전한다. 허먼 칸은 4년 뒤인 83년에 박 전 대통령의 뒤를 따랐다.

책 내용을 요약하면 4차사회개발을 통해 사회불균형 평형화와 사회통합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향상을 강조했다. 특히 개발계획 20개년의 마지막 계획이므로 인적자원 강화와 사회통합에 맞췄다. 78년에는 비상한 물가고, 부동산 투기, 생활필수품 부족, 각종 생산애로 등 그간의 고도성장정책에 연유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다. 더욱이 79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이 가세하여 한국 경제가 난국으로 빠지고, 80년에는 사회적 불안과 흉작이 겹쳐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 드디어 80년 박정희의 한시대가 막을 내렸다.

허먼 칸의 잦은 한국방문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이 저서에서 그는 한국의 선물문화에 대해서도 소상히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의 선물은 방문의 환영 혹은 좋은 인간관계유지 목적이지 뇌물이 아니므로 외국인들이 거부할 필요 없음을 밝혔다.

허먼 칸 생존시 교우했던 우주공학자인 테드고든(83·유엔미래포롬 창립회장)과 제롬 글렌 박사(64·유엔미래포럼 회장)는 "허먼 칸이 60년대 초부터 이미 한국을 자주 왕래했다"면서 "초기에는 가난하고 느리고 발전할 일이 까마득하다고 했지만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확신을 갖고 한국이 10대 강대국이 될 것이며, 특히 고속도로와 중공업 등 자신이 제안한대로 잘 가고 있다고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의 주요 사건과 정책입안

-1961년 7월22 경제기획원신설, 경제재건 5개년 계획발표, 11월11일 박정희의장 일본미국방문, 12월4 근로기준법 개정공포

-63년 10월15일 제5대대통령 선거 박정희 당선, 1964년 5월7일 울산 정유공장 준공, 6월3 한일회담 반대시위 6·3사태

-64년 9월11일 만 4년 만에 국정감사권부활, 11월31일 국군월남파병 한월협정체결

-65년 9월18일 경부선 철도 복선으로 개통

-67년 5월3 제6대박정희공화당후보 당선

-68년 4월1 포항제철발족, 향토예비군창설, 12월5일 국민교육헌장선포

-70년 포항제철착공, 7월7일 경부고속도로개통, 11월13일 전태일 서울평화시장 노동운동 분신사태.

-71년 2월9일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발표, 4월27일 대통령 3선 당선

-72년 10월25일 정부 새마을운동계획발표, 12월27일 박정희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

-75년 2월12일 유신헌법이 발표

-78년 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9대 대통령에 박정희, 11월7일 한미연합사령부가 정식 발족.

-79년 10월18일 부마사태, 10월26 박정희서거, 12월12 전두환 국군보안사령부 출범


2010-10-04 08:09:08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