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3.1운동의 기독교
들어가는말
한국근대의 동학농민과 3.1운동이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력과 상관관계를 살펴보고, 일그러진 역사적 소산의 반성과 각성을 통해 시대를 통찰하고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성서의 메시지를 들어보고자 한다.
1> 동학농민운동
19세기인 1894년 일어났던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은 바로 이러한 정세의 핵을 짚고 발생한 사태였다. 즉, 동학농민전쟁은 서세동진의 압박 아래 놓인 조선의 운명을 서학에 대립하는 동학, 즉 민족적 주체를 세운 자각을 바탕으로 하여 타개하려는 움직임이었고 봉건질서의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던 민중들의 삶을 해방시키려했던 혁명적 기운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과 혁명의 바람은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인 조선조의 외세 의존적인 정책으로 의해 압살 당하고 만다. 이 동학농민전쟁의 성패는 이후 1백년의 우리역사에 가장 중대한 갈림길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동학농민전쟁의 패배는 첫째, 서학의 지배에 의한 정신문명의 예속화, 둘째, 개혁적 요구의 좌절에 따른 수구적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 셋째, 제국주의적 외세에 의한 민족 전체의 식민지화라는 결과를 낳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외적 도전에 대하여 깊이 통찰함으로써 무엇이 필요하며 어떤 주체적인 준비가 있어야 하는지 돌아보지 않고 일신상의 영달과 필요하다면 외세라도 끌어들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려 했던 지배층들의 행태는 20세기를 맞이하는 조선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백년의 고통을 가져오는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 백년의 역사에서 우리는 국권의 상실, 식민지백성으로서의 비극, 분단과 민족상잔, 독재체제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등으로 이어지는 간고한 역정을 지내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를 통해서 우리가 주목하고 되는 바는,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잘못 내린 선택과 결정의 영향력이 1백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잘만 하면 그것은 1백년, 즉 1세기의 민족사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3.1운동의 빛과 그림자
1919년의 3.1 민족운동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매우 중요한 민족사적 전환점이었다. 세계는 조선이 매우 순응적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그에 만족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것이 허구라는 점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이었다. 토지를 비롯해서 일체의 삶의 근거지를 박탈당한 조선민중들은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정치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고, 당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망국 10년사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민족의식은 성장했고 이에 기초하여 조선민중들은 만세운동이라는 방식으로 독립쟁취를 위한 길에 뛰어 들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동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최적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맨손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조선민중들의 함성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로 하여금 동방의 등불이라는 찬사를 받게 했고, 당시 중국의 반식민지(反植民地) 운동인 5.4 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사건이 되었다. 3.1 운동의 현실적 좌절은 우리민족에게 몇가지 경향을 낳게 했다. 하나는 그대로 일제의 억압정치에 굴종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실력을 길러 때를 노리자는 준비론자들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당장의 항쟁으로 나서자는 투쟁론자들이었다. 대세는 굴종파와 준비파였으며 항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조선반도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3.1 민족항쟁으로 일정하게 확보된 자유의 공간을 통해 일본은 이른바 문화정치로 사태를 풀어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조선의 삶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언론과 출판의 공간이 어느 정도 생겨나면서 다소간의 숨 쉴 공간이 있게 된 것이었다. 막무가내의 탄압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여긴 일제의 지배전략이었으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3.1 운동의 성과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끊임없이 조선의 지도층들을 회유해나갔고 이에 넘어가 변절한 지도층들은 적지 않았다.
이때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최근 천주교에서는 한국 천주교가 민족사에 저지른 죄과에 대한 고백과 사죄를 했다. 천주교는 (1)1796년과 1801년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겠다는 명분하에 서양 선박과 병력을 요청한 사실, (2)제사금지에 따른 민족전통의 말살과 관련한 문제 (3)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4)신사참배의 허용등 고난의 민족사에 동참하지 못했던 일을 되짚어 반성하는 작업을 했다. 개신교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민족의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천당론>에 사로잡혀 현세의 고난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믿음과 용기를 불어넣는 일에는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신교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민족문제에 대하여 고뇌하면서 적극적인 항일전선에 나선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체로는 문화정치의 공간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민족의 고난, 그 중심에 서서 하나님 나라의 해방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일에 자신을 잃고 개인의 영혼구원이라는 차원에만 자신의 사명을 한정시켜 민족사의 질곡을 풀어나가는 일에 머무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정신사적 전통은 이후에도 여전히 맥을 이어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성숙시키는데 있어서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민족사와 유리된 기독교의 현실은 결국 기독교 자체의 기득권을 낳았고 이것을 방어하고 유지하는 일이 보다 우선적인 과제로 되어버리는 사태를 가져왔던 것이다. 해방은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기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시 정권과의 결탁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마는 사태로 이어지고 말았다.
