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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기도의 사람, 야베스

지식창고지기 2011. 12. 26. 04:43

존귀한 기도의 사람, 야베스


<들어가면서>

야베스를 생각하면 언뜻 떠오른 사람이 있다. 송명희 시인!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원래 모태 신앙이었으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7살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을 만났다. 그후부터 약 4년간 하루에 5시간씩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성경을 무려 삼십여번이나 통독했다. 그러던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감의 시를 쏟아냈다. 온 몸을 비틀면서 손과 발로 써내려 간 시들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썼던 시집으로 한국 기독교 최우수 도서상(85)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저서 스물네권, 찬양 작사 백여곡, 그리고 각종 집회 1천5백여회, 각종 집필 등의 활동을 그침없이 해왔다. 현재는 무리한 사역으로 인하여 목디스크 등으로 투병 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가 끼친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녀는 육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실로 그녀는 야베스와 같은 영성의 사람이다.

야베스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의 약전은 역대기의 족보에서 다른 사람보다 몇 줄 더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야베스는 약 3천년 동안 가리워진 인물이었다. 간혹, 단 네마디로 기록된 그의 기도에서 영적 교훈을 얻은 것을 제외하면 거의 무명 인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부르스 윌킬슨이 「야베스의 기도」를 출판하면서 야베스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출판 7개월만에 백만권이 판매되는 신기록을 남겼다. 한국에서도 2년만에 167쇄나 찍힐 정도였다.

야베스의 기도가 시중에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마치 무슨 보화나 찾아낸 것처럼 반가워했다. 영적 침체에 빠진 그리스도인에게 활력을 불러 일으켜 주는 듯했다. 기도 응답과 축복을 사모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복을 구하는 야베스의 기도를 당신의 삶을 수놓는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되게하라. 그러기 위해 다음 한 달 동안 다음에 주어진 계획들을 동요하지 말고 따라가라.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당신의 삶 속에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들을 보게 되고 ---, 매일 아침 야베스의 기도를 하고 ---, 다음 한달 동안 이 책을 일주일에 한 번씩 다시 읽으라” (pp.135-136).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기도든지 하나님은 응답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로 복을 구하며, 응답을 갈망하고 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로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즐기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해서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복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 동안 부르스 윌킨슨의 기도관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소리들이 있었다. 윌킨슨이 제시한 기도관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기도 만능주의 사상은 때때로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나사로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가난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가서야 풍성한 영광을 맛보았다.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한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고난 가운데 살았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서야 영광을 맛보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도는 내 생각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서점에 가면 기도에 관한 인본주의와 기복적인 면을 여과없이 제안한 책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먼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기도에 관한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것이 주님의 기도관이다. 곧 하나님의 왕권 앞에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기도의 최우선 과제이다. 기도는 자기의 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일이다. 통곡과 눈물로 부르짖은 주님처럼(히5:7) 자기를 부인하는 처절한 싸움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주님께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다. 주님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 욕심을 이루는 수단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한다. 자기 야망을 성취하는 도구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에서는 그런 입장을 견지하면서 기도로 만사 형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도는 물질을 얻는 방편이 아니라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는 입문서이다. 성공을 이루는 마술사가 아니라 영혼을 다듬어 주는 훈련소이다. 영혼의 식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이다. 하늘의 안식을 맛보게 해주는 마음의 식당이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심령의 공장이다. 고난을 감당케 해 주는 탁월한 능력이다. 시련을 물리치는 권능이다. 기도 앞에 불가능이 없다. 문제 해결의 키가 되기도 한다. 기적을 이루는 열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자기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응답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렇게 볼 때 윌킨슨의 기도관에서 비평의 요소들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를 부각시켜 준 그의 공헌을 귀하게 평가하고 싶다. 그의 저서를 통해서 도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야베스의 기도」를 읽은 독자들이 기도로 통해서 존귀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기대해 본다. 우리 시대의 야베스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과 함께 본서에서는 야베스의 기도 뒤에 감추어진 영성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신앙 생활에서 기도가 나무라면 영성은 숲과 같다. 영적 생활의 그림은 총괄적이어야 한다. 숲속의 나무만 그려서는 완성된 그림이 될 수 없다. 나무와 숲의 조화를 잘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야베스는 짧지만 힘있는 기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윌킨슨을 비롯해서 이미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높이 평가해 주었지만 그의 영성은 아직 조명되지 않았다. 이미 평가된 탁월한 기도의 바탕 위에 영성을 첨가한다면 더 아름다운 영적 그림이 되지 않겠는가. 은쟁반의 금사과처럼!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베스의 기도로 응답을 구해 왔다. 기도는 영성의 출발선이다. 기도는 영성의 뼈대요, 기초석이다. 따라서 「야베스의 기도」를 접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을 위한 워밍업을 마친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야베스의 영성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때이다. 영적 능력을 발휘할 단계이다. 기독교는 내가 원하는대로 응답받고 그치는 종교가 아니다. 자리에 앉아서 복을 구하기만 하는 식은 여호와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생명의 종교이다. 영성이란 그런 능력을 의미한다

