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게이였다고?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
![]() |
▲저자인 테오도르 W. 제닝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홈페이지 |
“예수는 게이였나?” 하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동연)>는 이 ‘불필요한’ 질문을 “최소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예수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로 합리화하면서 시작한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이고 논점을 일탈하는 저자의 논리는 책에서 되풀이되며, 성경이 말하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뛰어넘은 고귀한 ‘사랑’을 그들의 ‘퀴어’ 문화로 대체해 버린다.
저자는 논의를 시작하면서 “보다 친숙한 용어들에 수반되는 모종의 지적인 방해물과의 단절”을 위한다며 ‘동성애적(homosexual)’이라는 단어를 동-성애적(same-sex)으로, ‘이성애적(heterosexual)’을 이-성애적(cross-sex)으로 대체한다. 동성애보다 이성애가 더 어색해 보이는 이러한 단어 배치는, 어떻게든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보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그에게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도,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던 “한 백부장”도 동성애 관계의 함의(含意)일 뿐이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겟세마네 동산의 ‘벌거벗은 젊은이’에게마저 게이적인 시선을 보낸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는 말씀이 절로 떠오른다.
저자의 주요 주장은 이렇다. 4복음서에서 예수가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실지언정 ‘사랑’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사랑한다’고 표현한 사람(남성)들은 성애적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여기에는 도마복음까지 동원된다.
심지어 가장 고귀한 섬김의 행위로 여겨지는 ‘발을 씻기시는 예수’ 장면마저 ‘젠더 전복’적으로 바라본다. 신약성경의 다른 장면에서 발을 씻기는 역할은 모두 여성이 담당했는데, 이 장면에서만 남성(예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예수가 사랑한 남자>. |
이러한 저자도 상식과 창조신학에 기반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동성애 혐오자’라고 몰아붙인다. 일부 동성애 혐오자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 데 분노하는 것처럼, 일부 동성애자들에 의해 이성애자들 모두 ‘동성애 혐오자’들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 동성애 반대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들을 ‘혐오’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들이 ‘결혼’과 ‘입양’을 요구하는 등 이성애자들 고유의 행위와 관습마저 점령해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을 없애고 동성애를 확산시키며 똑같은 권리를 누리겠다는 것을 반대할 뿐이다.
2천년 전 예수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라도 용서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그곳에서 동성애자를 만나셨다 해도 용서하셨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는 “세리와 창기의 친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예수의 다음 발언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닐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저자는 자신이 스스로 제기한 “예수는 게이였을까?” 하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게이와 스트레이트 또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또는 양성애자)에 대한 오늘날의 범주들이 고대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경험과 행동을 쉽게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열린 결말”, “비판을 수용하는 태도”로 미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면, 그의 ‘게이적 성서 읽기’는 시작부터 부정됐을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동성애는 실제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동성애가 일정 부분 정착하고 확산되고 있는 저자의 고국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들만 봐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