나가는 말
성서는 거대한 제국에 둘려 싸여 있던 이스라엘이라는 소국이 자신의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어떻게 지켜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갈망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역시 거대한 대제국에 포위되어 민족의 생존을 가늠하기가 어려운 형편에 놓였었으나 그에 대한 자각이 불철저했으며, 진정 공의로운 나라와 미래를 세우기 위해 진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민족 전체가 시련을 겪는 세월을 속히 극복하지 못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향후 1백년의 시대와 역사에 대한 전망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 우리의 후손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 마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선조로서 수치스러운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분단이 반세기가 지나고 있으나 이 문제 하나조차 민족내부의 역량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국제정세의 움직임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드러내신 바처럼, 모든 민족의 생명이 힘을 얻고 공의로운 시대를 살아나갈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맞이하는 1백년의 세월은 지난 1세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어갈 것을 바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달리 말해서, 오늘의 시점이 실로 중차대한 세기적 전환의 선택을 해야 할 시기라는 뜻이다. 지금 이 시기의 선택이 잘못 될 경우, 또다시 1세기의 고난을 자초하는 민족이 될 수는 더 이상 없다. 오랜 세월 병석에 누워 있던 병자에게 예수께서는 일어나라 하셨다. 그리고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민족이 지난 1백년의 병석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깊은 묵상의 재료로 삼아 버리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역사의 시대가 열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난 1백년의 민족사 속에 담아놓으신 그분의 음성과 메세지를 발견하라는 숙제 앞에 우리는 서있다. 시련을 겪고도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는 민족은 어리석다. 그 광야의 방랑이 끝나는 시간이 언젠가는 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갈 바를 몰라 헤매이는 우리 민족의 앞날에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희망의 길>을 뚫어내는 일이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리대로 백년의 아픔과 백년의 절망과 백년의 간구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때 민족사의 미래는 또다시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휘둘리게 될 것이다. 민족사의 축복을 구하는 길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말씀에 있다. 우리들 손에 쥐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이상 낭비하는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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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에서의 동학과 기독교 >
서론
3.1운동은 일제 강점하에서 일제 침략을 분쇄하고 개화사상을 보급, 실천하기 위한 자립과 자주를 절규한 범국민적 민중운동이다. 해외에서 <신학청년단>을 중심으로 독립에 대한 궐기를 준비하던 것이 일본 유학생들에게서 먼저 일어났고(2.8 독립선언), 국내에서는 천도교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연합하여 이루어졌다.
본 글에서는 천도교와 개신교측의 모의와 연합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본론
1. 천도교
3.1운동의 처음 계획은 1917-1918년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논자는 동학혁명 이후 성숙, 발전되어온 민중운동이 시대적 여건과 국제적 조류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3.1운동을 의식한 것이 아니고 "대중봉기운동을 동학운동의 재현과 계승으로 실천에 옮겨야 하겠다"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천도교측에서 주도적으로 3.1운동을 계획했던 사람은 이종일씨로 그는 손병희에게 갑오, 갑진개혁운동의 재현을 건의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신문 창간의 중심세력이었던 "대한제국민역회"와 별도의 모임을 갖고 대대적 시위를 모의하였다. 또한 천도교 직영 인쇄소 "보성사"를 비밀기지로 삼았다. 그곳에서 오세창, 권동진 등과 거사할 것으로 협의했으나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주춤하고 민중포섭을 하다가 1912년 7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해 10월 14일 민족문화 수호운동본부 결성을 계획하고 보성사내에 본부를 두고 1913년 강연회를 개최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무기구입까지 협의하여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천도교 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16년 중반 남정철, 이상재, 박영효, 김윤식 등과 비밀교섭을 하였으나 긍정적인 반응을 이상재에게만 얻고 기독교측에서 호응을 얻고 장효근이 의병의 부활을 강조하였으나 손병희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1917년 다시 건의를 받은 손병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천도교 구국안과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과 연합하여 3.1운동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1918년 1월 27일 파고다 공원을 봉기장소로 정하고 5월6일 운동의 3대 원칙을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으로 정하고 "대중화"를 위하여 타종교와 연합하기로 하였다.
이같은 과정에 의해 천도교가 기독교에 연합제의를 한 것이 1919년 2월 초순이었다.
2. 개신교
개신교에서는 그동안, 독립협회, 신민회 등을 중심으로 민중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서북지역에서는 장로교가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05인 사건(1910년)을 겪으면서 기독교의 항일의식은 고조되었고, 장로교의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숭의, 숭덕 각 학교와 평양, 선천, 정주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조직화에 착수한 것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독살당함으로써 민중봉기의 요인이 성숙된 이후 2월초에 천도교측의 이종일을 만난 이승훈이 결심함으로써 서북지방에서 양자의 연합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 경기지역은 감리교에 의해 주로 청년층을 대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 해 왔고 YMCA가 대표적이었다. 윤치호와 박희도가 1919년 1월 하순경부터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중에 박희도와 천도교측의 이종일이 만나 연합을 결심함으로써 3.1운동의 실질적 힘이 된 학생측이 가담하게 되었다. 거기에 2월 24일 한용운, 백용성 등 불교계까지 합류하여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족대연합전선을 이룩하였다.
선언서의 기초는 최남선이, 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교단별로 선정하여, 천도교측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 지에 배포, 장소는 박희도의 제의에 의해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 변경되어, 성격은 비폭력 평화시위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일경의 폭력진압아래 희생이 극대화되자 폭력시위로 발전하기도 했다.
3.1운동의 전개는 대개 전기(3월 1일-19일), 중기(3월 20일-4월 9일), 후기(4월 10일-30일)로 굴분할 수 있는데 전기는 격렬한 시위과정, 중기는 운동의 절정기, 후기는 일제의 탄압에 의한 시위운동의 위축기로 볼 수 있다.
결론
3.1운동에서의 동학과 기독교
3.1운동을 천도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구한말이래 민족운동의 전통과 민족구원을 열망하는 애국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성경의 정의, 자유, 평등, 해방 등의 양자의 이념이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 두종교의 참여는 동학을 '사교'라, 기독교를 '외래종교'라고 비판하던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양자를 민족종교로 인정받게 하였다
자료출처 이만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