제1강 나도 야베스

성경 어느 곳에도 야베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본문에서 몇 줄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의 번역이나 문맥, 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 등에 의존하여 해석하는 수 밖에 없다. 일차적으로 야베스란 이름이 주는 의미와 그 이름을 지은 배경을 통해서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야베스란 히브리어로 ‘고통’이라는 말과 같다. 그 어미가 지은 야베스란 이름은 아들을 낳을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지은 듯하다. 아니면 야베스가 장차 받을 고통을 예견하면서 어미가 지은 이름인 듯하다. 저자가 소개해 준 야베스에 대한 정보가 이를 입증해 준다.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고난을 위해 태어난 인생

그러면 야베스의 어미는 왜 태어난 아들에 대해서 고통이란 의미의 이름을 붙였을까? 구약 문화의 정황으로 볼 때 첫 번째 가능성은 서자를 생각할 수 있다. 어미의 입장에서 서자로 태어난 아들의 고통을 예견하면서 지은 이름이 야베스였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하갈의 잉태 소식을 듣고 사라로부터 박은 학대가 얼마나 컸던가! 그렇게 출산한 이스마엘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뜻이었다(창16:6-11). 하갈은 이스마엘을 보면서 평생 동안 고통의 눈물을 흘렀는지 모른다. 이스마엘이란 이름에는 종의 설움, 천한 자의 아픔이 담겨있다. 야베스의 어미 역시 서자로 태어나 장차 받을 설움을 생각하면서 야베스라는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많다.

두 번째 가능성은 유복자이다. “그 어미가 이름하여”라는 문구는 야베스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 주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했던 이스라엘의 문화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에다 족보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아니한 채 야베스가 곧바로 등장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증거로 야베스가 유복자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서 수고로이 낳은 아들이라 하여 그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이 야베스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비없는 아들에게 임할 고통을 예견한 것은 어미의 본능이 아니겠는가?

비슷한 경우가 사무엘 시대 때에 있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블레셋 전투에서 사망했다. 당시 비느하스의 아내는 잉태 중이었다. 남편이 죽은 소문을 들은 후 그 어미는 아들을 낳아 이가봇이라 하였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이다(삼상4:19-22). 어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아들을 볼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전쟁 문화가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야베스의 어미 역시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면 장차 아들에게 임할 고통을 생각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 번째 가능성은 장애자이다. 야베스를 낳을 때 그 어미의 수고는 평생 기억될 정도로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야베스의 생애 가운데서 빼어놓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출산시 사고로 인하여 어떤 결함을 가졌거나, 아니면 난산 끝에 목숨을 겨우 건졌던 것 같다. 그렇게해서 태어난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이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의미의 야베스이다. 구약의 ‘베노니’는 야베스처럼 출산의 어려운 상황이 이름에 암시되어 있다. 그 어미 라헬은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 이름을 ‘내 고통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베노니’라고 지었다(창35:16-20). 어미가 핏덩이를 두고 죽어가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이름 지었을까?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름은 아무렇게나 짓는 법이 없다. 그 이름에는 반드시 어떤 사연이나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야베스는 김고통, 송아픔 등이었다.

종종 교인들이 목사에게 자녀들의 이름을 부탁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가정의 형편과 영적인 측면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름을 지은 경험이 있다. 난산 중에 특별한 은혜로 낳은 아들에게는 은혜로 낳았으니 주님께 드리라는 의미의 ‘은헌’이라고 지은 적이 있다.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라는 의미의 ‘도언’이라고 짓기도 했다. 은혜와 영광이 가득한 딸이 되라는 소원으로 ‘은영’ 등의 이름을 지은 적도 있다. 우리 아이 역시 가정 예배 시 가장 많이 불렀던 “빛나고 높은 보좌와”(27장)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빛내는 아들이 되라고 빛날 ‘율’로 지었다.

