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이즘이란 무엇인가? 유대교의 경전과 학자들 (9)/정연호
유대이즘이란 무엇인가?
유대교의 경전과 학자들 (9)
타나임(tannaim) 시대 (7)
타나임4 세대
타나임 4세대의 학자들 대부분은 랍비 아키바의 제자들이다. 바르-코크바 항쟁 이후의 랍비 유대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은 세대이다.
유다 바르 일라이 (Judah bar Ilai)
흔히 랍비 유다라고 하면 유다 바르 일라이를 가르키며 주후 약 100-180년 생존한 인물이다. 랍비 아키바와 랍비 타르폰의 제자이며 랍비 유다 벤 바바 (Judah ben Bava)에 의해 안수를 받고 유샤(Usha)에 자신의 학당을 열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 미쉬나를 편집한 유다 하-나시(Judah Ha-Nasi)가 있다.
그의 스승 랍비 아키바의 해석 방법을 따라 그는 레위기에 대한 미드라쉬 (‘시프라’)의 기초를 놓았다. 그가 내린 법적인 결정 중 600개 이상이 미쉬나에서 인용되고 있으며, 그의 어록 중 약 3,000개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시프라’와 ‘토세프타’에 그의 이름이 다른 어느 타나임 학자보다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가 랍비 메이르나 랍비 시므온 바르 요하(카)이와 의견의 충돌을 빚을 때마다, 궁극적으로는 그의 의견이 할라카로 채택되었다 (탈무드 ‘에루빈’ 46 후). 할라카와 아가다 양쪽 모두에 그의 견해가 많이 진술되어 있어서 ‘로쉬 하메다브림’, 즉 모든 주제의 대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탈무드 ‘브라코트’ 62후; 사밧 33 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한 미쉬나의 상당한 부분이 스승 바르 일라이가 수집한 것들이었다.
당시의 많은 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역시 수공업(手工業)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노동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노동은 일한 자를 명예롭게 하기 때문이다” (‘네다림’ 48후)는 말이나 “누구든지 자식의 아들에게 수공(手工)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사실상 자식을 도둑으로 만드는 것이다”(‘키두쉰’ 29후)라는 어록을 남겼다. 대부분의 다른 현인들과 달리, 랍비 유다는 선행이 공부보다 우선 순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례식 참석이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곤 했다.
시므온 바르 요하(카)이(Simeon bar Yochai)
브네이 바락에 있던 랍비 아키바의 학당에서 13년간 수학하였다. 심지어 아키바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감금되어 있을 때도 그를 방문하여 학문적인 토론을 벌였다. 스승 아키바에 대한 애착과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는 스승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는 갈릴리 드고아에 자신의 학당을 열었고, 미쉬나를 편집한 유다 하-나시 (Judah Ha-Nasi) 역시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그가 학당에서 가르친 결과물인 출애굽기의 미드라쉬와 신명기 미드라쉬에는 랍비 아키바의 학문적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로마 통치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비난하였고 타협하지 않는 로마의 대적자였다. 바르-코크바 항쟁을 진압한 로마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처형령을 내린 로마 당국을 피해 아들 랍비 엘르아자르와 함께 은둔하였다. 그에 관한 전설을 담고 있는 탈무드 기록에 의하면, 처형령이 철회될 때까지13년 간 동굴에 숨어 살면서 토라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동굴에서 피신생활을 할 시에 그가 여러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면서 유대 신비주의 종파인 카발라의 주요 교본인 ‘조하르’의 원저자 (原著者)라는 전승이 있다 (‘조하르’는 주후 13세기 작품이다). 그는 토라 공부외에 다른 일상적인 일애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비타협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은둔 생활에서 나와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사절단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하드리안 황제 때에 내려진 할례 금지령을 철회해 줄 것을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요세 벤 할라프타 (Yose ben Halafta)
주후 약 100-160년 경의 인물이며 랍비 아키바의 마지막 제자들 중의 한 명이다. 랍비 문헌에서 “랍비 요세”로 불리고 있다. 미쉬나와 여러 바라이타에서 300회 이상 그의 진술이 인용되고 있다. 그의 동료 유다 바르 일라이와 함께 산헤드린 재건에 공헌하였으며 미쉬나 편집자인 유다 하-나시의 스승이다. 유다 하-나시는 법적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요세 벤 할라프타의 견해에 큰 존경을 표했고 할라카의 논쟁에서 요세의 의견이 유다 바르 일라이와 랍비 메이르의 의견보다 우세하였다. 그는 갈릴리의 세포리의 한적한 동네에서 피장(皮匠)으로 생계를 꾸리며, 율법 재판소와 학당을 이끌었다. 그의 다섯 아들 모두 유명한 학자였다.
랍비 요세는 ‘세데르 올람 라바’라는 제목의 ‘바라이타’ 편저자인 데, 창세로부터 그의 저작시까지의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이 책은제2성전 시대의 사건들 중에서 다른 곳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는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어서 이 시대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랍비 메이르 (R. Meir)
뛰어난 학자요 논리의 대가로서 주후 약 110-175년 생존했으며, 랍비 아키바, 랍비 이스마엘 벤 엘리샤, 랍비 엘리샤 벤 아부야가 그의 스승들이다. 하드리안 황제 핍박 당시에 랍비 유다 벤 바바에 의해 비밀리에 안수를 받고 랍비가 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하드리안 황제가 죽었다 (주후 138년).
그는 미쉬나의 설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설계에 기초하여 유다 하-나시가 미쉬나 본문을 편집했다는 것이다. 메이르의 이름은 미쉬나에 330회 이상, 토세프타에 452회 나타나고 있다. 무명으로 되어 있는 미쉬나 진술의 대부분은 랍비 메이르와 랍비 나탄의 것으로 보고 있다. 설교자로서 그는 공개 강론을 할 때마다 남자는 물론 여성들도 학당으로 모여 들었다. 그는 강론의 3분의 1은 할라카에, 3분의 1일은 아가다에, 나머지 3분의 1은 우화나 비유에 할애하였다. 바르-코크바 항쟁이 실패로 돌아 간 후 메이르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따라, 로마에 대한 화해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 대체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메이르에 있어서 토라 연구는 가장 최고의 종교적 가치였다. 그래서 그는 “토라를 준수하는 이방인은 대제사장과 동격”이라고 선언하였다 (‘바바 카마’ 38후). 그의 어록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 시간을 줄이고 토라를 공부하라”; “이스라엘 땅에서 종신토록 살고, 그 땅에서 난 열매를 제의적인 정결을 유지한 상태에서 먹으며, 히브리어를 말하고, 아침 저녁으로 ‘쉐마’(이스라엘에 들으라 너희 하나님은 한 분이신 여호와시니…신 6장 4절 이하의 말씀)를 암송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내세(천국)에 자리가 확보되어 있다”; “아담을 만들 때 사용된 흙은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모아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로쉬 하샤냐’(새해)에 심판을 받으며 판결문은 대속죄일에 인(印)이 찍힌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갚으시듯이, 당신도 그리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