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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산책(10)-기마민족설

지식창고지기 2010. 12. 30. 19:25

에가미 나나오의 기마민족 남하설

 

이미 앞서 말했듯, 일본인은 스스로 만계일통의 혈통이라고 믿고 있다. 그 중심에 천황이 있었다. 천황은 일본인에게 신으로 군림하고 있고, 비록 패전후 천황이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었음에도 여전히 일본인에게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인 1948년 만주 철도 출신의 한 사학자가 발표한 한 논문이 천황을 신으로 받들던 일본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게 했다.

 

 도대체 기마민족 남하설은 무엇인가? 이 논문에 따르면 흉노,선비, 돌궐, 오환 같은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을 수립했다는 주역이 되었다는 내용인데, 여기에는 고구려나 부여같은 부여족도 속해 있었으나, 에가미 나나오가 발표당시 한반도 대신 대륙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썼음에도 일본 천황이 하늘에서 내려온 게 아닌 북방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건만으로도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지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부여와 고구려 계통에 가장 가까운 반(半)수렵, 반(半)농업의 북방 기마민족의 한 세력이 말을 타고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한반도로 내려와 마한지역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들의 남하 시기를 대략 3세기 중엽 이전으로 비정하고, 이 세력의 수장(首長)을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조에 나오는 진왕(辰王)으로 추정했다. 이들 진왕 기마민족세력은 다시 남하를 계속해 김해(金海)지방에까지 진출해 변한(弁韓:임나)세력을 정복, 지배했다는 것이다. 에가미는 또 당시 김해지방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따라 이미 왜인이 진출해 있었지만 이들 왜인도 진왕 세력에 정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3세기 말에서부터 4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특히 민족이동에 의한 말 그대로의 격동기로 설명했다. 만리장성 북쪽에 살던 흉노 등 5호족(胡族)이 장성을 넘나들면서 화북지방을 유린했고, 고구려는 남쪽으로 진출해 낙랑?대방을 점령하는데 이러한 분위기에 자극받은 백제와 신라도 체제를 정비하면서 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이렇게 바뀌어가자 이에 불리함을 느낀 진왕의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바다를 건너 왜의 본거지인 북큐수(北九州) 츠쿠시(筑紫)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현지의 왜인세력까지 정복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 이들 기마민족은 결국 변한과 북큐수 지방을 망라하는 한?왜 연합왕국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에가미가 설명하는 최초의 일본 건국인 셈이다. 에가미는 이때의 주인공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10대 천황 슈진(崇神)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까지도 이들 기마민족의 중심지는 경남 김해의 임나(任那)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큐수에 진출한 세력은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4세기 말경 기나이(畿內) 지방에 강대한 대화정권을 수립했고, 이것이 일본의 두번째 건국이며 그 주인공은 16대 오우진(應神) 천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우진 천황은 한?왜연합왕국의 주도자로 활약하는데 남한 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기마민족의 문제점

 

 하지만 3,4세기 김해지방에 북방 기마민족이 존재했다는 실질적인 자료가 없었던 탓에 외면을 받았지만,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왜계통의 유물이 출토되자, 에가미 나나오는 자신의 학설에 부족한 부분, 즉 미스 링크가 완성되었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보인다. 3,4 세기에 북방 민족이 내려왔다는 문헌적 자료도 부족한데다가 마한의 진왕 정권이 기마민족이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에가미 나나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1972년 이후 한국에 몇차례 강연을 하곤 했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중에 하나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 12국은 진왕에 복속되어 있었다."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진왕이 마한 사람이라는 기록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북방 기마 민족 출신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저자인 진수는 배송지의 주를 인용하면서, 그들을 외지 사람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제를 받는다." 라고 말했다. 즉 에가미의 주장처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권이 아닌 마한에 예속된 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삼국지에는 "진한의 노인이 진한은 진나라의 고역을 피하기 위해 한반도로 넘어왔는데, 마한동쪽 땅을 분할해준 것이라고 말해 에가미의 주장을 더욱더 약화시키게 한 것이다.

 

 부여족 남하설(신판 기마민족설)

 

 부산대 한 학자가 주장한 이 학설은 3세기말 부여족이 동해안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김해지역을 장악하고,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에가미 나나오의 주장과 흡사하여 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신판 기마 민족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학자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중 3세기말~5세기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 부장품에 주목한다. 이곳에서 나온 도질토기와 철제 갑주류, 오르도스형 동복(銅 ·이동식 청동솥), 몽고발형주 등의 유물과 선행묘 파괴, 순장풍습 등이 이전과는 구분되는 북방민족의 이동 흔적이라는 것.

이 학자는 ‘통전’ 부여전에 나오는 서기 285년에 모영선비의 공격을 받아 파국에 빠진 부여족의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가 있던 지금의 두만강 하류지역까지 이동해 왔는데, 그들이 해로를 이용해 김해로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학설 역시 문제는 많아보인다. 일단 금관가야의 건국 연대가 적혀 있는 <삼국유사>와 기록이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는 금관 가야의 건국연대가 1세기(42년)로 잡고 있는데, 부여족 남하설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3세기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의 적석 목곽묘가 중앙아시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부여족이 남하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대성동 고분 역시 수많은 유물이 나와있지만, 그 유물들 많은 수가 고구려,백제,가야 삼국에서 나온 유물들과 흡사해 기마설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마민족설은 임나일본부등 식민사관의 연장선상

 

 그 밖에도 문무왕 비문에 쓰인 자신이 투후제천(김일제)의 자손을 근거로 모용선비의 남하설도

주장하고 있다. 이런 기마민족설은 한국과 일본은 결국 한뿌리였다는 주장을 하는 계기가 된다. 이런 기마민족설 덕분에 우리 고대사 초기 역사가 우리 조상이 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은 더욱더 부정되고, 대신 <삼국지>는 더욱더 맹신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동시대이기 때문에 삼국시대보다 약 5,600년 늦은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중국의 시각이고, 중국에서도 서쪽 구석에 살던 그들이 과연 우리나라의 사료를 보고 기록한 <삼국사기>보다 얼마나 더 정확하다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오류많고 부정확한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료 부족과 고증의 한계이지, < 일본서기>처럼 왜곡과 거짓으로 일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서기>를 신봉하는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보다 더 낫지 않을까?

 

 식민사학의 최대 목표는 만반년이라는 우리 역사를 반동강 내어 일본의 건국 연대보다 낮추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지 않아도 허구에 가득찬 <일본서기>를 더욱더 과대포장하고, 그렇지 않아도 연대가 줄어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식민사학자들의 실증 노력(?) 덕분에 3,4세기 고대사까지 삼국은 존재하지 않고, 72개의 소국과 한사군이 존재한 것처럼 꾸몄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의 임나 일본부의 성립을 위한 것이었는데,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부족하자, 제기한 것이 이런 기마민족설이라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기록과 유물을 근거로 해서,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지, 기록을 무시한채 유물만 가지고 연구한다면 뜬구름 잡는 식의 역사가 될 것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한국역사관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