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사/종교 관련

히브리인 예수님과 바울”

지식창고지기 2011. 12. 25. 16:56

히브리인 예수님과 바울”
-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라!(I) -
김재진 (케리그마신학연구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I. 왜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설교자가 설교준비 하기 위하여 설교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 가장 거침돌이 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설교자의 예비지식이나,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 혹은 설교자의 성경해석 능력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2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뿐만 아니라, 신학자 그리고 일반평신도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오히려 독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전이해, 혹은 사유체계’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유체계’와 독자가 가지고 있는 ‘사유체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유체계는 ‘히브리-셈적’ 사유체계 혹은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전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 혹은 사고방식을 갖고 성경을 읽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유체계는 서로 아주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지중해 연안과 팔레스틴 및 고대 근동을 점령한 이후로는 유럽 문화사에 두 가지 사유체계가 혼합 내지는 종합 - 때로는 히브리-셈적 사유체계가 상당부분 그리스 사유체계와 융합 혹은 모형변형Paradigmawechsel 양식으로 -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많은 학자들은 ‘헬레니즘 기독교’(스토아 철학과 신新-플라톤주의, 그리고 Lxx(구약성경의 70인 번역본)의 출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 의한 성경의 최초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 혹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라고 특징지어 말한다. 예컨대 이러한 점을 불트만R. Bultmann은 ‘기독교의 헬라화’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교리사와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 그것이 어느 쪽이든 -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적 논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은 학자는 두 사유체계를 아주 잘 종합 또는 융합하여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의 신학을 기초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서로 그들 자신들의 일면적인 진리만 주장한 나머지, 그 중 어느 한파가 학문의 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예컨대 ‘안디옥’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켜 ‘인성’을 강조한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혼합시켰다. 그래서 초기 보편적 교회는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배척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기본요소만 진리로 수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기독교의 교리로 선포하였다.(451년 칼케톤 신조에서 예수는 참신 참인간vere deus, vere homo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과 문예부흥Renaissance을 통하여 그리스-인도 게르만적, 바꾸어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체계에 기초하여 발전된 중세 스콜라Scholar 철학적 신학에 반기를 든 히브리-셈족 사유체계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예컨대 미켈란제로의 동적動的 조각품은 조화된 고전적 그리스 조각품과 비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서로 비교되었다. 즉 미켈란제로(Michelangelo, 1475-1564)의 동적 조각품은 조화를 강조하는 그리스 고전적 조각품을 대신하게 되었고, 칼릴레오의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신하게 되었고, 루터의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누스(Thomas Aquinas, 1225 - 1274)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적 신학을 대신하게 되었다. 즉 루터의 사상과 종교성은 가톨릭교회의 시각적 관조적 경건성에 반하여, 다분히 동적이고 청각적이었다는 점에서 히브리-셈적 사유체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는 -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를 막론하고 - 대부분 어느 사상이 히브리-셈적이고, 어느 사상이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인지를 세심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문화 혹은 서양사상 -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 - 으로 교육받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의 교유한 ‘사유체계’를 - 대부분 도덕적 혹은 인과응보적因果應報적 사유체계를 - 가지고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 가능한 한 그리고 필수적으로 -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인물들의 - 예컨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 이르기 까지 - 사유체계에서 성경의 증언을 읽을 때, 성경의 증언하는 바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그리스적 사유체계와 히브리적 사유체계가 서로 종합 혹은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성경이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히브리적-셈적’ 전통의 사유체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저자들은 모두 히브리인이요,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모두 히브리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의 사유체계’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컨대, 예수님께서 어느 날 “한 서기관이 나아와 …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 8:19)라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예수의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1)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히브리적 사유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즉각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어떻게 장사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자연과학적, 더 자세히 말하면 생물학적 혹은 그리스-인도게르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죽은 자’란 ‘靈的으로 죽은 자’라고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사유체계는 그리스의 사유 체계처럼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 더 자세히 말하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죽음’은 곧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됨’을 뜻한다.(참조 시 88편) 다시 말하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에서 분리되면, 죽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유목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은 집단적 공동체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는 유목 공동체가 서로 단결하여 외부의 침입을 막아냈다.

