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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 (송인규 목사)

지식창고지기 2011. 8. 11. 21:31

삼분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

 

I. “영”에 대한 이해: 삼분설 vs. 이분설

 

 (1) 삼분설자의 주장


삼분설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이유는, 성경적 근거(살전 5:23; 히 4:12)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못지않게 강력히 내세우는 근거로서 “영”에 대한 구속사적 설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구속사적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i) 창조: 아담은 처음에 영, 혼, 육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ii) 타락: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영은 죽고 혼과 육만 살아남았다.
 (iii)중생: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인간의 영은 되살아남으로써 다시금 영, 혼, 육을 갖춘 존재가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상기와 같은 설명이 오늘날 사용되는 신학 서적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삼분설의 옹호자들을 세대주의와 오순절주의 내에서 찾지만, 그들의 신학 서적은 대체로 이분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여 삼분설이 그토록 일반 그리스도인의 의식 속에 깊이 파고 든 것일까?

 

 필자는 세 가지 -- 서로 중첩될 수도 있는 --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손쉽게 접하는 서적이나 가르침이 거의 대부분 삼분설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1970-80년대에 걸쳐 삼분설적 신앙 형성에 영향을 준 책으로 웟치만 니의 저서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 있어서는,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자로서 20세기 내내 애용되어 온 스코필드 관주 성경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성경의 살전 5:23 해설에는 삼분설에 대한 설명이 뚜렷이 제시되어 있다. 또, 1970년대 순회 강연으로 유명했던 빌 고타드(Bill Gothard)의 가르침도 역시 삼분설에 기초한 것이었고, 찰스 솔로몬(Charles R. Solomon)은 아예 삼분설에 기초한 상담 이론을 끈질기게 펼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대다수의 경건 서적이 삼분설을 설파하고 있다.

 

둘째, “영”이라는 요소가 중생과 더불어 새로이 살아난다는 데 대해 경이감을 갖기 때문이다. 보통 이분설에서는 중생 시에 일어나는 영혼의 변화에 대해서 삼분설만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분설의 경우에는 이미 존재하던 “영혼” -- 비록 죽었다고 이야기하지만 -- 이 새로워지는 것으로만 말하는 데 반해, 삼분설에서는 전에 “죽었던” 영이 새롭게 살아났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훨씬 신선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이분설보다는 삼분설에 더 끌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 삼분설자들이 제시하는 바 영, 혼, 육이라는 구성 요소와 그 요소들의 상응적 수행 기능에 대한 설명이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들의 설명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육
                        혼
                                                영: 하나님 의식(God-consciousness)
                  육   혼   영    혼  육   혼: 자아 의식(self-consciousness)
                                                육: 세상 의식(world-consciousness)
                            혼
                               육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영은 인간의 가장 내면에 있는 최고의 요소로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기관이 되고, 혼은 영을 감싸고서 육 사이에 중재를 하는 요소로서 지정의에 관계하는 기관이며, 육은 가장 낮은 요소로서 외부 세계를 감지하는 기관이다. 이같은 설명이 실상은 여러 가지 이론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일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2) 이분설자의 비판


삼분설자들의 “영” 이해와 관련하여 세 가지 사항을 비판하고자 한다.


(i)“영”에 대한 과대 평가.


어떤 이들은 “영”을 너무 고상하게 생각해 “영”이 타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한다. 16세기의 한 지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영은 타락 이전, 도중, 이후 언제건 고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떤 근거에 의해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특이하게도 그는 살전 5:23을 전면에 내세워 자기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한다.

 

성 바울은 데살로니가인에게 보내는 편지 (살전 5:23)에서, 특히 영의 순전성과 고결성을 다음과 같이 예증하고 있다: “너희의 온전한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는 너희의 온전한 혼이나 너희의 온전한 몸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의 온전한 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번 타락해서 파손된 것은 무엇이나 더 이상 온전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강조는 원저자의 것].

 

이 지도자의 논지인즉, 살전 5:23에 우리의 영을 가리켜 온전하다고 한 것을 보면 “영”이란 과거에 전혀 타락의 영향을 입지 않고 보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자신의 논지를 개진함에 있어 살전 5:23에 대한 Vulgate 역본의 표현 -- et integer spiritus vester (and your intact spirit) --을 그래도 받아들임으로써 주석상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희랍어에는 ὁλόκληρον ὑμών으로 되어 있어, “온전한”의 수식 대상이 “영”이 아니고 “너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논지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고 하겠다.

 

(ii) “영”에 대한 독점적․우위적 이해?


삼분설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영"에 대해 독특한 취급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삼분설자들의 모든 설명을 얼마든지 이분설로 소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삼분설자들의 해설부터 들어 보자. 그들은 아담이 영, 혼, 육의 세 요소로 창조되었는데 불순종으로 인해 ”영“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른 추론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 관련하여 죽음의 경고를 던지셨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아담은 사단의 시험에 빠져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는데, 곧 하와가 준 금단의 열매를 받아 먹은 것이었다 (창 3:1-6). 그러나 아담은 창 2:17과 달리 죽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담의 혼과 육은 살아 있었지만, 범죄하는 그 순간 영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영”의 죽음을 겪게 되었다. 바울은 구원 받기 전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죽었다고 말한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오늘날 비신자들을 보면 그들의 혼과 육은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의 영은 죽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존재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할 때 그들의 “영”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① 이분설자들은 삼분설자들이 제시하는 이상의 설명에 대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영”의 죽음과 살아남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면 “영”이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의 견해로는 다음의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U1)실체론적 이해(substantive understanding):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라는 구성 요소가 멸절되었다는 뜻이다.
(U2)기능적 이해(functional understanding):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의 향신적(向神的) 기능이 전무(全無)하다는 뜻이다.
(U3)관계론적 이해(relational understanding):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이상의 해석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실체론적 이해[U1]는 심지어 삼분설자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비록 삼분설자들이 영의 죽음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영의 멸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심지어 중생하지 않은 타락한 상태에서도 아직껏 그저 짐승에 불과한 존재로 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안에 … 인간의 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영이 존재하고 있음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기도 하다. 모세와 아론의 하나님을 묘사할 때 “모든 육체의 생명(ת?וּר)의 하나님”(민 16:22)이라고 한 것이 이 점을 보여 준다. 여기에 나타난 “생명”이라는 번역어는 원래 영(?וּר)의 복수이다. 또 신약에서도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증거되고 있다.

