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론속의 소설
[강도몽유록]
적멸사(寂滅寺)의 청허선사(淸虛禪師)가 강도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연미정(燕尾亭) 기슭에 움막을 짓고 지낸다. 어느 날 꿈에서, 병자호란 당시 강도에서 죽은 열다섯 여인의 혼령이 한 곳에 모여 울분을 토로하는 광경을 엿보게 된다.
첫번째로 말하는 여인은 당시 영의정을 지낸 김류(金濫)의 부인으로서, 남편이 능력 없는 아들 김경징(金慶徵)에게 강도 수비의 책임을 맡겼고, 아들은 술과 계집에 파묻혀 강도가 쉽게 함락되게 하였다며, 남편과 아들을 함께 비난한다.
두번째 여인은 김경징의 아내로서, 자기 남편이 강도가 함락되게 만든 책임으로 죽임을 당한 것은 마땅하나, 같은 죄를 진 이민구(李敏求)·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은 전쟁 후 오히려 벼슬이 오른 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라고 비난한다.
세번째 여인은 왕후의 조카딸로서, 남편은 전쟁 중에 눈이 멀고 그 부모도 돌아가셨다며 애통해 한다. 네번째 여인은 왕비의 언니로서, 적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자기 아들이 자기를 찔러 죽이고서 정렬(貞烈)로 표창케 한 사실을 어이없어한다.
다섯번째 여인은 강도가 함락된 데에 자신의 남편이 책임이 있음을, 여섯번째 여인은 강도 유수를 맡았던 시아버지의 책임을, 일곱번째 여인은 아들의 책임을 각각 말하며 개탄한다.
여덟번째 여인은 남편이 오랑캐의 종이 되어 상투를 잘랐다며 비난한다. 아홉번째 여인은 서울로부터 홀로 강도에까지 피난을 왔다가 무참히 죽임 당한 원통함을 토로한다. 열번째 여인은 지휘관이었던 자기 남편의 잘못과, 이름 있는 관리의 아내이면서도 오랑캐에게 몸을 내준 동생의 실절(失節)을 비난한다.
열한번째 여인은 마니산 바위굴에 숨었다가 오랑캐의 겁박을 피해 절벽에서 투신한 여인으로서, 으깨어진 비참한 몰골로 원한을 토로한다. 열두번째 여인은 결혼한 지 두 달만에 전쟁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으나,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아내가 오랑캐 땅에 들어갔는지, 길에서 죽은 것인지 의심하고 있다며 탄식한다.
열세번째 여인은 자신의 시아버지가 강하게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대의(大義)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그 공로로 하늘 궁전에서 선녀로 노닐게 되었음을 자랑한다. 열네번째 여인은 그 할아버지의 고결한 지조의 공로로 인해 천당에 들어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열다섯번째 여인은 기생으로서, 뒤늦게 정절을 지키려 하였으나 전쟁을 만나 목숨을 버렸다는 얘기를 하면서, 전쟁 중에 절의 있는 충신은 하나도 없고, 늠렬(추위가 살을 에이는 듯함)한 정절은 오직 여인들만이 보여 주었다고 개탄한다. 여인들의 통곡소리에 청허선사는 꿈에서 깬다
[거타지 설화]
진성여왕 막내아들인 아찬 양패(良貝)가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이때 거타지도 궁사로 뽑혀 따라가게 되었다. 일행이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곡도(鵠島)에서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니 “섬 안에 신령한 못이 있어 여기서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 하므로, 일행은 그 못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못물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남겨 두고 떠나면 순풍을 얻으리라.” 하였다.
양패가 섬에 남을 자를 가리기 위하여 각자의 이름을 적은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 50쪽을 만들어 물에 넣고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라 쓴 목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거타지만을 남기고 모두 떠났다.