따라서 ‘가족 혹은 씨족 혹은 유목민 공동체’에서 일탈하면,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가인Cain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는 징벌을 받았을 때,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라고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살해한 죄 때문에 사막으로 쫓겨났으며, 그래서 그는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었다. 이 사실은 광야 유목민의 ‘바슴’(표시)에서 식별되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은 무법자들이 표류하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하갈은 아브라함 가족 공동체에서 내어 쫓김을 당하여 광야에서 사지死地를 배회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창 21:14) 이러한 증언들을 고려해 볼 때, 히브리인의 사유체계에 의하면,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출회당하는 것’은 ‘죽음의 형장’으로 내어 쫓기는 것이다. 예컨대 아담Adam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네(= 아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아담의 죽음을 선포’하시면서, 그를 ‘에덴동산 공동체’에서 내어 쫒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Eden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 3:23)

그래서 예수님도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병행 15:32)는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천국잔치에 대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마 22;1-14)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성 밖으로 내어 쫓으라고 명하신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2-13) 이와 상응하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공동체 혹은 교회 공동체에서 떠나 있었던 이방 사람들을 ‘죽었던 자’로 표현한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상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의 사유체계로 기술된 구약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은 그 사유체계에 있어서 서로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이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 바울 모두가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히브리인의 사유체계’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히브리적 사유체계’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는가? 이점에 대하여 앞으로 연재될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라!”에서 하나, 하나 취급해 갈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 개괄적 특성을 이야기 하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I. 유목민 히브리인들의 동적-공간적 사유체계

우선 모든 사유체계가 그러하듯이, 히브리적 사유체계 역시 그들의 지역적 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히브리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의 사유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히브리인의 사유체계는 그들의 언어, 곧 ‘히브리어’ 때로는 ‘히브리어’와 동류인 ‘아람어’에 잘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한 민족, 혹은 한 종족, 한 인종의 특수성은 그 고유한 언어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히브리 민간 방언을 사용했다는 비르켈란트Harris Birkeland의 가설이 옳지 않다면, 그들은 히브리어와 동류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히브리인의 언어체계 위에서 그리스도교는 태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주후 70년 이후부터는 그 뿌리인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급격히 일탈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보다는 그리스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의 증언을 기초하고 있는 히브리적 사유체계는 본질상 전적으로 다른 헬라어라는 언어적 옷을 덧입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언어와 결부된 표상 및 사유방식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읽는 유럽인이라면, 누구든지 히브리 언어와 그 표현 방식이 아주 독특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점을 강조하였다. 독일의 헤르더Herder도 구약성경의 시문학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상응하게 현대 언어학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훔볼트W. Humboldt도 자신의 언어철학에서 ‘언어가 그 민족의 - 아주 원시적인 민족이라 할지라도 - 독특한 사유체계를 표현해 준다고 강조한다. 그는 히브리 語根들이 3字 어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히브리어의 특성으로 볼뿐만 아니라, 사유의 더 높은 발전을 위해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히브리적 그리스도교 유형과 그리스적 그리스도교의 유형의 차이점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명한 사람은 스웨덴의 신학자 니그렌Nygren이다. 그에 의하면, 성경-히브리적 사랑의 개념인 ‘아가페Agape’는 그리스-헬라적 플라톤의 사랑 개념 ‘에로스Eros’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즉 ‘아가페’는 신神으로부터 와서 인간에게 밀어닥치는 자유롭고 대가없는 사랑인 반면에, 에로스Eros는 인간에게서 유래하여 신神을 향해 추구하는 사랑이다. 비록 니그렌의 이러한 구별에 대하여 오르딩Hans Ording, 크리스챤 바우어F. Chr. Baur 등의 반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그렌의 해석에 일리一理가 있는 것은, 그가 히브리적 사유체계 혹은 히브리적 사유체계에 기초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강조하는 ‘사랑’의 종교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사유체계에서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철저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헬라적 신 개념은 철저히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비-인격적’이다. 히브리인의 사유체계가 ‘인격적’이기 때문에 구약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사상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이다. 이점을 우리는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시내산 계약문서, 곧 ‘십계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심지어 인간과 자연(물질)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이점에 대하여 앞으로 계속해서 보다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예컨대 십계명의 다음과 같은 규정들은 철저히 인격적이다: “너(= 이스라엘 백성)는 나(=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3-6)

