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사/종교 관련

정경의 형성사

지식창고지기 2011. 10. 24. 20:24

정경의 형성사
정경
 
 1. 정경(Canon)의 개념과 '정경 문제'의 중요성
 
정경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주후 4세기 정경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4세기에 교회는 정경의 경계를 정하거나 경경 속에 들어갈 책을 선발 완료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던 것들을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교회는 단지 이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책들의 목록을 작성했을 뿐이다!"(Zahn)
 
주후 397년에 카르타고에서 모인 북아프리카 총회에서 사람들이 정경적 책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이미 그 범위와 권위가
굳게 확립된 책들의 목록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미 정경은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정경을 둘러싼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요한 제믈러는 성경책들이 신성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비평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1771-1775) 초대교회
의 결정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문자적 영감에 대한 정통적 교리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성경의 역사적-
비평적 연구의 길을 닦아 놓았다. 이때부터 책들의 '목록'에 대한 관심은 '각개의 책'들에 대한 비평으로 이어졌다.
 
만약 기독교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정경을,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이제는 기독교가 새로운 교파나
분파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비기독교화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경에 대한 문제는 동방-서방 교회의
분열이나 종교개혁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2. 구약의 정경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비평학자들은 다니엘서가 기원전 6세기에 먼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실제 일어난
역사에 근거한 예언 기술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이 포로기 수세기 이후에 쓰여지고 수집되고 외형이 다듬어 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근거로써 구약의 정경에 대해 살펴 보자.
 
요세푸스 : 요세푸스는 구약이 이미 스물두권의 책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
제4에스라서의 증거 : 1세기 말경의 묵시문학에서, 거룩한 책들이 불타버린 이후 에스라가 신적인 도움을 받아
                                스물 네권의 책들을 받아 적었다는 전설이 발견된다. 이 전설에 기초하여 사람들은 에스라가
                                정경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제4에스라서에서는 이런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예수스 시락 : 외경의 하나인 예수스 시락은 2세기 초에 살았던 한 인물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
                    그의 손자가 번역한 헬라어 서문을 보면 이미 구약은 기원전 2세기 초에 경계가 정해진 단일체로 존재했다.
                     주후 2세기 초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구약 성경을 '확립된 자료'로서 알고 있었다.
 
사마리아 성경 : 사마리아인들은 오직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과의 협동 작업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포로기 이후에는 공동작업으로 만든
                        성경을 가질 수 없었다. 만일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만의 책들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책들은 포로기
                        이전의 옛 히브리 문서들이다. 모세의 다섯 권의 책들은 포로기 전, 다윗과 솔로몬 훨씬 이전에 이미 하
                        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브네 총회 : 비평학자들은 70-100년 사이, 야브네 총회에서 정경의 모습이 확립되었고 그때 전도서와 아가서도 인정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70-100년 사이에 유대인 학자들이 야브네에서 정규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 구약의 후기 형성을 시사해주는 종교 회의에 대한 자료는 없다.
                    그 모임에서 72명의 장로들이 랍비 '엘 레아자르 벤 아자랴'를 임직하던 날, 그들은 전도서와 아가서가
                    손들을 부정하게 한다는 말을 전수해 주었다.
                    이 책들이 손들을 부정케 하느냐에 대해 서로 논쟁했다는 것은, 이미 전도서와 아가서가 거룩한 책들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히브리어 구약 정경은 예수스 시락 이전에 이것이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원후에 인간적 결정에 의해 정경이 형성된 어떤 종교 회의나 총회는 발견되지 않는다.
                   구약은 그 중 가장 마지막에 쓰인 책이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저술 연도 만큼 오래된 것이다.
 
3. 신약은 비평학자들의 말과 달리, 4세기 이전에 이미 정경으로 '닫혀' 있었다.
① 19세기에는 신약 책들의 저작 시기를 '후기로' 잡으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성경 저작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초기에는 언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신서들과 복음서들이 서기 2세기의 작품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사도들 이후에 곧이어진 세대에서는 예수님을 목격하고 그 내용을 전승해 주는 사람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성문화된 성경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의 감독들은 교회 생활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신약 성경
     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언급을 하지 않았다.
    주후 1세기에 바울의 서신서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모아져서 회람되었다.
    아직도 구전 전승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던 시대인 1세기에는 구약과 함께 신약 성경을 묶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2세기 초엽의 책, 1세기 말엽 클레멘스의 책에서 정경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공동체 보존에 목적을 두었으므로 신약 성경의 존재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생활과 교회
    의 하나됨을 논했다.
 
