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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있느냐?

지식창고지기 2012. 1. 18. 08:17

네가 어디 있느냐?( 창3:1-11 )

어기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인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직접 말씀하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우리들의 삶의 좌표가 어디 있는가를 깨우쳐 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는 말씀은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우쳐 주시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난 다음 아담과 하와에게 그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또 지키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것을 능히 이끌어 갈 수 있는 권세와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8편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영화와 권세로 관을 씌우셨도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기 위해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제한된 자유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본문에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불순종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우주 만물을 허락해 주셨는데 아담이 사단의 종이 되어 버린 순간 아담에게 딸려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동시에 사단의 지배를 받고 사단의 저주를 받고 사단의 소속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가시와 덤불과 엉겅퀴가 낳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4장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시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셨는데 마귀가 일순간에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노라" 하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보고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준다'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창조의 왕관으로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속하여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아담이 사단의 소속이 되어지는 순간에 다 넘어 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25:5-6를 보게 되면 이 저주받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 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과 짝하여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된 자리에 있느냐고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에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원수된 관계에 계십니까? 만약에 저와 형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무소부제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편 7편 11절에,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에 예비하셨도다" 라고 말씀한 바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져서 등을 등지고 사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이 사실 때문에 몹시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다 이 부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임종하는 순간에 그 아버지와 아들이 죽어 가는 부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을 돌리고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인은 한 손에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한 손에 아들의 손을 붙잡고 자기의 가슴에 사력을 다하여 끌어당기어 두손을 마주잡게 만들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서야 강팍했던 그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를 하고 사이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죽으셨습니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한 손으로 붙잡고 지옥으로 빠져들어 가는 우리 인간들의 손을 붙잡으셔서 십자가 위에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화목 제물이 되셔서 원수된 하나님과 저와 형을 화목 시키셨습니다. 엡2: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도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질문하신 음성입니다. 만약에 오늘 이 음성을 하나님의 성령에 역사로 당신의 영혼이 듣는다고 한다면 이 시간에 원수된 자리에서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화목 하는 자리에 나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두번째는 죄를 깨닫게 하는 음성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수치와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무화과 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숲속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 잎이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 줄 수가 없었고 숲속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의 피난처가 결코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음성은 마비된 저들의 양심을 뒤흔들어서 죄를 깨닫게 하여 주시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죄를 가지고는 결코 아무 곳에서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따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느냐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 추궁을 하였을 때에 아담은 죄를 고백하는 대신에 당신이 나에게 준 여자가 내게 실과를 줌으로 내가 먹었다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번에 또 하와에게 내가 너더러 따먹지 말라고 한 실과를 왜 따 먹었느냐라고 했었을 때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고 역시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을 때에 이 아담은 죄를 고백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했습니다.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리고 나무 숲속에 숨어서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였던 것입니다. 저와 형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양심이 죄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요16:8절에,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혹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영혼의 성령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양심의 죄를 깨닫게 되고 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죄의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은폐해야 합니까? 합리화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해야 합니까?

죄를 가진 인생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그 음성 앞에서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수면제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합니다. 또 마취제는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의 영혼을 세상과 육신의 정욕에 깊은 잠을 자게 만듭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도록 그 양심을 마비시키는 일을 합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가 극심한 고통 중에서 깨어나듯이 우리가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나가게 될 때 그 영혼은 죄의 고통 가운데서 깨어나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니 저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만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고후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또 잠27: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너희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잠28: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려니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이 음성은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볼려고 하고 동산 나무 숲속에서 자기의 죄를 은폐하려고 했던 아담에게 주시는 질문임과 동시에, 자선이나 행위나 노력을 가지고 위로 받으며 자기의 죄를 숨기고 전가하고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사1:18절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씻어주시마" 라고 오늘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마5장에 보면 신자나 불신자간에 너무나 잘 알려진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교훈 혹은 천국 헌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팔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영원한 위로를 받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때문에 애통해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을 적에 많은 여인들의 무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뒤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인아!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애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 애통하고 아버지 나라에 갈 때 영원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불신자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쾌락의 나무를 향하여 세상 중심, 황금 중심, 정욕 중심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위해서 애통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들은 정욕을 따라 한 평생을 살다가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 하는 자들이 불신자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생들을 향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너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자리에 있느냐, 회개하는 자리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고 자행 자제하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고 심판을 자처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음성 앞에서 죄를 회개하지 않는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회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 이 음성은 심판을 부르는 음성입니다.

