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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화물(文化物)은 천국에 보존될 것인가? (송인규 목사)

지식창고지기 2011. 8. 12. 05:59

우리의 문화물(文化物)은 천국에 보존될 것인가?

 

 

I. 서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완성될 천국에 대해 이모저모를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와 조건이 현재의 세상과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완성될 천국과 관련해 사람들이 갖는 질문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천국에서 나는 전에 사랑하던 이들을 만나 볼 수 있을까?
(ii)내가 사랑하던 애완견 “셀다”도 천국에 있을 것인가?
(iii)평생을 공들여 만들어 온 나의 도자기들을 후에 천국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이상의 질문들은 실상 오늘날 존재하는 세 종류의 사물들에 대한 것으로서, (i)은 인간, (ii)는 자연물, (iii)은 문화물과 연관되어 있다.

 

“자연물”은 그 원초적 생성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개입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뜻한다. 상식적 분류법에 따르자면 자연물은 동물, 식물, 광물 등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또 그 외에 해, 달, 별 등 천체 전부가 자연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물”은 다르다. 문화물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재능과 창의력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 낸 간접적 창조물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창 1:26a, 27),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창 1:26b, 28) 하나님께로서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능해진 바이다. “문화물”에는 (i) 실체화된 문화적 사물들 -- 악기, 소설, 자동차, 가옥, 연장 등 -- 과 (ii) 현상이나 활동 -- 언어, 예술, 창작, 추론, 의사 소통 등 -- 뿐 아니라, (iii) 가시적․비(非)가시적 제도 -- 병원, 결혼, 정부, 방송국, 학교, 우정 등 -- 까지 인간이 만들어 낸 비(非)자연적 창조물 전체가 포함된다.

현재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물들 -- 인간, 자연물, 문화물 -- 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즉 완성될 천국에서, 어떤 종류의 사물은 존재하고, 어떤 종류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인가? 다음의 표를 보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종류완성될 천국에서의 보존 여부
 (i)   인간------------------->   그리스도인  (o)
 (ii)   자연물------------------->   있다 (o) ; 없다 (x)
 (iii)   문화물 ------------------->   있다 (o) ; 없다 (x)

 

또 천국에서의 보존 여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입장이 형성된다.

 

(i)입장 A: 그리스도인, 자연물, 문화물 모두가 존재한다.
(ii)입장 B: 그리스도인, 자연물은 존재하되 문화물은 소멸된다.
(iii)입장 C: 그리스도인, 문화물은 존재하되 자연물은 소멸된다.
(iv)입장 D: 그리스도인은 존재하되, 자연물, 문화물은 모두 소멸된다.

필자는 입장 A의 옹호자로서, 특히 문화물의 천국 존속을 열렬히 지지한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런 존속에 대한 성경적 입증을 목표로 하고 있다.

 

 

II. 각 사물들의 천국 보존 여부에 관한 개괄적 토의

 

 (1) 인간
인간이 천국에 존재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종류의 인간이 천국에 존재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완성될 천국에 존재하리라고 주장한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구적으로 쫓겨날 것이고 (마 7:23; 8:12; 22:13),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마 5:20; 요 3:5; 고전 6:9-10), 또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당하리라 (마 5:22, 29-30; 10:28; 25:41; 눅 16:23-24; 살후 1:9; 계20:10; 21:8)고 묘사되어 있다. 바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완성될 천국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좀 더 급진적인 경향의 사람들은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을 내세운다. 이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만인구원론의 근거로서 신학적 이유 -- 하나님의 사랑, 능력, 의지 -- 를 내세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보편주의적 구절들(unversalistic texts) -- 대개 “모든 사람”으로 표현되는데 (요 12:32; 롬 11:32; 골 1:18; 딤전 2:4 등) --을 최종 구원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입장 -- 일부 구원론이든 만인구원론이든 -- 이든지 완성될 천국에 인간이 존재하게 되리라는 주장에는 동의하는 셈이다.

 

 (2) 자연물
천국에서도 자연물이 존속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찬반 양론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하는 대표적 인물로서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774)가 있다. 그러면 아퀴나스는 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자연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심판 이후 세상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식물과 동물들이 이 갱신(renewal) 가운데 존속할 것인가?” 라고 질문한 뒤,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시한다.

 

  게다가, 만일 목적(end)이 끝난다면, 그 목적을 지향하던 사물도 끝나야 한다. 동물과 식물은 인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바였으니, 왜냐하면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植物)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 9:3)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동물적 생명이 끝나면, 동물과 식물도 끝나야 한다. 이러한 갱신 후에는 인간 안에 있는 동물적 생명이 끝날 것이므로, 식물이든 동물이든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아퀴나스만큼은 비관적이 아니지만, 어쨌든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역시 자연물의 천국 존속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는 피조계의 본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실현하시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이야기한다.

