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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 갈등 (송인규 목사)

지식창고지기 2011. 8. 11. 21:05

교회 내 갈등


들어가는 말

 

갈등(葛藤)은 문자적으로는 칡과 등나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상반되거나 모순적 요소가 뒤엉켜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영어의 conflict는 라틴어 confligere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함께”(com-)와 “때리다”(fligere)의 합성어로서, 이 역시 둘 사이에 일어나는 상쟁(相爭)의 모습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갈등을 “개인의 내면에서, 혹은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서로 목표나 이해 관계가 달라 상호 대립의 위치에 처한 상태”라 정의 내리고자 한다.

 

인간의 삶 가운데 발생하는 갈등은 그 요인을 다음의 두 가지 방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원(resources)의 부족으로 인한 욕구나 의지의 마찰 현상이 있다. 예를 들어, 아가방에 장난감이 네 개밖에 없는데, 여섯 아이들이 달려들 때 이런 갈등이 빚어진다. 다섯 명의 직원을 선발하는 데 스무 명이 몰려 아옹다옹거린다든지, 맘에 드는 한 대상을 놓고 벌이는 남녀 간의 삼각 관계도 이런 식의 갈등을 설명하는 대표적 예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타입의 갈등을 가리켜 결여(缺如) 갈등이라 부르고자 한다.

둘째, 어떤 결정 사항이나 취해야 할 행동 방침을 놓고 서로 간에 의견이나 견해가 엇갈림으로써 갈등이 표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태는 결여 갈등 때처럼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원은 충분해도 다른 이유 -- 취향, 소신, 가치관 등 -- 때문에 마찰과 충돌이 빚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방에 장난감이 남아 도는데도 어떤 아이가 어머니를 졸라 찬 바람 부는 밖으로 나가자고 고집을 피울 때 갈등이 야기된다. 또 늪지 보존 지역을 어디로 결정할지, 호주 유학에 대해 식구들의 찬반론이 날카롭게 대두되는 것도 이런 갈등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타입의 갈등을 시차(視差) 갈등이라고 부를 생각이다.

 

물론 우리의 개인적․공적 생활을 보면 방금 제시한 두 가지 타입 -- 결여 갈등과 시차 갈등 --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형태의 갈등이 있는가 하면, 또 꽤 많은 경우 두 가지 요인이 병합되어 갈등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게도 된다. 그러나 일단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갈등을 이렇게 기본적인 두 타입으로 나누고자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기독 신앙과 연관된 갈등 현상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범위를 축소한다고 해도 다루어야 할 분야는 매우 광범위하다. 왜냐하면 “기독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갈등이 발생하는 영역과 관련하여 세 가지 항목을 열거해 보자.

 

(i) 대(對) 사회적 갈등: 타종교, 비종교인 및 소위 사회 기관들 -- 정부, 공공 단체, 지역 사회 등 -- 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
(ii) 교단, 노회 및 타교회와의 갈등: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다른 신앙 공동체와 집단 대 집단의 차원에서 겪는 갈등.
(iii) 개 교회 내에서의 갈등: 자신이 출석하고 섬기는 공동체 내에서 경험하는 각종 인간 관계의 갈등.
(iv) 그리스도인의 개인 내적(內的) 갈등: 마음의 상태와 관련하여 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두되는 내면적 갈등.

 

이상의 범주 가운데 필자는 세 번째 항목을 다루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범위를 좁혀도 갈등의 사태를 초래하는 인간 관계적 맥락은 여전히 다양하기 짝이 없다.

(i) 사역자끼리(담임 목사와 부교역자 사이, 부교역자들 사이에서)의  갈등.
(ii) 직분자(목회자와 장로/집사, 목회자와 성도 간, 장로/집사와 성도 간)가 연관된  갈등.
(iii) 그리스도인끼리의 갈등.

 

필자는 이 가운데 주로 (ii)와 (iii)의 경우에 집중하고자 한다. 또, 교회 내 갈등을 두 경우 -- (ii)와 (iii) -- 로 대별하기보다는 하나로 뭉뚱그려 취급하겠고, 그것도 주로 목회자(및 직분자)의 관점에서 다룰 예정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및 직분자)는 갈등의 사태가 자기와 연관되든지 다른 그리스도인끼리의 것이든지 어쨌든, 지도, 중재, 조언 등의 목회적 돌봄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 글의 초두에서 갈등을 결여 갈등과 시차 갈등으로 나누었지만, 필자는 (전자를 배제하지는 않되) 주로 후자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는, 교회 내에서의 갈등이 결여 갈등보다도 대부분의 경우 시차 갈등의 특징을 띠고 대두되는 까닭이다.

