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선사시대의 제주 돌-돌 유물

지식창고지기 2010. 8. 19. 17:42

 
선사시대의 돌유물  
구석기시대의 석기
인류가 남겨 놓은 최초의 문화시대를 구석기시대라 한다. 구석기시대의 석기는 모두 타제석기로 재료는 강가나 해안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갈돌을 많이 사용하였다. 전기에는 직접떼기가 보편적이며 주먹도끼, 찍개, 긁개, 찌르개 등이 있다. 중기에는 석기제작기술이 보다 발달해 망치떼기 수법으로 톱니날석기, 긁개류 등이 제작되었다. 후기에는 간접떼기와 눌러떼기 수법이 사용돼 작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밀개, 새기개 등과 같이 소형의 석기가 유행하며 수량도 많아졌다. 구석기시대는 도구 제작 기술 변천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 3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직접떼기(直接打擊法): 석기시대 전(全)기간에 걸쳐 사용된 기본적 기술. 원석(原石)을 다른 돌이나 나무, 뼈 등으로 직접 때려서 깨뜨려 석기를 제작하는 법. 특히 전기 구석기인들이 주먹도끼나 찍개류와 같은 크고 무거운 다목적 도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한 기술이다.

간접떼기(間接打擊法): 원석에 돌 또는 단단한 뿔이나 뼈로 된 도구를 대고 돌망치로 때려서 박편을 떼어내는 박편석기 제작기술로 진보된 석기 제작 기법. 중기 구석기의 대표적 석기 제작 기술.

눌러떼기(加壓法): 나무나 뼈, 돌로 된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좁고 긴 박편을 떼어내거나 박편에서 돌 조각을 눌러 뜯어 날을 날카롭게 만드는 기법. 후기 구석기시대 제작기술로 작고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데 이용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지역의 구석기 유적으로는 어음리의 빌레못동굴유적과 서귀포 천지연유적이 있다. 출토된 석기의 제작기법에 의해 빌레못동굴유적은 중기 구석기, 천지연유적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편년되고 있다.
빌레못 동굴유적은 용암동굴에 형성된 유적으로, 긁개, 칼, 첨기, 송곳, 부리형 석기, 홈날, 톱니날 등 박편석기와 큰석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박편석기가 주이고 큰석기는 많지 않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기는 모두 직접떼기로 제작되었다. 큰석기는 망치돌 등을 직접 쳐서 만들고, 박편석기는 큰석기를 만들 때 떨어져 나온 박편들을 이용하였다. 간접타격법이나 눌러떼기는 관찰되지 않는다. 석재는 동굴이나 주변에서 구하기 쉬웠던 현무암만을 사용했다.
석기 구성면에 있어 화살촉이나 창 등과 같은 사냥용 석기가 없는 가운데 갈색곰이나 사슴 뼈로 추정되는 동물뼈가 발견된 것은 당시 몰이사냥이나 함정 등과 같은 원시적인 사냥기술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사냥용 석기
선사인(先史人)들에게 있어 짐승사냥은 어로와 함께 중요한 식량자원을 얻는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짐승사냥으로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기름, 보온을 위한 털가죽, 각종 도구로 활용되는 뼈와 뿔을 획득했다. 따라서 석기의 발달과 함께 사냥도구의 개발이 이루어졌음은 당연하다.
사냥도구로 알려진 최초의 구체적인 고고학 자료는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는 화살촉(arrow point, 石鏃)과 창끝(point, 尖頭器)이 대표적이다. 화살촉은 화살대 끝에 붙여 시위를 당길 때 생기는 팽창력을 이용하여 원거리의 짐승을 잡는 데 쓰였고, 자루가 달린 창은 끝이 뾰족하고 예리하여 근거리에서 목표물을 맞히는 데 알맞았다. 이러한 사냥도구의 출현은 구석기 단계에 비해 사냥감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제주도 초기 신석기유적인 고산리유적에서는 화살촉 700여 점, 긁개 50여 점, 창끝 40여 점, 조각칼 7점, 송곳 3점과 각종의 세석인(細石刃), 6만점의 석재편이 수습되었다. 유물의 90% 이상은 석기 제작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석편들이다.
창끝은 첨두부분과 양쪽면을 잔손질하였고, 그 중에서 슴베(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부분)가 달린 유설첨두기(有舌尖頭器)가 특징적이다. 유설첨두기는 아직 한반도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형식이며 대체로 일본 죠몽시대의 사냥도구 양상과 유사하다. 고산리 출토 유물의 석질은 안산암질 용결응회암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곡물 수확용구 및 제분용 석기
농경의 시작과 간석기(磨製石器) 기술의 발달은 주방도구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발명품이 갈돌과 갈판이다. 갈돌과 갈판은 수확한 곡식을 넓적한 갈판 위에 놓고 갈돌을 앞뒤로 움직여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낼 때 쓰는 제분용 도구이다. 이 시기 갈돌은 그야말로 다목적 주방용품이었다. 산에서 채집한 도토리나 수확한 곡식들을 갈판 위에 얹어 여러 차례 가볍게 힘을 주어 문질러 껍질을 벗겨냈다. 골라낸 알맹이들은 다시 갈돌에 넣어 힘을 강하게 주어 여러 차례 문지르면 가루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갈돌로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보다 많은 낟알을 한꺼번에 가공할 수 있는 도구가 개발되었는데 바로 절구다.
가장 이른 시기의 현무암재 갈돌과 갈판이 발견된 곳은 후기 신석기 유적인 북촌리 유적이다. 북촌리 유적에서는 갈돌과 갈판 외에 불에 탄 개산초열매가 발굴돼 이 시기에 본격적인 부엌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문토기시대에 간석기 기술이 일반적인 석기 제작기술로 보편화되면서 도끼나 대패 등과 함께 곡물 가공용 석기가 널리 제작되었다. 애월읍 광령리 유물산포지에서 출토된 갈판과 갈돌, 홈돌과 소형공이, 수확용 도구인 돌칼이 대표적인 예다.

