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사/종교 관련

5.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지식창고지기 2011. 11. 21. 06:27

5.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1.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아가 1장 5절
"검어서 아름답다"일 수도 있다.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 혹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본문을 읽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서로 다른 뜻으로 읽거나, 의도적으로 다른 뜻을 읽어내려 한다. 원문 자체가 이미 다양한 이해의 문제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서 번역은 의미의 의도적인 차 별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마당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아가 1장 5절이다. 거기에 보면, 한 처녀가 자신의 외모를 묘 사함에 있어서, 자기의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검게 되었다는 사실과 자기가 예쁘게 생겼다 는 것을 동시에 표현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독자들로서는 그 여성이 한 말의 진의를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 여성의 말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는 검지만 예쁘다(I am black but beautiful)", 혹은 "나는 검어서 예쁘다(I am black and beautiful)"처럼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인 문화 속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흑색은 추한 것을 묘사하는 말이고, 백색은 미인을 뜻하는 말이라고 세뇌를 당했을 것이다. "백색 미인"이라는 화장품 선전의 문구도 바로 이런 흑인들과 황색인종을 노리는 상술일 것이다. 백색 문화적 배경에서 이 본문을 읽 는 이들은 단연코, "나는 검지만 예쁘다" 라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 다.

백인 지배의 문화권에 살면서도 흑인 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검은 것이 아름답다"고 스 스로 자부심을 길러 온 흑인들의 경우에는 "나는 검어서 예쁘다" 라는 뜻으로 이 본문을 읽 고 싶을 것이다. 황인종의 경우는 백색 미인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한 "검지만 예쁘다" 라고 읽으려 할 것이고, 각 인종이 저마다 다른 피부 색깔을 가지도록 창조되었다 는 사실을 인정하고 각 인종의 피부색깔의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려는 이들, 곧 자신의 타고 난 피부 색깔에 긍지를 느끼는 이들은, "나는 검어서 예쁘다"라고 읽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번역한 여러 번역들을 대조하여 보면, 제각기 서로 다른, 상반되는 두 가지 이해를 따로 따로 번역에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독자들은 어느 한 의미를 택일하기보다는, 두 가지 가능한 의미를 다 받아드리고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가 1장 5절을 몇 몇 번역에서 비교해 본다.

[개역한글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 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공동번역]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가뭇하지만 케달의 천막처럼, 실마 에 두른 휘장처럼 귀엽다는구나.

[표준새번역]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내가 비록 검다마는, 게달의 장막처럼, 솔 로몬의 휘장처럼, 귀엽다고도 하더라.

RSV I am very dark, but comely, O daughters of Jerusalem, like the tents of Kedar, like the curtains of Solomon.

NRS Song of Solomon 1:5 I am black and beautiful, O daughters of Jerusalem, like the tents of Kedar, like the curtains of Solomon.

NKJ Song of Solomon 1:5 I am dark, but lovely, O daughters of Jerusalem, Like the tents of Kedar, Like the curtains of Solomon.

YLT Song of Solomon 1:5 Dark {am} I, and comely, daughters of Jerusalem, As tents of Kedar, as curtains of Solomon.

2. "양 떼 곁에서 얼굴을 가린" 여자
아가 1장 7절
목동을 따라 다니는 창녀

아가 1장 7절에 보면, 처녀가 목동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목동에게 삐삐를 칠 수도 없고, 양떼를 몰고 나간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디쯤에서 양떼 를 먹이고 있다는 소식도 없고, 기다리다 못해, 소녀는 얼굴에 너울을 가리고, 다른 목동들 의 뒤를 따라, 그가 사모하는 목동을 찾아 나선다. 그러면서 소녀는 자기가 이렇게 까지 하 고서 목동을 찾아 나서게 만들어 버린 그 목동을 원망한다.

이 본문을 한국의 독자가 읽을 때와 유목 문화적 배경을 지닌 문화권의 독자가 읽을 때 그들의 본문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성서 본문을 읽을 때 주석의 도움을 받아야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대표적인 구절이기도 하다. 여자가 너 울을 쓰고 목동들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혹은 양떼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유목 문 화권에서는 창녀의 몸짓으로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유목 문화에 생소한 독자들은 그 소녀 의 행위를 아주 정숙한 소녀의 사랑스런 모습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자기의 목동을 찾으러 다른 남자 목동들의 뒤를 따라다니기는 하면서도, 남자 목동들의 놀림을 피하려고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멀리 뒤에 처져, 얼굴까지 너울로 가리고 따라다니고 있으니, 오히려 정숙 한 여성의 조심스런 행위로까지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번역판에 반영되어 있듯이, 여기 묘사된 여성은 유목사회의 창녀이다. 사랑 하는 목동을 향한 그 소녀의 말은, 자기가 창녀로 오해를 받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목동을 찾아 나섰다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자기가 이처럼 창녀로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목동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도록 자기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목동에 대한 원망을 한꺼번에 표현한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