거타지가 홀로 섬에 남아 수심에 쌓여 있자, 홀연히 한 노인이 못 가운데서 나오며 말하기를, 자기는 서해의 신〔西海若〕인데 매일 해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다라니[眞言]를 외며 못을 세 바퀴 돌면 자기와 가족들이 모두 물 위에 둥둥 뜨게 되고, 그 때마다 그 중이 자손들의 간(肝)을 하나씩 빼 먹어 지금은 자기 아내와 딸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다시 그 중이 나타날 것이니 그때에는 그를 활로 쏘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거타지가 쾌히 승낙하니 노인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거타지가 숨어서 그 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니, 과연 한 중이 내려와 주문을 외고 늙은 용의 간을 먹으려 하였다.
그 순간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을 맞히니, 중은 곧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노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거타지에게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고 하며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마리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 일행이 타고 가는 배를 뒤쫓아가 그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당나라에 도착하게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받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이를 아뢰니, 임금이 신라의 사신은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여겨 성대히 대접하고 후한 상까지 내렸다. 고국에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로 변한 노인의 딸을 다시 여자로 변하게 하여 그녀와 행복하게 살았다.
[계서야담/귀향]
옛날 서울에 최생(崔生)이란 선비가 있었다.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대대로 벼슬하는 집 자손이었다.
그는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장성해서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였다. 집이 가난해지고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초라해졌다. 그는 선대의 문생과 연고있는 관리들에 현달한 사람도 많았으나, 형세가 최문(崔門)으로부터 멀어지고보니 그를 애석하게 여겨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
최생이 {맹자}(孟子)를 읽다가 '사지를 게을리 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음은 한 불효니라"(惰其四肢, 不?父母之養, 一不孝也)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며, "내가 실로 불효이지." 하고는 붓과 벼루를 치우고 서책을 걷어서 쌓아두고, 자기 수고(手稿)를 모아 불태웠다. 그리고 서가에 가득한 책은 친구에게 맡기었다.
이튿날 집을 팔아서 집값 500냥을 받아,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거느리고 아이종 2명, 계집종 3명과 함께 충청도 청주(淸州) 고장으로 내려간 것이다. 고향에는 제위답(祭位畓) 10결(結)과 초옥 7간에 노비가 10여명을 헤아리고 소가 세 바리 남아 있었다.
최생이 노비들을 불러 서약하기를, "내 너희들과 10년을 기약하여 전답 100결에 노비 100구(口), 소 100필하고, 50간 집에서 만전의 용돈을 쓰고, 매달 포목 300필을 소비하는 부자가 되겠다. 내 명을 순종하는 자에겐 100냥을 상으로 줄 터이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의당 죽음을 못 면하리라.
" 노비들은 "사람치고 누가 부유하게 살고싶지 않으리오마는, 복이 다 정해진 걸 어떻게 말대로 됩니까?"
최생은 "화복은 다 자기로부터 나오느니라. 구하려는 자가 힘쓰면 얻어지는 법이다. 무엇이 어렵단 말이냐? 너희들은 아무 소리 말고 내 시키는 대로만 하여라. 기필할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말아라."
노비들은 마음으로는 전혀 그러려니 안 여기면서도, 입으로 대답은 "그리합죠." 한 것이다.
최생은 이에 500냥을 주어 곡식을 팔아오게 하여 저축했다. 그해는 마침 충청도 지방이 풍년이어서 150전으로 벼 25두를 바꿀 수 있었고, 다른 곡식도 이에 준하는 값이었다. 이듬해 봄에 최생은 몸소 삽을 들고 논두렁 사이에 나아가 농군을 지도하여 200석의 추수를 했다.