② 1,2세기에도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폰 캄펜하우젠은 구약의 말씀들은 성문화된 책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었던 반면 예수님의 말씀들은 아직 그렇지는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신적 권위를 갖고 있었고 성문화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적혀 있는 바와 같다 : 많은 이들이 부름을 받았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적다"(바나바스 4:14) "
    그리고 다른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
                                                                "(제2클레멘스서 2:4)
    사도들 직후 세대 사람들은 이미 고정된 복음서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사실들을
    그 책들을 통해 되돌아가 짚을 수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여러 편지에서 이미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복음서의 구절을 근거로 들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신약은 구약을 보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구약)의 진리가 예수님의 오심과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제대로 표현되고 실현되었다고 생각했다. 성경은 확장된 것이 아니라 실현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대적자들이 복음서의 권위를 문제 삼을 때, 그는 복음의 모든 진리가 그들의 구약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③ 주후 2세기 초에도 성문화된 복음서가 있었고, 파피아스는 복음서에 대한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
    주후 2세기 초의 파피아스는 (그 전에) 이미 존재하던 마태와 마가의 복음서를 사용했다.
    파피아스는 예수님을 직접 알고 있었던 자들, 혹은 사도들의 말을 들었던 자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했다.
   "나는 행복스럽게도 노인들(첫 번째 세대)로부터 들은 것들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것이다.
  " 파피아스는 회중들을 위해 이미 존재하는 복음서의 주석을 하기 위해 생생한 증언을 살아 있는 증인들의 말을 정보
    로 얻었다.
 
④ 정경은 마르시온이 창안한 것이 아니고 그는 정경을 훼손했다.
    마르시온은 창조의 신(데미우르그; 행위와 정의와 형벌의 신)과 구원의 신(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선한 사랑의 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자신의 교리와 상충되는 부분들을 삭제하고 어떤 책을 버렸다.
    하르낙은 이 마르시온이 정경의 개념을 처음으로 창안했다고 주장했다.
    테오도르 짠은 마르시온이 한 일이란 고작 오래 전부터 유산으로 간직해 오던 것들을 그들로 하여금 좀 더 의식하도
    록 만든 것뿐이라고 했다. 마르시온은 복음서들과 사도들의 책에 삽입(과 수정)을 가했다. 훼손했다.
 
    터툴리안은 마르시온을 정경을 갉아먹는 쥐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것들이 덕을 위한 규정들과 계명들 혹은 수사법의 예 등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체로서는 한 분의 동일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터툴리안)
 
⑤ 3,4세기 전에 이미 신약 성경은 정경으로서 닫혀 있었다.
   오리겐은 논란이 되었던 책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책들, 일반적으로 거부되었던 책들, 아직 논란이 되었던 책들.
   오리겐은 교회가 영감성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 그 책들의 '저작권'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사 연구를 통해 옛 전승들과 접할 수 있었다.
   정경의 형성은 주후 267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의 제39차 부활절 서신에 의해 이집트에서 마무리
   되었다.
 
신약의 범위에 대해서는 아리안주의자들과 정통주의자들 간에 이견이 없었다.
그는 신약 성경의 경계를 방어하고 어떤 것도 정경 안으로 끼어 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정경적 책들의 목록을 제시하여 후대에 허구적 책들이 여기 속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고자 했다.
 
어거스틴도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에 대해 찬성을 표했으며, 정경의 범위는 히포 레기우스의 아프리카 총회에서도 똑같은 범위로 확인되었다.
 
히포 레기우스 선언이 카르타고 총회에서는 다시 한 번 인준을 받게 되는데(397), 예배 의식에 속한 성경 낭독 시간에는 정경만이 사용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정경의 목록이 덧붙여진다.
 
정경의 논란은 성경이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이단들에게 오용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논란이 되었지만, 정경은 이미 '닫혀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