 

  만일, 피조물이 언약 역사의 외적 기초로서 기능을 다하는 것이 어떤 성격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 즉각 떠오르는 것은 시중(service)의 개념이다 … 은혜 언약의 역사(history)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와 피조물의 역사(history)인 시중 사이의 관계는 … 순전히 하나의 섬김(service) -- 섬기는 자는 자기 목표나 자기 유익은 전혀 갖지 않고, 자신의 섬김을 결코 다른 이에게 양도할 수 없는 그런 섬김 -- 이다.

 

  또 다른 대조를 하나 더 시도해 보자. 피조물의 섬김은 하나의 도구적인 것이다. 피조물은 절대로 주체가 되는 일이 없다.

그가 자연의 운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그의  「교의학」 집필이 미완성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논리가 어디에서나 암시하는 바인즉, 우주는 결코 영구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것의 공헌 기간(service)이 완결되었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쉽게 폐기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물의 천국 존속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이레니우스(St. Irenaeus, 약 130-200)는 종말을 묘사하면서 자연물의 존속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예언된 축복은 의심할 바 없이 왕국의 시대에 속한 것이다. 바로 의인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지배를 할 때요, 또 새롭게 되고 자유로워진 피조계가 하늘의 이슬로부터, 또 땅의 풍요함으로부터 열매를 맺어 모든 종류의 풍성한 양식을 산출할 때이다 … 또 피조계가 회복되어 짐승들은 인간에게 순종하고 복속(服屬)하여(그들은 원래 아담 아래 복속되어 순종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음식물, 곧 땅의 소산을 섭취하는 방식으로 되돌아 갈 때가 바로 이 때이다.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이레니우스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가 비록 자연 세계를 인간의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 세계의 자체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샌트마이어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은 만물, 특히 가시적 피조물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오직 이것만이 그 피조물들의 존재 이유는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유용성만이, 모든 가시적 사물들이 위계 질서 가운데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어거스틴으로서는, 전 피조계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telos)은 아름다움이요, 또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것들의 장엄한 공동체 -- 그 공동체의 부분 부분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완전 상태(integrity)를 보유하고 있는데 -- 를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피조물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체의 미적 가치에 두는 어거스틴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보존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비록 그 역시 이 방면에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설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부터 그의 신학적 입장이 가지는 명료성만은 얼마든지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장차의 세상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물질적 형태를 보리라는 것 -- 영적 사물이든 물질적 사물이든 만물 가운데 어디에나 현존하시고 그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또렷이 인식하리라는 것 -- 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고, 또 절대로 믿을 만한 일이다”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렇게 다양한 입장들을 앞에 놓고 어떤 평가를 해야 하는가? 필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분명 자연물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데, 그러한 신념의 근거를 다음의 네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i)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자연계의 창조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대상에 대해서 “좋다”고 평가하셨다 (창 1:4, 10, 12, 18, 21, 25).
(ii)언약의 효시는 하나님께서 자연계와 더불어 맺으신 것에서 찾을 수 있고 (창 9:8-11),  이 언약은 후에도 계속 언급된다 (렘 33:2-21, 25-26).
(iii)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유익성 여부와 상관 없이 다른 하등 동물에 대해서 은혜의 섭리를 베푸신다 (시 104:10-13, 16-22, 25-30, 145:9; 147:8-9; 148:3-10; 마 6:26, 28-30; 10:29).
(iv)모든 피조물은 종말론적 구속의 완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 11:6-9; 65:25; 롬 8:19-22; 골 1:15-20).

 

 (3) 문화물
그러면 문화물의 천국 존속은 어떠한가? 사실 이 질문은 신학계에서 본격적인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대개 세 가지 방향으로부터 답변이 시도되었다.

 

첫째, 화란의 신칼빈주의자들과 그 후예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가장 집요한 예가 프란시스 나이젤 리(Francis Nigel Lee)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직업의 본질과 관련하여 종말론적 의의를 추구하면서 문화물의 영원한 가치를 인정한 이들이 있다. 셋째, 주석가들 가운데 선지서나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완성 부분을 다루면서 문화물의 미래를 언급한 경우가 있다. 비록 이 주석가들이 체계적이고 포괄적 설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파편적으로나마 문화물의 천국 존속을 이야기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II. 문화물의 천국 보존에 대한 지지 논증

 

필자는 어떤 근거에 의해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지지하는가? 왜 새 하늘과 새 땅에 문화물 -- 물론 그 문화물들이 성령님에 의해 정화됨을 전제로 하지만 -- 이 보존되리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필자는 다섯 가지 항목의 논변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논증 1: 문화적 노력 (및 결실)은 타락 이전에도 있던 바인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것을 이유 없이 멸하시지 않는다.

이 논증은 두 가지 서로 맞물린 논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i)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문화적 의도, (ii)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한 경제성의 원칙(principle of economy)이 바로 그것이다. 