그렇게 보면 야베스의 어미가 출산의 정황을 고려해서 아들에게 고통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를 생각한다해도 야베스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베스에게는 출생 때부터 불안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들의 장래는 불안이요, 고통 뿐이었다. 아들로 인하여 어미의 한숨이 시작되었다. 고통 중에 태어난 아들 때문에 어미의 근심이 시작되었다. 어미에게 야베스는 눈물의 씨앗이었다. 설움의 신호탄이었다. 인생이 그렇다! 고통스러운 인생이 어찌 야베스 뿐이랴. 모든 사람이 일생동안 고통의 짐을 지고 간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번연이 꿈속에서 한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책 한권을 읽다말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고 울부짖었다. 그 남자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무언가의 근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 놓았다. “지금 나는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으로 몹시 고통스럽다! 내가 듣기에,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하늘의 불이 쏟아져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구나. 내가 어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인생이 헛되고 헛되구나! 모든 것이 헛되!"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은 무척 놀랐다. 그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가 정신이 어떻게 된게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내내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아, 나의 인생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누구나 그런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그치지 않는 근심이있다. 정신적인 안정을 누려도 시련의 터널이 있다. 눈물의 강도 건너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시90:10)이다! 솔로몬 역시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2:22-23). 아무리 지혜가 번득여도 번뇌가 많고, 지식이 더해도 근심을 뿐이다(잠1:18).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야베스의 어미가 아들을 낳고 그런 고통을 예견했을까?

요즈음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그냥두면 어떻게 될까 싶어 손에서 놓지 못한다. 자녀에 대한 생각이 보통을 넘어선 상황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학원 스케줄이 온종일 잡혀 있다. 유치원, 피아노, 영재학습, 영어 학습지, 태권도 등 조금도 여유가 없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한다는 논리이다. 이제는 과외도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중 삼중의 과외 시대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좋은 사설 학원에 보내려고 특별 과외를 시킬 정도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근심이 그렇다! 행여 뒤질새라 전쟁을 불사한다. 그런 식의 경쟁이 자녀들에게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자녀들에 대한 염려가 그치지 않는 부모들에게도 실상은 고통이다. 그런 근심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행여 손가락이 여섯 개나 되지 않을까, 귀는 정상으로 붙어있을까, 아들 딸이 문제가 아니라 정상으로만 태어나기를 가슴 조이며 기도하던 기억들 말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심정이 그렇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가슴 조이며 출산을 기다리는 것이 어미의 마음이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출산 이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교육 전도사의 사례비로 아이를 키우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아내는 임신 중 영양 관리가 잘 못되었던지 2.8킬로의 허약한 딸을 낳았다. 그 시절 유우 한모금 마실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거기에다 한 식구가 늘어나면서 가정 경제는 더욱 말이 아니었다. 신학 대학원 시절 단돈 3백원의 차비 때문에 스쿨 버스를 타지 못한 때도 있었다. 돈이 될만한 물건은 모두 전당포행이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처절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고통에 고통이 거듭되었다.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서 7번을 이사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고통과 근심의 연속이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야베스에게 붙여진 ‘고통’라는 말이 실감난다. 거기에다 딸의 미래를 위해 눈물로 간구하던 고통스런 순간들을 생각하면 실로 나도 야베스였다.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도 야베스란 이름이 적합했을 법하다.

고통에서 존귀함으로

야베스의 상황을 추정해 보면 극히 불행한 환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불행한 처지에서 시작된 야베스의 인생이 존귀하게 되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야베스의 조상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역대상 4장의 족보 가운데 나오는 44명의 이름들이 모두 그렇다. 어느 누구도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야베스를 집중해서 조명한다. 그의 생애는 고통으로 시작하여 존귀함으로 마친다. 슬픔으로 출발한 생애가 영광으로 가득하다. 눈물로 가득한 시절이 웃음의 꽃으로 만발하게 되었다. 일생동안 가슴에 맺혔던 어미의 근심이 찬송으로 변했다. 절망이 환희로 바뀌었다. 한숨이 기쁨의 노래가 되었다.

야베스의 삶은 불행으로 시작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여건이 열악했다.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삶이 모든 그 형제들(brothers)보다 존귀했다. 비천하게 태어난 그가 존귀한 자로 평가받았다.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었다. 누구도 괄세하지 못했다. 그 삶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했다.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모든 약점이 강점으로 변했다. 당당하게 인생의 역전승을 거두었다. 무엇이 야베스의 삶을 그처럼 바꾸어 놓았을까?