히브리적 사유체계와 그리스-헬라적 사유체계의 차이점은, 전자가 ‘공간적’이라면, 후자는 ‘시간적’이다. 그러나 반대로 폰돕슈츠Dobschütz는 “그리스인들의 사유는 공간적이고, 히브리인들의 사유는 시간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시간에 대한 사유에 있어서 히브리적인 사유체계와 그리스-헬라적 사유체계가 같이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점을 명백히 밝히려고 오스카 쿨만O. Cullmann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대가인 유대인 캇시러Ernst Cassirer는 “모든 언어에 있어서 공간적 사유와 공간적 표현들이 원래적이며, 공간에서 시간으로 전이轉移되었다고 생각했다.” 보만Thorlief Boman에 의하면, 박식하고 심오한 언어논리학자 우어반W. M. Urban 역시 이점을 승인하였다. 반면에, 그라슬러Graßler에 의하면, “시간은 하나의 띠Band와 같이, 또는 사건들로 채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형용의 모순contadictio in adjecto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히브리적 사유체계가 ‘공간적’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이 ‘죄의 결과인 죽음’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 이해한 것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히브리인의 사유체계가 ‘공간적’이라는 것에 상응하게, 그들은 그리스-헬라인들의 ‘정적 사유’에 비하여 ‘동적 사유’를 선호한다. 그래서 보만은 “누구든지 이스라엘적 사유를 성격 지으려고 하면, 우선 그것이 동적動的: dynamisch, 힘찬, 정열적인, 그리고 때로는 거의 폭발적인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상반되는 것은 그리스적 사유의 정적靜的: statisch, 평온한, 중용적, 조화적인 것이다” ‘동적인 것’이 생명력, 활동성, 주체적이라면, ‘정적인 것’은 석화石化된 것, 생명력이 없는 것, 비-활동적인 것, 그리고 객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정지는 곧 부동이고, 불변’이다.

히브리인들의 동적 사유는 특히 히브리어의 동사動詞들에서 명백히 나타나는데, 히브리 동사들의 기본 의미는 언제나 ‘움직임’ 혹은 ‘작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동사가 ‘앉아 있다’ 또는 ‘누워 있다’와 같은 정지 상태를 표현해야 할 때도, 그것은 움직임도 표시할 수 있는 동사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히브리적 사유는 ‘통합적’, 혹은 ‘복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앉아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앉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히브리적 사유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통합적’이다. 즉 하나의 단어가 - 우리들의 사유 방식에 의하면 - 두 가지 서로 상이한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어에서 ‘können’의 동사가 ‘할 수 있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 할 수도 있다’ 혹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일례는 ‘동작’과 ‘서 있음’이 - 우리가 생각하듯이 서로 대립이 아니라 - 서로 유사類似하여 그것들이 합하여 일체一體를 이룰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하여진 것’과 그 말의 내용 사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예컨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말은 확고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모든 말은, 그 말을 발설한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말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모든 말의 내용은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주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 말의 내용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不動하는 것’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며’, 움직이는 것과 그 어떤 것이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빈말’이란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작만이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정적으로 표현된 서술이라도 그것은 정지에로 넘어간 동작을 의미한다. 예컨대 ‘앉아 있다’는 표현은 ‘계속해서 않는 행위를 한다’거나, ‘앉는 행위로 넘어간 동작’을 의미한다.