 

(i) 하나님의 문화적 의도: 문화적 노력 및 결실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의향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즉,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정하신 섭리 방식은 인간의 문화적 노력과 결실을 함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어도노반(Oliver O’Donovan)은 피조계의 구속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세상 및 인류에 대한 구속은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에덴 동산으로 되돌려 놓는 일만을 돕는 것이 아니다. 그것[구속]은 또 우리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바 -- 그 이상의 운명 -- 를 지향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 피조계는 그 자체의 목적과 목표를 지닌 채 우리에게 주어진 바이므로, 세계 이야기(world's story)의 결과는 최초 상태로의 순환식 복귀가 될 수 없고, 오히려 피조물을 그 “허무한 데”(롬 8:20)로부터 해방시킴에 있어 나타나는 바 바로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강조: 필자의 것].

 

그러면 무엇이 타락 이전의 문화 활동에 포함될 수 있을까? 다섯 가지 사항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①하등 동물에 대한 다스림.
창 1:26, 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②각종 식물(植物)에 대한 재배와 관리.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③에덴 동산에 대한 관리와 경작.
창 2:8, 15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④각양 동물에 대한 본성의 파악 및 분류.
창 2:19-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


⑤사회의 기본 단위 구성.
창 2:23-24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ii) 하나님의 경제성 원칙: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그것들을 통한 섭리의 열매들 -- 특히 문화물 -- 을 이유 없이 멸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문화적 사명을 주시고 (창 1:28) 그에 따른 결실을 원하셨는데, 인간이 맺은 그러한 문화적 결실을 멸절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낭비요 모순된 처사라는 것이다. 존 호키(John C. Haughey)는 -- 비록 그 내용이 피조계 전반(롬 8:15-21)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하기는 하지만 -- 후에 문화물의 운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소망이 멸절에 의해 우롱 당하지 않을 것이듯이 피조물의 소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만일 일차 피조물[자연물]이 소망에 대한 근거가 있다면, 이차 피조물 --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써 일차 피조물에 대해 형체를 부여한 것[문화물]인데 -- 에게는 얼마나 더 큰 근거가 있는 셈이겠는가?! 이차 피조물[문화물] 역시 어떤 식으로든 이 종말론적 계획안(eschatelogical scenario)의 일부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경제성의 원칙을 명백히 성경으로부터 도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간원은 이 원칙의 실행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반영한다고 하겠다.

 

시 138:8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만일 하나님의 문화적 의도와 경제성의 원칙이 사실이라면, 논증 1은 자연히 참된 것으로 입증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상과 같은 논변과 상관 없이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내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문화물이 포함될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①창조의 초기: 동산.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②천국의 완성: 도성.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city)을 예비하셨느니라.


계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인간은 처음 창조시 “동산”에서 살았으나 천국의 완성 때에 이르러서는 계 21:1-2에 있듯 “도성”에 거주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 “동산”에서 “도성”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적 진전이나 개현(開顯)이 함의되어 있고, 또 그러한 진전 과정에 포함되는 문화적 산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보존될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2) 논증 2: 그리스도의 구속 효과는 만물 -- 이에는 문화물도 포함되는데 -- 에 미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은 인간에 대한 유익의 관점에서 설명되곤 한다. 개혁파 신학은 이와 관련하여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택자를 의중에 두고 이루어졌다 -- 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 말이 구속의 효과가 택자와만 연관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좀 넓게 보자면 비택자를 포함한 인류 일반, 자연계, 그리고 심지어 천사들에게조차 구속의 유익이 끼쳐진다는 말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런 유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은, 비록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의 목적 때문에 고난을 받고 죽으셨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많은 은택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유익에도 보탬이 된다. 그들[개혁파 신학자들]은 일반 은총의 복들 또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믿는다 …

 

  끝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결과적으로 의(義)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 -- 새로워지고 영광스럽게 된 인류의 거처로서 적합한 곳인데 -- 을, 또 하급 피조물 또한 공유하게 될 영광의 자유 (롬 8:18-22)를 산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는 의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직접적이고 일차적으로는 택자의 구원을 위한 것이면서도, 간접적이고 이차적으로는 천사, 인류, 자연물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문화물의 경우에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문화물에 대해서도 유익을 끼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물론, “예!”이다. 그 근거는 바울 서신의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상기 구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발케 하는데, 이런 유익을 누리는 대상은 “만물”이다.

그런데 이 만물 --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유익을 누리는 만물 -- 의 범위는 창조 및 섭리의 대상인 만물의 범위와 정확히 일치한다. 바로 몇 절 전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골 1:16; cf. 요 1:3), 그 창조된 만물을 붙들고 (cf. 히 1:3) -- 골 1:17을 쉽게 풀이하면, “만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지탱되고 있다” 라는 말이 된다 -- 계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섭리]하고 또 구속하신다. 따라서 “만물”이라는 구속의 대상은 동시에 창조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음을 받은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의 섭리와 구속 사역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이 “만물”에는 어떤 대상이 포함되는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에 비추어 볼 때, 존재하는 모든 대상의 총화가 곧 만물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대상은 모든 피조물로서, 천사, 택자, 인류 일반, 자연물, 문화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중 앞의 네 가지 대상들이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직․간접적인 유익을 얻는다고 하겠지만, 문화물의 경우에는 이러한 수혜(受惠)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골 1:16-17, 20의 만물 가운데 문화물이 포함됨은, 성경에서 말하는 피조물 가운데 자연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문화물 또한 포함됨을 지적함으로써 설명이 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창조”가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i) 1차적 창조: “어떤 것을 무에서 생성케 하다” (to bring forth something out of nothing).
①무에서 유[원물질(prime matter)]를 창조.
②인간 영혼의 창조 (아담의 경우: 창 2:7).