야베스의 삶을 변화시켜준 원동력은 하나님과의 교제였다. 하나님과 교제를 그치지 않았던 깊은 영성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부르짖어 가로되”(Jabez cried out to the God of Israel, NIV).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구했다.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눈물 뿌리며 주님께 나아갔다. 소리높여 여호와를 불렀다. 고통 가운데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절망적인 순간에 여호와의 도움을 구했다. 힘들 때마다 주님께 부르짖었다. 낙심될 때 주를 향하여 손을 들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의 통로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방편이다. 기도가 없이는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다.

영적 교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하나님과 갖는 은밀한 대화이다.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그분의 인격 안에 거할 수 있다. 그분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교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날 수도 없다. 따라서 교제는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있다. 믿음의 반석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경의 저자들은 쉬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라고 거듭 권면한다. 쉬지말고 기도하라(사전5:17).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12:12).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4: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주님께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18:1).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22:46).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 주님은 그렇게 교훈하신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과 교제의 모범을 친히 보여 주셨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는 첫순간부터 시작하여 매 순간마다 교제를 그치치 않으셨다. 예를 들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 나아갔다(눅3:21-22).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기가 절정에 오를 때에도 교제를 통해서 유혹을 피하셨다(눅5:16).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뽑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밤이 맟도록 하나님과 교제하셨다(눅6:12).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 주실 때도 먼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셨다(눅9:28).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도 먼저 하나님과 교제를 잊지 않았다(눅11:1). 십자가의 사건을 앞두고는 피를 토하듯한 간절한 기도로 교제하셨다(눅22:44).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앞서 간 경건한 성도들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충만한 삶은 없다(로렌스 형제). 하나님과 교제는 영혼을 그분과 결합시켜 준다(노르위치의 줄이애나). 쉬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쉬지 않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원하는 것이다(칼리스토스). 오 이렇게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 하나님을 내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대화의 상대로 삼는 것이야말로 내가 일찍이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프랑크 라우바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첫 번째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다(엔드류 머레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내 주는 촉진제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다. 야베스는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존귀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존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야베스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고통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모든 어려움을 주님과 의논했다. 순간마다 주님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 나갔다. 고통 중에서도 주님을 의지했다.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상의했다. 고통이라 이름하였지만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다. 주님께 나아가면 갈수록 교제가 깊어졌다. 만나면 만날수록 더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다. 하나님과 가졌던 교제가 야베스의 삶을 변화시켰다.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신령한 양식을 공급해 주는 통로이다.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샘터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야베스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위기를 극복한 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있었던 이야기이다. 워싱턴 장군은 필라델피아의 밸리 포지라는 마을에서 최악의 전투 상황을 맞이했다. 군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변의 상황을 볼 때 도무지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워싱턴이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워싱턴의 비서인 루이스는 '필승'을 확신했다. 루이스는 이렇게 증언했다. “장군은 하루에 네 번씩 성경을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전투는 끝까지 침착성을 유지하는 쪽이 승리하는 법입니다.” 워싱턴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근심 중에서도 성경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했다. 하나님과 교제는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다. 마음의 평안을 공급해 주는 생명선이다

무디는 설교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만큼 기도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눅11:1).

기도는 배워야 한다!

성숙한 기도를 위해서 기도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깊은 기도를 위해서 기도의 세계를 체험해야 한다.

많은 응답을 위해서 기도의 신비를 맛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기도는 배우는 것으로만 그치면 무용지물이다.

그것은 마치 수영을 이론으로만 배우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무릎을 꿇는 일이다.

기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이다.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전이다.

기도를 배우는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영성이 무엇인가?

그런데 기도에 많은 도전을 받고도 여전히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 드물다.

무릎을 꿇고 기도에 전력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지 않다.

야베스의 기도로 열풍이 불어 닥쳤지만 기도의 열기는 여전히 냉냉한 느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얻고 그치는 듯하다. 제자들 역시 기도를 배웠지만 여전히 기도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주님은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면서 기도할 때에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기도를 배워도 실제로 기도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기도의 교리에 능해도 무릎에 약하면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없다.

탁월한 신학으로 무장해도 기도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곧 무너진다.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웠으니 신학에 철저했을 법하다.

교리에 능통했을 터이다.

하지만 제자들 중 한사람도 예외 됨이 없이 주님을 떠나고 말았다.

제자들의 실패는 무릎의 실패였다.

기도가 없는 곳에 승리도 없다.