누가 자식이 떡을 달라 하면

1.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동적이고 공간적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역사 속에 서 히브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지하였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편 84년 2절에서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라고 토로한다. 이렇듯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의식이 마음 깊이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할 때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대제사장도,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예수님을 심문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항상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분’으로 인지하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유대인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개정)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하나님을 의미하는가? 즉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시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인의 신앙의식 속에는, ‘하나님은 현존해 계시는 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고난 속에서 부르짖을 때,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으로든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신적 존재를 의심하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말씀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활동)으로 입증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의 최초의 신앙고백인 신명기 26장 5-9절에서, - 앞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7-9)라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롤리H.H.Rowly는 다음과 같이 구약의 하나님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구약의 사상은 하나님 안에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체험의 하나님이시지, 사유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톤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히브리인의 신앙’이 히브리인 인지구조, 곧 신앙의 특성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시인은,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 개정)고 생각한다고 증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자는 악인이고, 어리석은 자이고, 마음이 부패한 자이다.(참조. 시 53:1; 45:14) 그래서 밀톤은 “하나님께서 심판과 구원을 통해 오늘도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신다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가? 그것은 ‘창조활동’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성경의 맨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2.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현대 종교사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靈)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성경의 창조기사를 메소포타미아의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기록된 ‘창조설화’와 비교하여 우주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에누마 엘리쉬’에 나타난 ‘우주개벽설’에 의하면, 원초적인 커다란 궁창에 있는 혼돈의 여신 ‘티아맛(Tiamat)’과 그녀의 남편 강물의 신(神), ‘압수Apsu’는 안면과 정적의 고요를 방해하는 여러 신들(혹은 그들의 ‘자녀’로 해석되기도 함)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을 알아 챈 신(神), ‘이아Ea’는 주문을 외위 ‘티아맛’의 남편 ‘압수’를 잠들게 한 후, 그를 죽여 버린다. 그러나 ‘티아맛’은 새 남편 ‘킹구Kingu’를 얻어 ‘이아’에 대항한다. 그러자 ‘이아’의 아들 ‘마르둑Marduk’이 신들의 회에서 차기(次期) 왕이 되리라는 보장을 받고, 구름수레와 번개 알, 활, 그리고 마술 망방이 등을 가지고 나아가 ‘티아맛’과 대결하여 그녀를 살해한다.: “그 때 마르둑은 화살을 쏘았고, 그것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 마르둑은 티아맛을 꼼짝 못하게 한 후 그녀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커다란 시체를 두 동강이 내어 하늘을 가리는 천정(하늘의 궁창)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로는 땅 밑의 물(궁창)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아래 궁창(물)위에 땅이 놓이게 된다. 그 후 ‘마르둑’은 ‘티아맛’의 새 남편 ‘킹구’를 붙잡아 살해한 후, 그의 피를 진흙과 섞어서 ‘인간’을 만든다: “나는 피를 한 덩어리로 뭉쳐 뼈가 되게 하겠다. 나는 사나운 놈을 만들어,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겠다. 정말 사나운 사람을 창조 하겠다 … ” 그리고 ‘창조된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을 섬기게 한다.