(ii)2차적 창조: 기존의 물질 -- 그러나 그 자체로서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의 결과를 산출할 수 없는 물질 --을 활용하는 창조 행위.
①흙에서 짐승을 만드는 경우 (창 1:24).
②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경우 (요 2:7-9).
③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우 (엡 2:1 및 요 3:3).


(iii)3차적 창조: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 하에 생겨나게 된 것을 묘사 [섭리적 생성]
①자연물: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를 통해 개입하심으로써 생겨나는 대상 및 현상 (시 74:17; 104:30; 렘 31:22 등).
②문화물: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역사하심으로써 간접적으로 산출하시는 모든 대상들: 토기 (사 45:9); 결혼 제도 (딤전 4:3-4).

이제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피조된 대상을 성경적 어휘에 따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의 피조 대상 가운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iii) 제 3 창조 가운데 문화물에 대한 내용이다.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ה??)?’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진흙이 토기장이를 가리켜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라고 질문하는 내용은 “너는 무엇을 창조하느뇨?” 라고도 바꿀 수 있다. 이 경우 토기는 창조물(피조물)로 간주되는데, 바로 여기에서 문화물 역시 만물 가운데 포함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일컬어지는 것은, 이와 같이 문화적 실체뿐이 아니라 문화 제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딤전 4:3-4  혼인을 금하고 식물(食物)을 폐하나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κτίζω]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κτίσμα]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바울은 디모데가 사역하던 에베소 지역에서 이미 영지주의의 맹아(萌芽)를 발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함을 일깨운다. 그들의 혼합주의적인 가르침은 불건전한 금욕주의를 낳았는데,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극단적 경향에서 벗어나게 할 목적으로 혼인과 음식의 신성한 가치를 강조해 가르친다. 그런데 이 두 항목 -- 혼인과 음식 -- 이 가치를 지닌 것은,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혼인과 음식은 분명 문화 제도와 연관이 되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 대상에는 토기 등 예술품과 결혼 등의 문화 제도가 포함되므로,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주는 은택은 문화물에게조차 미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물에 구속 사역의 은택이 미칠 때 이것들 또한 하나님과 화목케 되므로, 그들은 성령님의 정화를 통해 얼마든지 천국에의 보존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3) 논증 3: 인간의 문화 활동이나 업적이 천국에 보존되리라는 언급이 있다.

 

이 논증은 요한계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바 천국에서 이루어질 어떤 현상에 기초한 것이다. 다음의 구절을 보라.

계 21:24, 26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권위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이 구절에 의하면, 종말에 등장할 새 예루살렘에는 땅의 왕들이 모든 영광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 왕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1) 몇 가지 해석
(i)대상 비지칭설(non-referential interpretation)
이 견해에서는, 상기 구절이 그저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움과 위용을 구약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 이 왕들이 어떤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표현들 [왕들, 영광, 존귀, 들어옴 등]은 단지 상징 -- 요한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묘사(representation)를 본따 개념을 잡은 것인데 -- 의 일부이다. 새 예루살렘은 사 45:14; 49:23; 60:10, 11에서와 같이 세상의 공물(貢物)을 받는 당당한 도성으로 그려져 있는데, 왜냐하면 선지자 당대에는 세계적 수준의 주권 형태가 이런 식으로 인정과 이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결국 “왕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일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성 있는 해석이라고 볼 수가 없다. 구약의 경우 -- 위에서 언급했듯 사 45:14 등 -- 를 보더라도 공물을 바치는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져 있다. 따라서 도성의 위용에 대한 강조 때문에 출입자가 누구인지 잘 알 수 -- 혹은 알 필요 -- 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해석학적 도피 행위로 여겨진다.

 

(ii) 비중생자 존재설 (“presence of the unregenerated” interpretation).
이 해석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좀 기괴한 이론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성밖에는 중생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후에 하늘 나라의 영향력에 감화를 입고 중생하여 그들의 영광스러운 소유물들을 천국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대표적 주창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신비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다. 영화롭게 된 교회와 별개로, 새로워진 땅에는 나라들 (계 22:2) -- 왕 밑에 조직을 갖추고 하늘에 있는 도성의 영향에 힘입어 구원을 받게 되는 -- 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을 제공한 올포드(Henry Alford)의 입장은 수긍하기가 좀 힘들다. 이미 계 20:11-15에서 최후 심판이 마무리되고 중생자와 비중생자는 완전히 분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중생자만이 거하는 새 예루살렘 성 -- 비록 성의 밖이라고는 하지만 -- 에 아직도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왕정 체제로 존재한단 말인가? 따라서 해석 자체가 타당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 입장에 입각하여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실효성이 낮은 작업이라고 하겠다.