갈등은 왜 생기나?

 

왜 인간의 삶에는 갈등이 생기는가? 이미 지난 분단에서 어느 정도 살펴보았지만, 여기에서는 좀 더 원천적이고 심층적인 이유들을 찾고자 한다. 갈등의 원인(原因)을 규명함에 있어 근원적 원인과 실제적 원인을 나누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신학적 근거에 의한 것이요, 후자는 주로 개인적․사회적 현상에 대한 고찰로부터 얻어진 바이다. 근원적 원인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모든 갈등이 발생하는 원초적 근원을 추적함으로써 밝혀진 그러한 원인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죄된 상태 --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의 최초적 범죄에 이르겠지만 --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죄는 환경의 변화를 초래했고 (창 3:17-18), 이로 말미암아 자원의 부족 현상과 더불어 결여 갈등이 야기되었다. 죄는 또 인간의 전인격을 부패시켰기 때문에 (cf. 엡 4:17-19), 편견과 몰이해 등 시차 갈등의 촉매적 요소가 산출되었다.

 

갈등의 탐구에 있어서 이렇게 근원적 원인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갈등의 실제적 처리와 관련해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근원적 요인은 인간 모두에 해당되는 공통적 현상으로서 인간의 심리적․사회적 상황 이전 -- 논리적으로 사실적으로 -- 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실제적 원인의 규명이 더욱 중요한 임무로 부상하게 된다. 이제 필자는 갈등의 실제적 원인을 네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중복된 채 한 개인에게서 발견될 수도 있다.

 

첫째, 목회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기 내적인 상태(intra-personal conditions) 때문에 갈등이 부추겨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내적 요인들은 주로 부정적이고 파괴적 성격의 감정, 시각/관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어떤 지도자가 건전하지 않은 자아상 형성으로 인해 도가 넘는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그렇지 않은 이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웬만한 농담이나 우스갯거리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고 민감해지는 경우, 그런 갈등을 끼친 장본인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 비슷하게 부정적인 감정의 동요 상태 -- 시기, 상처, 경쟁 의식 등 -- 를 여유 있게 다룰 줄 모르면 지도자는 크고 작은 여러 면에서 모욕을 느끼고, 분노로 반응하거나, 반대로 주눅이 든 채 말수가 줄어들기도 한다. 역시 연관된 사항이지만, 지도자가 매일 매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목회 현장의 사태에 대해 옳지 않은 전망 -- 편견, 오해, 선입견, 부정적 첫인상 등 -- 을 고집스럽게 견지할 경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자잘한 행동거지에 대해서조차 갈등을 느낄 수가 있다.

 

자기 내적인 요인 때문에 툭하면 갈등 관계에 빠지는 사람들은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거나 심지어는 상상력이 자극을 받아 있지도 않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상황을 악화해서 본다. 자기 최면에 사로잡힌 채 방어 태세로 나서든지,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군 원정 식의 전투적 기상을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다.

 

대체로 말해서 목회자들의 경우 이토록 심해지지는 않는다. 목회자로서의 연단을 거친 인품과 사명의식은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기 이전에 보호막 노릇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성숙의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심리적 드라마가 상당히 보편화된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다. 심지어 목회자들의 경우에도 사태가 꼬이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 이때 특히 사단의 궤계가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으므로 -- 이러한 하강 그래프가 결코 다른 이들의 것만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목회자 자신의 개성적․기질적 특성(personality/temperament traits)이 다른 이들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수가 있다. 이 항목은 쌍방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에는 목회자의 개성과 기질이 특이해서 이것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다른 경우에는 목회자가 대하는 어떤 특정 그리스도인들의 개성과 기질이 특이해서 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지닌 개성적․기질적 특성은 매우 유별난 경우가 아니면 그 자체로서 문젯거리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특성들로 말미암아 한 개인의 개인됨, 특유함, 유일무이함(uniqueness)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단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 관계나 조직 생활에 있어서 상호 간에 마찰이나 충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다.