스포츠 경기를 할 때 룰을 어기면 영락없이 페널티를 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저와 형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했습니다. 영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양심과 도덕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지·정·의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적에는 일정한 질서와 법이 있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고 만물의 중심이며 주인입니다. 내 멋대로 살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자행 자제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서 페널티를 물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11:9절에, "청년아 네가 마음에 원하고 네가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언젠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고하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너는 권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전도자인 솔로몬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였으나 하나님과 대면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합니다. 전도자들은 말합니다. "예수 믿으시오 그만 이제 세상의 삶을 버리고 주님 뜻대로 사는 생활을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그 음성 앞에서 그 음성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무시할 수 있습니다. 멸시할 수 있습니다.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음성을 대면하여야 했듯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그 음성 앞에 언젠가 대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이 우리의 뼈를 관통할 때 폭풍이 일기 전에 뇌성벽력이 일듯이 천둥처럼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눈은 초점을 잃고 맥은 점점 사라져 가고 혀는 입천장에 붙고 손은 침상에서 맥없이 처지고 이마는 차고 축축한 땀이 맺힐 때 하나님 없이 요단강 가에 이르렀고 소망 없이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 고통이 끊어집니다. 영혼을 묶고 있던 실오라기가 풀어지게 될 때 영혼은 육체 바깥을 탈출하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돌입하게 됩니다. 이때 아직도 들려 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영혼은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살아서 지옥의 음부에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육은 부식되고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늘의 천군과 만군들이 무덤에서 사람들의 몸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음부에서 고통받았던 영혼들이 되돌아 와서 심판의 부활로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부활을 믿는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은 부활한다는 것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요5: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 있고, 사망의 부활이 있습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 납니다. 아담의 원죄는 오늘날 모든 불신자들 속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죄가 심기어져 있습니다. 사단의 생명이 심기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부활, 심판의 부활, 악의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가장 더럽고 추하고 부끄럽고 병든 모습 그대로 부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심판의 부활입니다. 호박을 심으면 줄기가 뻗어서 꽃이 피고 호박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 호박을 잘라서 보면 처음 구덩이에 심었던 씨앗이나 그 호박 속에서 나온 씨앗이나 똑같이 생겼습니다. 아담 속에 있었던 그 원죄는 오늘 저와 형들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씨입니다. 마귀의 씨입니다. 때문에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병들어 죽었으면 병든 모습 그대로 부활합니다. 늙었으면 늙은 모습 그대로 부활합니다. 악한 모습 그대로 영원히 그것을 보존해 가지고 가장 더럽고 추하고 보기 흉하게 악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심판의 부활입니다. 사람은 살아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죄없이 함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피가 죄를 씻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핏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생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육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내속에 소유하였을지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혹은 범죄 한다 할지라도 내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이 심기어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일5: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게 되면 그 껍질은 썩어지고 터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 밀 속에 있는 생명은 대지를 뚫고 새로운 밀알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천사는 무덤 속에 있는 우리의 몸을 일으킬 것입니다. 낙원에 있었던 우리의 영혼은 몸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생명의 부활로 나와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의 심판대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계20:12)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0:15).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1)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아담아 네가 심판의 자리에 있느냐 아니면 생명의 자리에 있느냐를 깨우쳐 주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자리에 있을찐대 생명의 자리로 나아 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입니다.