 

(iii) 중생자설 (regenerational interpretation).
이 입장은 “땅의 왕들”이 중생한 왕들로서 전에 어떤 나라의 통치자였다고 본다. 포셋(A. R. Fausset)은 그들이 “한 때는 오직 자기들의 영광만을 추구했었으나, 일단 회심한 후 새 예루살렘에서는 자기들의 영광을 가져와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주이신 분의 발 밑에 내려놓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해석은 본절에 대한 설명으로서 가장 타당하게 여겨지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한 두 가지의 약점도 있다. 첫째는 주석상의 문제로서, 계 21:24에서는 “만국,” “땅의 왕들”이라고 하여 모든 나라의 모든 왕들을 이야기하고 있지 결코 중생한 왕들만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문화물의 보존을 중생자의 업적과 관련해서만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항에 부딪힌다. 만일 오직 중생한 왕들만의 문화적 산물과 업적 -- “영광” -- 이 새 예루살렘에 유입된다고 해석할 경우, 문화적 업적과 관련하여 일관성 있는 설명이 결여된다. 만일 중생자의 문화적 산물만 천국에 보존된다면,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 연합해 창출한 문화물 -- 대부분의 문화적 산물은 이렇게 산출되게 마련인데 -- 은 어떻게 될 것인가?

 

(iv) 천년왕국적 행태설 (millennialistic interpretation).
이 입장은 계 21:24-27의 내용이 천년 왕국 당시에 이루어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만일 땅의 왕들 가운데 천년 왕국 당시에 중생을 한 이들이 그들의 영광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가져 들어오는 것이라면, 이는 문젯거리를 해결해 주는 매우 훌륭한 해석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주로 전천년설(premillenialism)의 주창자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자(dispensational premillenialist)와 역사적 전천년설자(historic premillenialist)에게서 공히 발견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이제부터 커지기 시작한다. 요한계시록의 계시 진전에 따르면, 천년 왕국의 내용은 이미 20장으로 끝이 났고 21장부터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및 그에 대한 묘사가 중심이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후에 다시 천년 왕국에 해당하는 활동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특히 계 20:11에는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예전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v) 만인구원론적 해석 (universalistic interpretation).
일부 주석가들은 만인구원론(universalism)에 입각해 계 21:24-26을 본다. 그리하여 “만국”과 “왕들”은 땅의 모든 나라와 그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존 스위트(John Swee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국(nations)은 성경의 다른 책에 있어서와 똑같이 성경적 의미로 간주하는 것이, 또 땅의 왕들은 음부와 농탕(弄蕩)을 쳤고 (계 17:2),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던 (계 6:15-16) 집단들과 같은 범주로 보는 것이, 최상으로 여겨진다 … 그가 인용한 시편에서 열국은 교만하고 반역적이기 때문에 진압되어야 했지만 (시 2:4-9)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의 도성에 영입되어야 했던 것 (시 86:9; 87:4-6)처럼, 그의 비전에서는 짐승의 표를 지니고 어린 양의 책에 기록되지 못함으로써 멸망을 당해야 할 나라들을,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나라들(all the nations)(계 15:4)을 그의 새롭게 된 창조계로 모아 들이신다 … 두 가지 그림 [시편과 계시록] 모두가 전포괄적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하나도 남김 없이 구원하시고, 동시에 그들 역시 자기들의 문화적 업적을 천국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는 해석은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물의 천국 보존은 꼭 만인구원론이 전제되어야 하고, 또 계 21:24-26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만인구원론은 성경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필자는 이 해석을 배척하는 바이다.

(vi) 비(非)구원적 결산론 (“non-salvific settlement” interpretation).


마지막 입장은 왕들의 거룩한 성 입성을 일시적 체류로 보고, 또 입성자들의 구원과 상관 없는 일의 처리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면에서 특이하다.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는 고대의 왕들이 수행하던 두 가지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대 군왕들의 세력과 권위는 오늘날의 정치적 통치와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그것은 한편으로 정치적인 면에서 강도가 높았고 (politically intensive)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치적인 면에서 좀 더 광범위한 (non-politically extensive) 것이었다. 우리가 정치권이라고 생각하는 그 영역 내에서 고대의 통치자들은 매우 강력한 종류의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 고대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독재자나 독재자에 거의 가까운 역할을 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고대 통치자들의 권위는 정치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도 했다 … 한 마디로 줄여서, 고대의 군왕들은 그들 국가의 문화적 생활 전반에 걸친 권위자이기도 했다 … 한 국가의 왕은 오늘날 여러 지도자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는 광범위한 권위 -- 산업의 총수, 예술․유흥업 및 성(性)에 있어서의 여론 조성가, 가정의 관심사를 대표하는 이 등 -- 를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사야와 요한은 왕들의 거룩한 성 입성을 “열국의 부요”를 거두어들이는 것과 연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 군왕들이 이렇게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성은 문화적 업적의 헌납 및 정치적 공과(功過)의 결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사안이 바로 우리의 관심사이다. 이들은 이렇게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새 예루살렘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마지막 해석 --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잠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자신들의 찬란한 문화적 산물을 완성될 천국에 맡긴다는 것 -- 이 가장 큰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2) 비구원적 결산론의 의의


리차드 마우의 해석에 물론 난점과 의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어떤 해석보다 훨씬 타당성이 높게 여겨진다. 특히 땅의 왕들이 가져오는 영광 (계 21:24-26)은 이사야서 60장의 실현임을 생각할 때 그 적실성은 배가가 된다.