갈판과 갈돌: 갈판은 사방에서부터 가운데가 움푹 파인 확돌과 달리 앞뒤 방향으로 우묵한 것으로 횡단면은 장방형으로 휜 형태를 하고 있다. 대부분 현무암이 석재로 만들어졌다. 갈돌은 갈판에 닿는 면이 매끄럽게 갈리어 평평한 것이 특징이며 갈판과 마찬가지로 현무암만을 석재로 한다. 갈돌은 비교적 폭이 좁고 두툼한 형식과 넓은 형식으로 구분된다. 반타원형 혹은 반원형의 횡단면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홈돌과 소형공이: 홈돌은 자갈돌 양면 혹은 한쪽 가운데가 우묵진 것으로 곡물을 잘게 빻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공이는 두툼한 자갈돌의 넓은 위·아랫면을 타격면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확돌에 곡물을 넣고 빻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 추정된다.

돌칼(半月形石刀): 납작한 박편 및 자갈돌을 이용하여, 일·이차 떼기수법으로 다듬어 날을 만든 것이다. 곡물을 수확할 때, 이삭을 따거나 벨 때 사용한 도구로 추정된다.

주거건축과 석기
제주에서는 구석기는 물론 신석기시대에도 천연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주 주거지로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석기 유적인 고산리유적이나 말기 신석기 유적인 북촌리유적에서도 한결같이 목재가공에 필요한 석기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간석기(磨製石器) 기술이 보편화되는 무문토기시대 유적에서는 돌도끼나 대패 등 벌목이나 목재 가공에 쓰이는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유적지인 애월읍 광령리 유물산포지에서 발굴된 도끼, 자귀, 대패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도끼(石斧): 날부분을 양쪽에서 갈아세운 조갯날 도끼로 머리부분을 떼기수법으로 다듬고 몸 한가운데를 약간 턱지게 하여 도끼 자루를 묶기 편하게 하였다.

자귀(柱狀石斧): 도끼와 달리 수직방향으로 자루를 결박하여, 날의 너비가 자귀의 등과 배 사이의 반밖에 안 된다. 날은 한 쪽에서만 갈았고, 머리끝을 둥그스름하게 다듬어 자루홈이 없다.

대패: 응회암의 얇은 박편을 이용한 것으로 외날이면서 평평한 것이 특징이다.

어로석기; 그물추
곽지리유적에서 현무암재 그물추가 수습되었다. 한 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으로 크기가 다양하다. 곽지리유적은 광령리유적과 비슷한 시기(무문토기시대~탐라시대)의 유적이지만, 해안과 가까운 입지적 특징이 있다. 수 점의 돌도끼, 다소의 갈판·갈돌과 함께 그물추가 출토된 것은 해안입지라는 특수성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곽지리 유적을 남긴 선인들은 농경활동은 물론 어로활동도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장용 석기
1965년 경 문익신 옹이 우연히 발견한 개인 소장 자료 5종의 석기유물이 있다. 발견자에 의하면 한림읍 한림리 속칭 ‘동방굴’ 바닥에서 발견하였다고 하나 현재 정확한 유물 출토지는 찾을 수 없다.
출토된 유물은 홈자귀(有溝石斧), 돌도끼(磨製石斧), 작은 돌도끼(小形磨製石斧), 돌끌(石鑿), 대팻날이다. 이 5점의 석기는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으나, 사용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류로 구성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던 점에서 부장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장품으로서의 유물세트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석기를 한 시점의 것으로 파악할 수 있어 편년의 지표가 될뿐 아니라 당시 문화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유물의 가치가 크다.

마제석검(磨製石劍)
제주에서는 몇 점의 마제석검이 출토되었다. 출토지 미상의 석검 1점, 대포동 출토 1점, 삼양동 출토 1점 등이 있다. 이들 석검은 모두 송국리형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주민신고에 의하여 확실한 출토위치를 알 수 없는 석검은 짧은 슴베에 자루 장착용의 구멍이 뚫린 것으로, 전남 보성강유역을 비롯한 남해안의 여러 고인돌에서 출토한 형식을 취하고 있고, 서귀포 대포동에서 출토된 석검은 짧은 슴베 양옆으로 홈이 파인 형식(有莖式)이다. 이 형식 또한 전남 해안에서 많이 출토된다.
1999년 11월 국가사적 제416호로 지정된 삼양동 마을 유적에서 출토된 유병식석검(有柄式石劍)은 자루까지 돌로 됐다. 석검과 함께 석촉, 합인석부(蛤刃石斧), 유구석부(有溝石斧), 대팻날, 끌,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숫돌, 갈돌과 갈판 등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석기 출토 양상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의 석기 갖춤새와 동일하다. 삼양동유적은 내부에 타원형의 작업공(作業孔)이 위치한 송국리형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자료
국립제주박물관(2001),『제주의 역사와 문화』.
이청규(1995),『제주도 상고사 연구』학연문화사.
이청규·강창화(1998), 『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 -선사·역사』,「선사유적」, 북제주군·제주대학교박물관.
제주도(1989), 『천연기념물 제342호 제주어음리 빌레못동굴 학술조사 보고서』,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과학교육연구소.
제주문화예술재단(2002), 『삶과 문화』제4호, 「선사인들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