 

개인의 성격상․기질적 특질은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매력으로 혹은 혐기(嫌忌)로 작용한다. “나는 목회자의 저런 면이 싫어” 혹은 “우리 집사님의 그 모습이 마음에 쏙 듭니다” 등의 표현은 실상 어떤 대상의 개성적․기질적 특성에 대한 자신의 호불호적(好不好的)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 또한 그런 반응을 표명하는 사람의 특질에 대해서 호감이나 거리낌으로 반응하게 마련이다. 이 때 싫은 감정끼리 충돌하면 자연히 갈등의 온상이 마련되는 셈이다. 사실 호불호 자체는 그저 감정적이고 기호적 차원의 반응이건만, 이것이 종종 다른 영역에서의 가치 판단이나 평가 행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갈등 상황의 촉발에 기여를 하는 것이다.

 

개성적․기질적 특질이 마찰로 이어지는 흔한 국면 가운데 사고 방식의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연륜이 더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 방식을 고정화시키고 또 그러한 방식에 비추어 다른 이들의 의도와 행동을 판별한다. 이 경우 판별의 주체자는 대체로 자신의 사고 방식이 상당히 건전하다는 신념 하에 행동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충돌이나 마찰의 소지가 다분하고 일단 부딪히면 엄청난 갈등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지금까지 소개한 개성적․기질적 특질, 사람들에 대한 기호적 반응, 사고 방식의 차이 등은 모두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형성되어 온 바이기 때문에 이미 자신의 일부로서 -- 많은 경우 그것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 자리잡고 있고, 마음의 습관과 경향에 뿌리를 박은 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문화적․사회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바로 이 점을 고려하면 납득이 간다. 개성적․기질적 특질로 인한 갈등 유발의 가능성은 일반 그리스도인이든 지도자든 크게 차이가 없다. 오히려 지도자의 경우 자신의 기질적 특질에 대한 확신이 더 큰 갈등을 불러오는 수도 있다.

 

셋째, 목회자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연관해 갖는 행정상의 견해 차이(differences in administrative opinions) 역시 만만찮은 갈등 유발의 요인이다.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면, 아마 이 항목이 목회자와 기타 직분자들 사이, 그리고 직분자들끼리 사이에서 가장 빈번히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행정상의 견해 차이라는 것이 실상 앞에서 언급한 개인 내적인 상태들, 개성적․기질적 특성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견해 차이를 순수히 객관적 시각으로만 볼 수 있다면 (아마 이것은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야 가능해질 법한 일인데), 이러한 차이가 반드시 갈등 상황을 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인식과 사고의 틀을 통하여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행정상의 견해 차이는 많은 경우 겉잡을 수 없는 갈등 상황으로 치닫곤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행정상 견해의 차이는 교회에서 갖는 공적 회의에서 불거지곤 한다. 교회는 회중의 크기가 클수록 각종 위원회, 제직회, 당회, 교역자 회의 등 여러 종류의 행정 모임이 있고, 이러한 모임에 의제로 오르는 사안들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상 견해의 차이가 더욱 많이 노출되고 누적되며 빈번히 갈등으로 전환된다.

 

공적 회의에는 불가사의한 측면이 있어 의견의 차이를 서로 간 심리적 간격의 차이로 바꾸는 힘이 있다. 즉, 어떤 사람과 의견의 차이가 있다 해도 아예 처음부터 일대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 그것이 그토록 심리적 압박이나 갈등 유발의 요인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차이도 일단 공식적 회의 석상에서 표면화되면, 서로 간에 긴장, 심기 불편, 반목의 분위기를 손쉽게 조성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목회자이다. 무엇보다도, 행정상 의견 차이에 연관되어 있는 직분자들을 다독거려야 하기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신과 다른 직분자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노정(露呈)되는 경우이다. 사실 한국의 목회적 상황에서는 거의 모든 행정 모임에 있어 목회자가 수반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직분자들과 상당히 여러 면에 있어서 견해 차이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건수 중 다수는 갈등의 상황으로 이어지곤 한다.