이상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바벨론 창조설화’와 성경의 ‘창조기사’와의 유사점을 찾으려고 종교사학파의 여러 신학자들이 시도하였다. 그들은 ‘바벨론 창조설화’와 ‘성경의 창조기사’에서 ‘물의 혼돈’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들은 ‘물의 혼돈’을 바벨론 창조설화에서는 ‘티아맛Tiamat’으로 표현되었고, 히브리 창조기사에서는 ‘테홈Tehom’이라고 표현되었다고 이해한다. 특히 ‘테홈’이 정관사 없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인격화된 단어’라고 그들은 이해한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현대 종교사학자들의 몇몇 신학자들은 성경의 창조기사, 곧 히브리인들의 창조기사가 바벨론 ‘에누마 엘리쉬’ 창조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에무나 엘리쉬’는 바빌론이나 수메르 우주개벽설이 아니라, 오히려 어지럽게 얽혀 있는 여러 전승의 혼합에 불과하다고 람베르트W.G.Lambert는 주장한다. 그리고 바벨론 창조설화는 여러 남신과 여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론적 사고에 기초한 신들의 전투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사학자들의 연구는 단지 ‘어휘’의 유사성에서 내용의 유사성을 찾으려는 아주 단순한 연구에 따른 결과에 불과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이 창조기사를 기록한 근본 동기는, ‘바벨론 창조설화’를 기초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창조기사를 기술하려고 하였던 것이 결코 아니다. 히브리인들이 ‘창조기사’를 기술하게 된 근본 동기는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구약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창조사건은 야웨가 정한 역사상의 첫 번째 사건이여,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구원사건과 직결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히브리 족속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면, “스스로 계신 하나님”(출 3:14)으로는 계시하였지만, 그 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행하신 어떠한 분인지는 자세히 계시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창조기사’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물리적 창조 과정을 기술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신앙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왜 그분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구원신앙의 기원Ursprung’을 증언하려 하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존재론적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관계는 구원의 전제라고 히브리인들은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의 기도를 올릴 때,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9-10)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구원자 하나님과 기도자의 관계는 육신의 부모와 자식관계보다도 더 긴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육신의 생명의 근원인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차원에 있는 축복의 방편이다.(출 20:12; 신 5:16; 마 15:4; 19:19; 막 7:10; 10:19; 눅 18:20) 특히 에베소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여기서 ‘첫 계명’이란, 가장 우선되는 계명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둘이 있을 수 없듯이, 히브리인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의 신앙전승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신 6:4)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주(= 여호와 הוהי)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다.”(시 86:10)라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식이었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셨으며, 그 한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성경의 창조기사가 증언하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우리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다’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 사도 바울도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을 동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세주(= 메시아)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神)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5-6)

그러므로 구원자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으로 동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포로기에 형성된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 45:18, 표준 새번역)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예언의 연장선상에서 증언된 것이다. 따라서 이 증언(사 45:18)을 논리적으로 연관시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 44:8)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 45:18, 표준 새번역)

그러나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따라서 결론적 이사야 선지자는 ‘한 분 하나님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구원주’이시지만, 우리들에게는 항상 ‘숨어계신 분Deus absconditus’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자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그의 ‘창조능력’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히브리 족속의 구원역사의 첫 번째 장인 창세기 12장 바로 앞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 모든 인류의 ‘원역사Urgeschichte’로 - 성경의 맨 앞에 배치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11장 3절에서 ‘창조’는 물리학적으로 증명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믿어야 할 과제임을 증언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3.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물의 생명을 창조, 보전, 통치하신다.

창조기사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우선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살아 갈 수 있는 생태학적 생명여건을 조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첫 번째 생명여건은 ‘빛’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 1:3-4) 그런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빛이 있는 낮’만 있어서도 안 된다. 생명의 휴식을 위한 ‘일하지 않는 휴식의 밤’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을 나누셔서 낮과 밤’으로 만드신 것이다. ‘낮’은 생명(生命)의 생육(生育)을 위한 것이고, ‘밤’은 생명의 휴식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낮’과 ‘밤’은 생명체를 위한 가장 우선적인 생태학적 생명여건이다. 그래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이 세상을 비추는 빛’(요 12:46; 1:4)으로 증언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세상이 빛을 잃게 되는 날, 그 날은 모든 생명체에게 종말이 오는 날이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생명체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도 인류 역사의 마지막 종말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이 세력들은 흔들릴 것”(막 13:24-25)이라고 증언하신 것이다. 태양이 “빛”을 잃어서 온 세상이 어두워지면, 지상의 온도가 떨어져서 모든 생명은 죽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밤’이 없어서 항상 ‘빛’만 비취이면, 이 지구는 너무 뜨거워 모든 생명은 따 죽는다. 그러므로 ‘빛과 어두움’은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첫 번째 생명여건이다.

그런데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언은 고대 근동의 ‘밀의종교’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빛을 창조하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히브리 족속이 출애굽한 이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경험한 것에서 고백되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1-22) 이러한 ‘빛’으로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경험에 기초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증언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고 증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할 때는, 그 구원자가 바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승화되어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의 창조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여건’인 ‘빛과 어두움’의 창조로 시작된 것이다.(다음호, 생명체의 두 번째 ‘생명의 여건’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