기도가 없으면 세상을 이길 능력도 없다.

마귀의 공격을 이겨내지도 못한다.

죄를 피할 수도 없다.

기도가 없는 삶은 무기력함 뿐이다.

기도가 빠진 신앙은 늘 공허하다.

실패의 연속이다.

영적 능력도 없다.

제자들은 기도를 배웠지만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너무나 바쁜 일정 때문에 조용히 하나님과 만날 틈을 내지 못했다.

거기에다 기도가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도 못했다.

십자가의 두려움 앞에 모두 무너졌다.

죽음의 위협 앞에 도망쳐 버렸다.

모두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몰래 바라보던 베드로!

그 마음이 어땠을까?

기도가 없으면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선생을 배반하고 도망하던 제자들처럼 판단력이 흐려진다.

분별력도 잃어버린다.

상식의 옷조차도 내던지고 만다.

기도는 영성의 첫단계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영성의 출발선이다.

영적 능력을 공급받는 영혼의 샘터가 영성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기도 하다.

결국 제자들이 실패 요인은 영성의 부재 때문이었다.

현대 크리스챤들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한 요인도 마찬가지이다.

물질 앞에 무능력하게 무너져버린 이유가 빈약한 영성 때문이다.

영성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죄악을 이겨내지 못한다.

세상의 유혹을 피할 수도 없다.

세상에서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영성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미한 영성으로 실패했던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그렇게 초라한 모습에서 담대한 사도들이 되었다.

비겁한 졸장부들이 복음의 대장부가 되었다.

순식간에 세상을 변화시켰다.

사람들의 칭송을 얻었다.

세상의 빛이 되었다.

십자가 앞에서 벌벌 떨던 그들에게 두려움이 사라졌다.

거룩의 옷을 입고 자기가 처한 곳에서 영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놀라운 권위로 무장하여 세상으로 파고 들어갔다.

제자들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은 영성이었다.

불꽃같은 영성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제자들의 삶은 곧 영성의 삶이었다.

일반적으로 영성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교회에 다닌 사람을 영성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원에 자주 다니는 사람을 영성있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찬양을 잘하는 사람,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영성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성이란 그 정도를 훨씬 초월한 것이다.

일시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정도를 초월한다.

성경을 남다르게 읽은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남달리 열심을 갖는 것 이상이다.

어떤 은사를 발휘하는 정도를 초월하는 것이다.

영성은 단순한 종교적인 삶이 아니다.

영성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사는 것이다.

거기에는 생명이 있다. 놀라운 능력도 있다.

은혜가 넘친다. 감격이 그치지 않는다.

넘치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과 교제가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래더의 성 요한의 말대로 숨쉴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영성이다.

분마다 초마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늘 자기를 죽이며 사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는 길이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다.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이 생활의 원칙이 되는 삶이다. 범사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살면서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능력이 영성이다.

원래 영성이란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캐톨릭의 용어라 해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용어로 감춰져 있었다.

일부에서 영성이란 용어를 사용해 왔지만 편견과 오해가 그치지 않았다.

은사 위주의 영성을 강조한 사람이 있었다.

금욕주의적 영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영성을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신비적인 측면을 내세우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에 영성이라는 용어가 없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무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 칼빈주의 학자는 영성이란 말은 칼빈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등장한 용어가 바로 영성이다.

영성이란 말은 기독교인의 신앙 양태를 가르키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신앙과 신학의 특성을 표현해 주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런 특성을 지닌 영성이란 용어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르게 정의한다.



예를 들면, 각 학자들은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느낌과 그 임재의 빛 속에서 사는 것이다(스티븐 바톤).

영성 생활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안에 생명력이 충만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메조리 톰슨).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 가운데서 경험하는 삶의 변화며,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노만 샤우척).

기독교 영성은 인간이 자기 초월의 영과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성령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존 매쿼리).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 깊이 있는 관계이다(아이리스 컬리).

이런 정의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관계 회복을 강조한다.

거기에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에 영성의 출발점을 두고 있다.

영성의 출발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나 변화된 삶도 그분과의 교제가 첫 출발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그 분과의 관계를 보다 생명력있게 하여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성의 핵심이다.

이런 전제들을 염두해 두고 필자는 기독교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교통을 통해 공동체 내에서 실현하는 영적인 삶의 속성.

이 정의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과 교제,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력, 그리고 영적인 능력.



왜 야베스의 영성인가?

그렇다면 기독교계에서 영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현실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찾기 위함이다.