이해 역시 대 풍년이라 곡가는 지난해보다도 더욱 헐한 값이었다. 최생은 이에 제위답을 전부 팔아서 돈 3천냥을 받아 오곡을 사들였다. 지난해에 팔아들인 것과 합쳐 계산해보니 곡식이 4천여 석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여름은 가뭄이 들고 가을은 홍수가 쓸어 들에 제대로 된 곡식이 없었다. 시절이 대기근이라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늙고 병든 사람이 구렁에 쓰러지고, 젊은 사람은 유망(流亡)하여 열에 아홉 집이 빈 형편이었다. 피곡(皮穀) 한 섬 가격이 열 냥이고, 쌀은 그 곱절이었다. 늙은 종들이 저장된 곡식을 판매하자고 졸랐으나 최생은 듣지 않고, "가서 동네 부로(父老)들을 불러오너라."
불려온 사람들을 뜰 밑에 세우고 물어보았다.
"우리 이웃에 거의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되오?"
"시방 누가 안죽을 사람이 있습니까. 땅 한 평 없는 이가 많은 데다 토지가 있어 소를 세우고 남녀 일손이 많아 땅에 엎드려 힘써 농사를 지어서 1년을 걱정없이 살아가든 사람도 모두 부황이 들어 죽어가는 판이지요. 이네들 금년 농작이 여름에 가뭄으로 타고 가을에는 물에 잠겨 왕왕 논바닥에 세워둔 채 낫도 대보지 못한 때문입지요."
"허허! 모두 죽게 되다니..... 내게 양곡이 얼마간 있으니, 비록 약소하나 여러분을 구휼할 수는 있겠오. 우리 고장 사람이 전부 굶어죽는 것을 차마 보겠오. 아무로부터 아무까지 인구의 다소와 호구의 대소를 기록하여 보여주시오."
부로(父老)들은 입을 모아 칭송하는 것이었다.
"정말 생불(生佛)이십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인근 사람들에게 알려 그 호구를 기록하여 최생에게 바쳤다. 약정한 날짜에 기록된 500여 농가의 1,300여 명을 모두 불러 곡식을 나누어주면서 말하기를, "여러분, 굶주림을 근심하지 말고 본업에 힘쓰도록 하시오."
드디어 매월 호구에 따라 양식을 분배하여 굶주림을 없애며, 소를 팔아 고삐를 놓친 농가에 소를 사주며 농량(農糧)을 대주고, 또 500여 농가에 오곡의 종자도 지급한 것이다. 그리하여 500여 농가가 합심 협력하여 농사를 때맞춰 부지런히 힘쓰고 서로 솔선 권면하였다.
최생은 "나도 작년에는 흉년으로 실농을 했지. 금년엔 잘 지어야 할 터인데. 그런데 10결의 땅을 이미 팔아버렸으니, 마땅히 남의 땅을 많이 빌려 경작해서 반을 취하리라." 하고 노비를 거느려 몸소 감능을 했다. 그 해는 수확이 매우 좋아서 논임자와 나누어서 100여 석이 되는 것이었다.
500여 농가들이 제각기 추수를 끝내자, 공론이 돌기를 "우리네 이 곡식은 모두 최씨 덕이라. 500여 농가 1,300여 구가 올 봄, 여름철 열에 아홉 집이 비던 때 우리가 주림을 면하고 삶을 온전히 하여 부모, 형제, 처자식과 단란하게 지내며 앞들에서 노래부르게 된 것은 오로지 누구의 은덕인가? 사람이 이 같은 골육지은(骨肉之恩)을 두고도 보답하기를 생각지 않으면 개, 돼지도 우리가 남긴 찌꺼기를 안먹을 것이네."
너나 없이 이구 동성으로 "그렇구 말구!"
그 중 노숙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나서서 동민들과 의논을 하였다.
"최씨네 곡식은 바로 그 양반 제위전 10결과 서울집을 처분한 돈이라. 지나간 봄 곡가로 치자면 4천여 석으로 4만 냥을 받을 수 있음에도 판매하지 않고 우리를 살렸으니, 그야말로 의인이고 어진 분이시랴. 우리가 기껏 4만냥으로 쳐서 돌려드린다면 너무 박하지요. 의당 6만냥으로 갚아야지."