 

사 60:4-11, 16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긍휼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요한계시록의 한 주석가는 계 21:24-26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옛 질서에 속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으로서 새 질서로 영입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의 천국은 결코 세상 부정적(world-denying)인 열반 -- 인간이 지상적 실존에서 겪는 불치의 재난으로부터 도피해 들어가는 세계 -- 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심을 긍정적으로 인치는 곳이다. 하늘에 쌓여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화는 실상 열국의 보물과 재산 -- 그들이 지상에서 최상의 것으로 알고 있었고 사랑해 온 것들로서 모든 불완전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광채에 의해 변형이 된 것들 -- 임이 드러난다. 추하고 더러운 것 -- 곧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다른 것 --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외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 가운데 어디에서도 우리는 이보다 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전포괄적인 범위에 관한 웅변적 진술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열국의 보물과 재산이 천국에 보존되는 정황을 현대적으로 표현함에 있어, 아마도 F. N. 리보다 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열국의 영광과 존귀를! 또 땅의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보화를! 미합중국의 엄청난 기계 공학과 상업적 품목들, 독일과 러시아의 음악, 고대 그리스의 예술, 또 스페인, 프랑스, 화란, 그리고 이탈리아의 예술, 일본과 영국 남서부 등지의 우아한 정원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으리으리하게 아름다운 양탄자들, 아프리카 주민과 아이레인의 민속들, 부쉬맨들이 바위 위에 그린 그림들, 또한 베토벤, 그리그,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음악, 렘브란트와 콘스타블, 다빈치의 그림들, 괴테, 밀튼, 유진 마레이즈의 시들, 루터와 칼빈, 어거스틴, 워필드의 신학 등 … 이 모든 것들이 죄성 있는 현재의 첨가물들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새 예루살렘의 홀과 박물관 등에서 영원토록 전시되고, 즐겨지며, 관람되고 경청될 것이다.

 

만일 계 21:24-26에 대한 해석 가운데 (vi) 비구원적 결산론이 가장 타당하다면 -- 사실 필자는 지금까지 그렇다는 것을 설명해 왔는데 -- 우리는 문화물의 천국 보존에 대한 또 한 가지 중요한 확증을 얻는 셈이 된다.

 

 (4) 논증 4: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그런 연속성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 결실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는 연속적인 사항도 있고 불연속적인 사항도 있다. 예를 들어, 완성될 천국에는 이 땅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발견될 것이나 (계 21:3) [연속성], 사망과 고통의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계 21:4) [불연속성].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존재하리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내용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상기 구절에 나타난 어구 “세상이 새롭게 되어”는 문자적으로 하자면 “중생/갱신(παλιγγενεσία)에 있어서”이다. 본절의 중생과 관련해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이 갱신의 대상은 누구인가? 한글 개역판의 “세상”은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서 단지 의미의 명확성을 위해 보충해 넣었을 뿐이다. 마치 NIV가 “만물”(all things)을 넣어 “만물이 새롭게 될 때에” (at the renewal of all things)라고 부드럽게 만든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이러한 갱신의 시기와 관련하여 “내세”(來世) (막 10:30; 눅 18:30)를 언급하고 있어서, 이 일의 발생이 오는 세상에 대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갱신”의 대상은 “세상”이고, 이 점에 있어서 한글 개역판의 말풀이는 매우 적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παλιγγενεσία는 매우 드문 용어로서 신약에서는 꼭 한 곳에서만 더 사용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παλιγγενεσία)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물론 이 구절에서는   παλιγγενεσία가 개인의 갱신/중생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 19:28과 딛 3:5의 공통점은 갱신 혹은 중생에 있다. 두 구절 사이의 차이인즉, 전자는 이 세상의 갱신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개인의 갱신(중생)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둘 사이에 하나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개인이 중생할 때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하듯이 세상이 중생(갱신)할 때에도 그 전후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도표에 의해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중생한 개인에 있어서 불연속성과 연속성에 관한 도식이다.