 

넷째, 끝으로 교리나 신앙 전통상의 불일치(disagreements in doctrinal and faith-traditional matters)가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필자가 신앙 전통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한편으로 교리와 연관이 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교리적 요소와는 별개로 작용하는 그런 전통적 요소들을 총망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신학적 방향의 충돌[보수 대 진보], 교파적 전통의 차이[예배 의식과 순서, 교회 직분, 세례 방식, 방언․신유․축사 등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 신앙 행습에 있어서의 강조 유무[주일 성수, 새벽 기도 참석, 헌금과 연관된 사항, 주초 문제] 등이 이에 속한다.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교회가 주로 교파 중심적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심성이 대체로 교리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이민 교회의 경우는 교리와 신학의 갈등이 한국 본토의 교회들에 있어서보다 훨씬 빈번히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이민 교회에는 여러 교파와 신학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한국 사람들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뒤범벅이 된 채 모여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위에서 예를 든 신앙 전통의 여러 항목과 관련해서는 적지 않은 빈도로 갈등이 표출되곤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요인을 네 가지 -- 개인 내적인 상태, 개성적․기질적 특성, 행정상 의견의 차이, 교리나 신앙 전통상의 불일치 -- 로 정리해 보았다. 이제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기술하고자 한다.

갈등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갈등을 올바로 다루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균형 잡힌 갈등관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우선, 갈등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갈등은 일종의 인간 관계적 시험(temp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시험에 의지적으로 굴복하면 죄가 되듯이, 갈등도 그대로 방치하면 연관된 이들의 관계를 파괴하는 등 관계적 죄악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갈등에 대한 마땅한 태도는 한편으로 은폐나 부인이 아니요, 다른 한편으로 방치나 회피도 아니다. 오직 갈등의 현상이나 상황에 대해 건전하고 합리적인 조치를 취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단의 도표를 참조하라.

 

잠복기
(작은 문제들이 쌓이기 시작함)


노출기
(어떤 일을 계기로 갈등이 드러남)


심화기                                          대처기
 (욕, 상처, 악화, 파괴적 상승 효과)                    (대화, 자기 성찰, 노력, 창조적 반응)


단절기                                            강화기
          (회피, 이별, 소외, 심리적 죽음)                      (축하, 깊은 유대감, 형제애, 교제의 축복)


이제, 갈등에 대한 해결책과 관련하여 다음의 네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것들이 누적적으로 작용할 때 갈등에 대한 대처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첫째, 목회자 (또는 직분자)가 평소에 형제 사랑을 신앙의 중요한 원리 및 목표로 삼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나타난 600 가지 이상의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크냐는 질문에 답하여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선별적으로 언급하셨다. 이 두 항목은 각각이 하나의 계명 -- 하나님 사랑 (신 6:5), 이웃 사랑 (레 19:18) -- 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계명들의 의미를 밝히는 원리 노릇도 하는 것이었다 (마 22:40; 롬 13:8-9).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소에 늘 품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신앙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앙의 원리와 관련하여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많이 부여하면서도 이웃(형제) 사랑의 항목에 대해서는 무지와 무시로 반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그릇된 처사는 한 시 바삐 시정되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를 임의로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형제 사랑이 자신의 신앙에 있어 중요한 원리 및 목표로 자리를 잡으면, 갈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엄청난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형제 사랑이 평소의 근본 자세가 된 이들은 -- 비록 갈등 자체를 미화시키지는 않지만 -- 갈등을 오히려 유익한 계기로 포착한다. 예를 들어, 갈등은 괴롭지만 이것을 잘 다룸으로써 성숙의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든지, 이런 기회를 통해서도 무언가를 배우겠다든지, 갈등이 없었더라면 생각하지도 못했을 그런 결과를 창출해 보겠다든지 하는 적극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따라서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에 대해서도 최선의 노력 -- 끝까지 대화하는 자세를 견지함, 상대방이 금방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마음의 문을 닫지 않음, 기다렸다는 듯이 중도 포기를 하지 않음 -- 을 경주하게 마련이다.

 

둘째, 목회자 (또는 직분자)는 갈등과 관련하여 경건의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갈등의 상태나 처지에 빠지기 쉬우므로 이에 대한 조치가 효율적이려면 자기 나름대로의 철두철미한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염두에 둔 대응책은 세 가지 항목에 있어서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i) 정기 검진: 우리는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시간을 떼어 놓고 갈등과 연관된 여러 가지 사항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 (ii) 수술 단행: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갈등을 느끼는 대상자와 더불어 조우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때 대화, 경청, 용서, 회복 등의 단계도 연이어 수반되어야 한다. (iii) 후속 조치: 조우를 시도한 이후 갈등을 겪은 대상에 대해서 개인적․행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전하는 감사의 말일 수도 있고, 서로가 연관되어 취해야 하는 구체적 행동 방침 및 계획일 수도 있다.