모두들 '옳소'하였다.
이에 호구의 수를 쭉 적어놓고 평상시 식량과 농량(農糧) 및 사준 소값 등을 추곡가로 환산하면 100전이 곡식 20두이어서 전부 6만여 석이 되는 것이었다.
500여 호 농민들이 소와 말에 실어 꼬리를 물고 최씨집 문전에 줄줄이 들어섰다. 최생은 어리둥절하여 무슨 영문인가 물으니, "차차 말씀드립지요." 하고 곡물을 바깥에다 노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로들이 들어와 뜰에서 나란히 절하며, "저희들이 받은 은혜가 태산 같은 데 비하면 이까짓 곡식이야 터럭 한낱입지요. 소인들이 지금 터럭 한 낱으로 태산을 갚는 격입니다."
"대체 얼마를 가져왔오?"
"6만여 석입니다."
"내가 굳이 묵적(墨翟)같은 겸애(兼愛)나 백이(伯夷)같은 청렴을 지키는 것은 아니나, 6만 석은 내가 여러분에게 드린 양곡에 비하면 열 배하고 다섯 곱이오. 이건 조그만 미끼를 던져 큰 자라를 낚는 격이지."
하며 최생은 고사(固辭)하고 받지 않으니, 부로들이 "안그렇습니다. 지난번에 만약 4천석을 판매하셨다면 4만 냥을 받았을 것이요, 4만 냥을 가지고 경향간에서 백화(百貨)를 사들였다가 적당한 시기에 냈다면 12만냥은 벌었을 것 아닙니까. 이 12만냥으로 지금 곡식을 사들이면 12만석이 안 되겠어요. 6만석은 12만석의 반입니다. 12만석을 안취하고 6만석을 취하시니 이것이 청렴이옵고, 이에 상관을 따지지 않고 굶어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고 조금도 보답을 바라지 않으시니 이것이 겸애십니다. 저희들이 이해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500호 1,300여 구가 지난 여름 크게 기근이 들었을 때 빚을 얻을래야 아예 길도 없었을뿐더러, 설사 돈이 얻어진다 하여도 그 이자가 필시 5할을 내려오지 않으며, 그 돈으로 곡식을 바꿀래야 곡식은 귀하고 돈이 천하여 돈을 가진 사람은 장터에 가득한데 곡식을 낼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이런 판국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때를 안 잃고 농사를 지어 집집마다 안은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곡식을 안 받으시면 소인들이 노비로 자원하여 만에 한 끝이나마 은혜를 갚겠습니다."
"당신들 말이 그러하니 안받을 수 없구려."
그들은 모두 "곡식이야 밖으로 갚는 것이옵고, 감사하는 마음은 안에 박혀 있으니 죽기 전에야 어느 날이라 잊겠습니까."
최생은 "준 것은 적은데 받음이 많으니, 오히려 내가 실로 미안할 뿐이지 무어 감사할 게 있겠오?"
그 이듬해 봄에 그 곡식을 매출하는데, 곡가가 한 석에 150전이어서 전부 9만냥을 맏았다. 가을에 다시 매입하여 9만여 석이 되었고, 명년 봄에 한 섬에 2냥을 쳐서 도합 18만냥의 돈이 된 것이다. 그 뒤로는 돈이 지천으로 많아서 곡식을 매입하기도 어렵고, 곡식도 많아 역시 돈으로 바꾸기도 지난했다. 그래서 500여 호 중 장사속을 짐작하는 자들에게 밑천을 대주어 장사를 시켰다.
10년 사이에 최생은 재화가 넘쳐흘러 애초에 노비들과 약조했던 대로 된 것이었다. 이에 노비들에게 상으로 각기 100냥을 주었다. 500여 호 농가들은 흉년이 들어도 최생의 도움으로 무난히 지냈다.
이 이야기는 그의 특히 아름다운 행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