도표 1: 중생한 개인에 있어서 불연속성과 연속성


왼편의 내용은 중생 이전과 중생 이후 달라진 사항을 예시한 것이다. 중생하기 전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과의 관계에서 원수, 소외, 단절이 그 특징이었으나 중생 후에는 화평, 참여, 내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중생자는 신체적 면모, 정신적 기능, 정서적/기질적 특징에 있어서는 과거와 동일한 내용을 견지함으로써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똑같은 추론을 세상에 대해서도 해 볼 수 있다. 세상 역시 중생(갱신) 전후에 있어서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함께 나타날 것이다. 역시 다음의 도식을 참조하라.

도표 2: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 있어서 불연속성과 연속성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사단, 세상, 죄가 그 편만한 세력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재림 후에는 그 모든 세력이 거두어졌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자, 자연물, 문화물은 완성될 천국에 보존될 것이므로, 이런 점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를 잇는 연속성의 사항이 된다.

 

이렇게 개인의 중생과 세상의 갱신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의 유추는 신학자들 역시 강조하는 바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빙크의 설명을 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로서 옛 것이 지나고 새 것이 되었듯이 (고후 5:17), 이 세상 역시 현재의 형상(form)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에 의해 그 옛 형상의 내부로부터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 인간 개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종말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중생(rebirth) 또한 일어날 것이다 (마 19:28).

 

그러나 아직도 논증의 입지가 확고히 굳혀진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까지만 설명을 시도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그러한 연속성의 항목 가운데 문화물이 포함된다는 것이 입증하는 일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 지금의 논증 과정은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반갑게도 연속성에 해당하는 사항과 관련하여 밝은 빛을 비춰 주는 내용의 성구가 있다.

 

계 14:13또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自今)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더라.

 

본절에서 우리의 눈을 가장 강력히 끄는 내용은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한 일”은 그저 “일”(ἔργον)이다. 요는 이 일 속에 어떤 항목이 포함되느냐 하는 것이 논증의 설득력 여부를 결정하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소위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노력과 결실[전도, 예배, 헌금 등]만이 천국에 보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의 구절들은 일상 생활에서의 노력이나 열매 또한 천국에 보존될 것임을 강변(强辯)하고 있다.


(i)달란트 활용.
마 25:21,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ii)약한 자에 대한 섬김.
마 25:34-36, 40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iii일상 생활의 성실한 수행.
골 3:22-24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위에 나타난 세 구절의 공통점은 이 세상의 활동이 오는 세상과 어떤 면으로든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한 종은 많은 것으로 맡기움을 받았고, 약한 자에 대한 섬김은 주님께 한 봉사로 자리매김이 되었으며, 종들의 성실한 임무 수행은 유업의 상을 수여 받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소위 영적 성격의 활동 -- 영혼의 구원이나 교회 봉사 등 영적 영역에서의 노력 -- 이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나 참여하는 문화적 노력과 결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문화물 역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의 연속성을 반영하는 항목 가운데 포함될 수 있다고 하겠다.

 

 (5) 논증 5: 그리스도의 재림 시 불타 없어지는 것은 문화물 자체가 아니라 문화물에 수반된 죄악적․세속적․사단적 요소이고, 오히려 문화물은 정화되어 천국에 보존된다.

 

이 논증은 그 자체만으로는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입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 논증들과 합성적으로 작용하면 강력한 설득력을 보유하게 된다. 게다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은 불심판을 받아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燒滅)된다는 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무비판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에 제동을 건다는 의미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문화물의 소멸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완전 멸절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 근거를 대개 다음의 성구 내용에 두고 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런데 완전 소멸설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보다도 영어 사용권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훨씬 더 영향력을 미쳐 왔는데, 그 이유인즉 KJV가 다른 사본을 기초로 하여 “드러나리로다” 대신 “불타 없어지리라”(shall be burned up)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한글판 개역 성경의 난외주에 “어떤 사본에, 타지리라”로 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고이다.

 

“드러나리로다” 혹은 “불타 없어지리로다”에 대한 배경적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상기 구절의 개략부터 생각해 보자. 벧후 3:10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세 가지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i)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감.
(ii)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짐.
(iii)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남 (혹은 불타 없어짐).

 

첫째,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 이 말은 대기권으로서의 하늘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의미인데, 마치 화살이 “쉭” 소리를 내며 지나가 버리듯이 그런 일의 발생이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 하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계 20:11).

 

둘째,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 “체질”은 στοιχεία의 번역어로서 어떤 이들은 고대 희랍 철학자들이 설명한 바 흙, 공기, 불, 물의 4대 원소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해, 달, 별 등의 천체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결국 우리의 현상계는 불에 의한 가공(可恐)할 파괴력으로 말미암아 그 근본 구조에서부터 해체가 일어날 것이다.