 

방금 소개한 둘째 사항은 그 내용이 너무 이상적이라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거의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만일 우리가 첫째 항목에서의 훈련이 평소에 어느 정도 확고히 이루어지고 있다면, 둘째 항목의 훈련도 그리 힘든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목회자는 의견의 차이를 표명하고 수용하는 일에 지혜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회의나 모임에서 의견을 나눌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목회자가 자신도 참석자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종종 목회자가 “주의 종”이란 의식을 확장시켜 그런 자리에서조차 치외법권적 권위가 부여된 것처럼 행동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합당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못한 처사이다.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공평히 거하시고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거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의견과 생각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의견의 제시와 판정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발언 내용의 합리성, 타당성, 적실성 등이지, 발언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항시 부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동시에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자신의 실수나 헛말을 솔직히 인정하기, 신앙 사활(死活)의 문제가 아닌 경우 대다수의 의견에 자신을 쳐복종시키기 등을 배워야 한다.

분명 목회자 편에서 옳은 -- 자신의 오랜 경험과 파악 능력에 비추어 보건대 틀림이 없는 -- 주장을 하는데, 직분자 중에서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의 개인 의견으로는 그 사안이 신앙의 본질에 연관된 것이 아닐 경우 일단은 그냥 양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목회자가 자신이 옳음만을 내세우며 고집을 피우면, 비록 옳은 견해라 할지라도 파괴적 갈등 관계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넓은 아량을 발휘해 양보할 경우 반대자들도 조만간 깨닫게 될 것이요, 머지 않아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용서를 구할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도 목회자는 직분자들의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하고, 직분자들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지혜와 인내심을 발휘함으로써 일반 교우들에 대해 영적 지도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넷째, 목회자는 교리와 신앙 전통에 있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여 가르쳐야 한다. 한 때 사도 바울은 절기 준수 및 음식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을 베푼 적이 있다. 이것은 비본질적 신앙 내용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바울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 (딤전 6:3-4)라는 경고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이고 착념해야 할 신앙의 핵심적 교훈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바울은 본질적 사항에 대해서는 통일을, 비본질적 사항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허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리와 신앙 전통에 있어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어떤 교단이나 교파든 그것이 속한 고유의 신학적 전통이 있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적 교단에 있어서는 성경의 권위와 역사적 신앙 조항 -- 주로 사도신경의 내용 -- 이 바로 본질적인 사항에 속한다. 그 이외에 예정론, 천년 왕국, 여성 안수, 세례 방식 등은 비본질적 사항으로 간주할 것이다. 한국의 주도적 교단인 장로교의 경우에는 조금 달라진다. 보통 장로교에서는 본질적 사항으로서 TULIP으로 지칭되는 5대 교리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내세울 것이다. 그러나 타락 전/후 예정설, 행위 언약, 무천년설/전천년설 등의 사항은 비본질적 사항에 포함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가 자신이 속한 교단의 중심 교리를 파악하여 본질적 사항과 비본질적 사항을 구별하여 가르칠 때만이 교리적 신앙 전통으로 말미암은 갈등을 미연에 방지도 하고, 또 발생 이후라 해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가는 말

 

갈등은 목회자에게나 신앙 공동체에게나 달갑지 않은 손님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이 끼치는 심리적 부담과 아픔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동시에 유기체는 -- 그것이 개별 생명체든 인간 개인이든 공동체든 -- 반드시 갈등을 통해서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목회자와 그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갈등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나약성과 부족함을 깨닫는다. 갈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와 함께 지체가 된 상대방 그리스도인의 처지와 상황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갈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문제점에 집중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고, 아울러 문제 해결과 회복을 위한 방안 모색에 힘을 쏟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갈등 이후의 변화와 성숙을 내다볼 수만 있다면, 갈등은 이미 우리 사이에 위장된 축복으로 찾아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인간 관계와 공동체의 삶에 갈등의 상황이 찾아올 때, 우리는 먼저 그러한 갈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감지하도록 하자. 이것이 우리에게 성숙을 촉발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