1912년 4월 14일 "침몰하지 않는 배"라는 이름을 가진 <타이타닉>호가 영국에서 미국을 향해서 출발을 했습니다. 조타수가 수차례 빙산이 앞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선장에게 해 주었으나 그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빙산하고 부딪혔습니다. 1517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705명이 부상을 당한 채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영국 항구와 미국의 뉴욕 항구에 사람이 구름때 처럼 모였습니다. 그 생사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내 가족이 살아 있나?. 그때 두 명단이 발표되었습니다. 한쪽에는 생존자의 명단, 한쪽에는 사망자의 명단, 그 자리는 희비가 엇갈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장막 집을 떠나고 내 영혼이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돌입하고 세월이 흘러 육은 부식되고 그들의 영혼이 다시 천사가 일으킨 몸속으로 들어와서 크고 흰 보좌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음성이 폭풍처럼 다시 한번 들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외면했고, 내가 그토록 무시하고, 내가 그토록 핍박했던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운명이 좌우 됩니다.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처하여진다는 말씀 앞에서 영원히 영원한 희비가 엇갈리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이 음성 앞에서 형은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으십니까? 생명의 자리에 있습니까? 과연 그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고전15장에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면 버리운 자들이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 앞에서 내가 사망의 자리에 있는지, 심판의 자리에 있는지, 생명의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고 힘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구원을 호소하는 음성입니다.

"딱하도다 딱하도다 나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너를 찾아왔다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호소하는 음성입니다.

제가 주의 종으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친구가 아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들을 잃어 버렸는데 안 찾겠습니까?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잃어버리면 안 찾을 도리 있겠습니까? 우리 신학생들이 총동원해서 찾고 라디오 방송도 하고 해서 보름만에 60km 떨어진 도시에서 찾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릅니다. 인간도 자기의 아들을 그토록 찾는데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찾은 우리를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을 때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숨어 있는 아담에게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요일4:10)는 사실을 믿읍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당신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부름의 음성인 것입니다. 주님이 아담과 하와를 찾아 오셔서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벗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양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에덴 동산에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왜 피를 흘렸을까요?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 양은 죄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 양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래서 양이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말합니다. 요1: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속죄 제사를 지낼 때에 사람의 경제력을 따라서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제주는 그 제물 위에 안수를 하고 자기의 죄를 다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죄가 없는, 흠없는 양이 그 죄주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집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 죄 값은 사망이다" 하는 말씀처럼 제주가 죽어야 되는데 양이 죽습니다. 양이 심판을 받습니다. 양이 피를 흘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인의 죄를 속죄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형의 속죄 양으로 우리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철학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선행을 가지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릴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명예와 권력과 황금을 가지고 포장한다고 해서 악취가 나는 회칠한 무덤이 포장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해서 속죄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형의 죄와 죽음과 심판과 멸망과 가난과 질고와 수고와 슬픔의 모든 고통의 저주를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그 심장에 있는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해 가지고 심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서 내가 너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오너라 내가 너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마 하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까 아주 참 마음 아픈 사연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골에 사는 아주머니가 자기의 아이를 엎고 철길 옆에 있는 밭에 가서 일을 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아이를 내려놓고 밭의 김을 열심히 메는데 산 허리에서 기차가 기적을 "삐" 울리면서 쏜살같이 달려오는데 불안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돌아보니까 자기의 아이가 어느 샌가 기어서 철로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정신없이 달려가서 아이를 밖으로 집어던지고 자기는 그만 나올려다 쏜살같이 질주하는 열차에 치여서 비참하게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그 생명을 버렸습니다.

예수! 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예수!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발과 양손에 못을 박으시고 옆구리에 창의 허리를 상하셔서 그 물과 피를 쏟으신 것입니까?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5)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롬5: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니라" (벧전3:18)고 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음성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초청하는 음성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이 음성을 들을 때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빨리 그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가 형을 품어 주시고 그가 당신의 피로 깨끗케 하시고 그가 형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의 기쁨과 용서로 채워 주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실줄로 믿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그 음성은 오늘도 하나님을 등져 버린 모든 인류를 향해서 지금 나에게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은 이 음성 앞에서 원수된 자리에 계십니까? 아니면 화목한 자리에 있습니까? 죄의 자리에 있습니까?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리에 계십니까? 심판의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생명의 자리에 있습니까? 구원의 초청을 거부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 구원의 초청을 받아 드리고 순종하는 자리에 계십니까?

회개하는 자리, 화목 하는 자리,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리하면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기쁨이 있고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만남의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