원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기가 공급되었다.

영적인 능력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단절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명력을 상실하게 했다.

인간의 영혼 속에 부여된 하나님의 생명을 되찾는 것이 바로 영성의 과제이다.

그래서 영성은 곧 하나님의 생명을 지향한다.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인격에 이르는 것이 그 목표이다.

영성의 방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능력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영성에 대한 관심이다.

교회에 생명력을 공급하자는 몸부림이 바로 영성에 대한 관심이다.

영성은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잃어버린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 주관심사이다.

더욱이 야베스의 영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역대상 1장에서 9장까지는 족보 이야기이다.

성경에서 족보 이야기처럼 재미없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큰 마음먹고 성경을 읽으려고 큰 결심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를 낳고, 낳고” 하는 말 때문에 신약의 첫 장을 넘기지 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마 독자들도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족보 이야기는 별로 매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족보 이야기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있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등장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놀라운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유대의 문화적 관습에 의하면 여성이나 아이들은 계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들의 명단(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이 기록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거기에다 족보에 기록된 네명은 모두 이상한 이력을 지닌 여인들이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았다.

라합은 기생이었다. 룻은 좀 나은 편이지만, 이방 여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한 이방인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한 것은 믿기지 않는다.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부정한 관계를 맺은 밧세바를 말한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이들 네명은 모두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될 수 없는 여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족보에서 일상의 삶을 숨김없이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전해 주려는 의도였음에 틀림없다.

곧, 죄와 허물이 가득한 인간 세계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도 무너졌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성경 저자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할 딱딱한 족보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싶어한 것이다.

족보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 속에 놀라운 은혜가 가득하다.

실로 그것들은 은혜의 보고(寶庫)들이다.

역대기에도 사람들의 명단만 기록하지 않는다.

간혹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넘어간다.

역대상2:32-36을 보자. 삼매의 아우 야다의 아들은 예델과 요나단이라.

예델은 아들이 없이 죽었고, 요나단의 아들은 벨렛과 사사라 여라므엘의 자손은 이러하며, 세산은 아들이 없고 딸 뿐이라.

그에게 야르하라 하는 애굽 종이 있는 고로 딸을 그 종 야르하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였더니 저가 그로 말미암아 앗대를 낳았고, 앗대는 나단을 낳았고 나단은 사밧을 낳았고. 이런 족보 이야기 속에도 분명 놀라운 은혜가 담겨 있다.

아들이 없이 죽은 예델, 두 아들을 두고 죽은 요나단, 딸만 가졌던 세산, 그리고 그 딸을 위하여 애굽의 종을 사위로 삼아 손자를 보았던 세산의 이야기들 중에서 인간사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아들이 없어 평생 외롭게 보내다 열조의 품에 안긴 인생의 교훈이 담겨 있다.

두 아들을 두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간 삶의 교훈도 본다.

딸만 낳아 종에게 맡겨 손자를 본 세상 이야기에도 넘치는 은혜가 풍긴다.

하물며 두절로 소개된 야베스의 삶이야 말로 획기적인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저자가 야베스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이력을 기록했을 법하다.

얼마 전에 부친상을 당했다.

부친의 묘비에 글을 몇마디 새겨 넣기 위해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부친의 생애를 대변할만한 몇마디의 글귀를 어떻게 써넣을까?

그 일을 계기로 장차 나의 묘비에는 어떤 글귀를 써넣을 것인지 생각해 봤다.

앞으로 두고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로 남겨 놓았지만 족보나 묘비에 기록될 말은 삶 전체를 대변할 만한 말이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베스를 소개해 놓은 두 구절은 그 삶 전체를 농축해 놓은 말임에 틀림없다.

어느모로 봐도 두 구절은 야베스의 기도와 신앙이 크게 부각된다.

저자는 야베스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당대와 후대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영향을 끼친 존귀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단 몇줄에 소개된 기도의 삶 속에 뛰어난 영성이 돋보인다.

네마디의 기도 속에 영성의 엑기스가 담겨 있다.

짧고 단순하지만 기도로 그치지 않는다.

기도로 시작하여 전 생애 동안에 영향을 끼친 영적인 능력들이 돋보인다.

하나님과 교제로 출발하여 존귀함으로 열매맺은 흔적들이 가득하다.

그런 영성의 삶이야말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진정한 영적 모델이다.

야베스의 영성을 더듬어 탐구해 보려는 이유가바로 여기에 있다.

야베스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영성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송삼용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