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공자 (孔子 ; BC 552 - BC 479)

지식창고지기 2010. 3. 26. 23:16

공자 (孔子 ; BC 552 - BC 479)
 

 


1. 중국 고대의 사 상가이며,  유교의 개조(開祖)로서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謖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 출생이다. 자는 중니(仲尼)이며 이름은 구(丘)로서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공자는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그리고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는 처음에는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 ·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 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19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2. [논어]와 사서오경

영어로 The Analects of Confucius, 논어는 공자의 사후 그의 말, 제자와의 대화, 말들을 모아 엮었고 사상을 가장 말해주는 자료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입지를 인정 받고 있는데, 유교가르침의 바탕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서오경: 대학, 중용, 맹자, 논어-사서

서경, 시경, 예기, 역경, 춘추-오경)


3. 공자의 기본 가르침


1)정명: 이름을 바르게

누구나 주어진 이름에 맞도록 바르게 행동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아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은 아들이 되라.” 했다.

2)인: 논어에서 105번 출현 글자. 영어로 Humanity라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한마디로 정의 수가 없다.

인의 두 가지 요소 솔직함(직), 예의 바름(예)를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하고,

인은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갖추어야 필수덕목이라는 점에 틀림없다.

3)의: 이(利)와 대조를 이루는 덕목,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고 하며

군자는 옳은 인가 물어보고 옳은 이라고 생각되면 이익이 올지 말지 결과와 상관없이 그대로 추진한다. Do for nothing!(뭘 바라고 하지 말라!)

4)충과  : 충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행동하는 마음으로 예수의 황금률‘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과 비교할 있다.

인이나 의가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나타날 충과 서가 되는 것으로 지금 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실존주의에서 주장하듯 실존이 본질에 우선 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 공자의 업적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 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가르침을 전파 하였습니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한국에도 받아들여져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정신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자는 춘추 말기에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입니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까지도 한국의 유생들은 이러한 한국의 정신문화에 크게 기여한 공자를 기리기 위해 향교 등에서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그의 사상은 논어나 시경 등에 나타나있습니다. 

●공자의 사상

1)교육 사상

-문(文),행(行),충(忠),신(信)을 강조

-제자들의 능력과 이해정도에 따라 적합 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함

2)정치사상

-도덕 정치의 역설

-성현의 도(道)를 존중

3)핵심사상

-인(仁):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력,인의 출발은 효(孝)와 제(悌)

-예(禮): 인의 실천을 위한 형식

 

<두산대백과사전>참고/<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여기 저기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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