 

셋째, 필자가 논증의 핵심으로 내세운 바로서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 (혹은 불타 없어진다).” 만일 우리가 사본들 가운데 시내산 사본(א), 바티칸 사본(B), 모스코 사본(K), 풀피리안 사본(P)을 좇으면, εὑρεθήσεται를 지지하는 셈이고,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나 레기우스 사본(L)을 인정하면 κατακαήσεται를 취하는 것이 된다. 한글 개역판과 NIV는 전자를, KJV는 후자를 채택했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

이 εὑρεθήσεται되는 것으로 읽으면[독법 A], 이 말은 땅과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업적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 그 앞에 환히 드러난다는 뜻이 된다. 반면,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κατακαήσεται된다고 읽으면[독법 B], 이 말은 언뜻 보아 땅과 그 가운데 있는 인간의 업적들이 불타 없어진다는 뜻으로 판명이 된다. 렌스키 같은 주석가는 후자를 지지하면서 전자는 “생각의 흐름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는가 하면, 클락은 오히려 전자가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러므로 최선의 방책은 땅과 그 중에 있는 일이 드러나리라는 독법(讀法, reading)을 수용하여, 이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또 사실 이 독법이 불가능할 정도의 난독(難讀)은 아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이심을 기억하라. 은은 불 가운데 연단을 받는다. 만일 어떤 이가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하면 각 사람의 공력(work)은 불에 의해 나타날 것이요, 불은 각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일을 했는지 테스트할 것이다 … 그러므로 베드로가 땅과 그 중에 있는 일이 드러나리라고 한 말의 의미는 소멸하는 불이 그 일들의 무가치성을 드러내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법 A를 지지한다고 할 경우, 문화물은 결코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불심판을 거쳐 그 본연의 모습대로 천국에 보존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혹시 독법 B를 채택한다고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불타 없어지는 것은 문화물 자체가 아니라 문화물에 연관된 죄악적․세속적․사단적 요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법 A는 불타 없어진 이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독법 B는 불타 없어지는 양태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독법에 의하건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배제하는 해석 결과는 야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시각을 견지하고 있으면 다음에 나타나는 바울의 설명도 문화물의 천국 보존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빛을 던져 주는 셈이 된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공력을 주로 영적인 사항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문화적 노력과 결실도 얼마든지 공력의 항목으로 채택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키는 이러한 확신을 매우 단순히 진술한다: “인간의 문화에 있어서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것은 무엇이나 정화되고, 온전하게 되며, 변형되어 새 피조계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는 궁극적으로 로마 가톨릭 문서에 나타난 종말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좇아 그의 성령 안에서, 우리의 본성 및 진취 정신으로 말미암은 열매 -- 인간의 긍지, 형제로서의 교분(交分) 및 자유 -- 를 지구상에 흩뿌려 놓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하고도 우주적인 왕국, 곧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과 은혜의 왕국, 공의와 사랑과 화평의 왕국을 성부께 바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이번에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 광채를 발하며 변형된 채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논증의 초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벧후 3:10 -- 특히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는 내용 -- 만으로는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논증한 네 가지 항목이 전제된다면, 제 5 논증은 문화물의 천국 보존의 주장과 설명에 큰 유익을 끼치는 것이 될 수 있다.

 

 

IV. 결론

 

문화물과 문화적 노력의 천국 보존이라는 주제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신학계의 주목을 끌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간과는 시정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 신학적 주제가 그 중요성에 있어 다른 어떤 주제에 못지 않음을 세 가지 이유로써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인정하면 할수록 천국의 삶에 대한 풍요함과 영광스러움이 우리의 심령을 자극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주제에 대한 고찰로 말미암아 우리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더 구체적으로 사모하게 되고, 주님의 재림과 천국의 실재에 대해 깊은 동경심이 유발됨을 느낄 것이다.

 

둘째, 우리의 현실 생활에 있어 좀 더 충실하고 좀 더 헌신적이며 좀 더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 자세가 함양된다. 왜냐하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관여하는 일상적인 일과 활동 --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성실한 근무, 올곧은 학문 연구, 정직한 상업 행위, 교사로서의 의연한 학생 지도, 자녀 양육 등 -- 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마음 깊이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모토가 공허한 입술치레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게 해 준다. 이 땅에 살면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할 때, 그것이 꼭 거창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나 구조악과의 치열한 싸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필자는 대규모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참여 활동 또한 매우 중요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생활에 연관되는 조그만 영역이나 사항에서부터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대규모적 활동 역시 실패하기가 십상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에, 문화물과 문화적 노력의 천국 보존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가정, 학교, 직장의 하찮아 보이는 세부 영역에서부터 좀 더 환히 빛으로 드러나고 좀 더 독특히 소금의 맛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주제의 설명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궁금점들은 아직도 미해결의 영역에 남아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시간․공간은 지금과 똑같이 작용할 것인가? 우리가 입는 부활의 몸은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천국에서 인간의 제(諸)활동은 어떤 영역에서 어떤 양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문화물들은 어떤 식으로 그 죄악적 요소가 근절될 것인가? 모든 문화물은 하나도 남김 없이 -- 그것이 타종교의 예술 작품이든 사단을 숭배하던 수단이든 -- 모두 정화되어 천국에 보존될 것인가? 천국에서 우리는 계속적인 발전을 경험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발전의 성격은 무엇이고, 또 어떤 방면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이 가운데 상당히 많은 질문들은 답변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대한 우리의 탐구와 사모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본질적 사항이 바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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