 

고전 2:11 사람의 사정(私情)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사람의 내면 의식을 영의 기능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신자건 불신자건 모든 인간에게 영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에 관한 실체론적 이해[U1]에 대해서는 이분설자나 삼분설자나 동일하게 배척의 의사를 표명한다. 따라서 [U1]의 면에서는 삼분설자나 이분설자나 동위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능적 이해[U2]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영의 기능에 대해서는 이분설자와 삼분설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분설자는 영 -- 보통 “영혼”이라고 말한다 -- 의 기능에 모든 정신적 활동과 행위를 포함시킨다. 즉, 지․정․의와 연관된 모든 활동 -- 이는 삼분설자가 보기에는 “혼”이 하는 것이다 --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활동 -- 예배, 기도, 찬양, 고백 등 -- 도 영혼이 도맡아 하는 일이다. 반면, 삼분설자들은 이 가운데 후자 -- 곧 하나님을 향한 활동 -- 만을 “영”의 기능과 연관시킨다.

 

비록 영의 포괄적 기능에 대해서는 삼분설자와 이분설자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타락한 존재가 할 수 없는 바 -- 삼분설자는 영의 기능이라 표현하고 이분설자는 영혼의 가능 가운데 향신적 기능이라 표현하는데 -- 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한다.

따라서 기능적 이해[U2]의 면에서 보더라도 삼분설이 이분설보다 우위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끝으로 관계론적 이해[U3]에 대해서 알아 보자. 아담이 타락했을 때 그가 하나님과 누리던 친밀한 교제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후손은 모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게” (엡 4:18) 되었다. 그러나 그가 영생이신 그리스도(요일 5:20)와 연관을 맺으면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cf. 롬 8:14-15), 생명을 향유하게 된다 (요일 5:11-13).

그런데, 이상과 같은 이해는 삼분설자나 이분설자나 모두 동의하는 바이다. 따라서 [U3]의 면에서도 삼분설이 이분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필자는 영에 대한 구속사적 설명을 놓고 이분설과 삼분설을 비교해 보았다. 특히 “영의 죽음”이라는 가르침을 세 가지 해석의 면에서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 어구를 실체론적으로 나[[U1], 기능적으로나[U2], 관계론적으로나[U3] 어떤 각도에서 보든, 삼분설이 설명하는 바를 이분설이 설명해 낼 수 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삼분설이 “영”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 이분설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② 오히려 삼분설은 이분설에 비해서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삼분설은 인간을 너무 “영”의 관점에서만 편협하게 조망하기 때문에, 이것이 커다란 약점으로 작용한다.

 

첫째, 삼분설은 인간의 타락과 죽음을 전인격적으로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창 2:17에서 불순종의 댓가로 주어지는 “죽음”은 결코 “영”에 대해서만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담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는 그의 혼에도, 그리고 그의 몸에도 적잖이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아담의 혼 -- 삼분설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의 -- 이 죽음의 영향 하에 놓였음은 우리의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확증되는 바이다. 인간은 자아관에 있어서 늘 열등의식이나 우월의식의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리곤 한다. 인간의 인격적 기능 -- 보통 지, 정, 의로 설명되는데 -- 은 통합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화되든지, 한쪽 기능이 다른 쪽을 삼켜버린다 [지성 만능주의(intellectualism), 감정주의(emotionalism),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등]. 죽음은 또 아담의 몸에도 치명적 영향을 초래했다. 그의 몸은 노화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는 영혼의 분리를 겪으며 죽었다! (창 3:19; 5:5) 이렇게 아담의 죽음은 영-혼-육의 총체적 죽음인 것이다.

 

둘째, 삼분설은 회심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너무 “영”의 양상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구원의 풍성함을 축소시키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구원 경험이 “영”을 중심한 것이기는 하지만 (롬 8:10),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영”만 새생명의 은택을 맛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혼”과도 연관시키는가 하면 -- 마리아가 주를 찬양한 것은 그녀의 “혼”이었고 (눅 1:46), 구원을 받는 것도 “혼”이며 (벧전 1:9), 순교자의 탈신(脫身) 상태를 가리켜서도 “혼”이라 언급한다 (계 6:9) --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몸” 또한 새생명을 누리는 데 있어서 -- 우리는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고 (롬 12:1), 주는 우리의 “몸”을 위하시며 (고전 6:13),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 된다 (고전 6:19) --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새로운 생명의 향유는 영-혼-육의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삼분설이 “영”의 측면을 불균형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타락이든 구원이든 거기에 전인격적 통전성이 개입되어 있음 -- 죽음도 새생명도 영․혼․육 전체의 것이다 -- 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본다면, 삼분설은 겉보기와 달리 “영”에 관한 설명력에 있어서 이분설보다 나은 것이 없고, 전인격성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이분설보다 열등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iii) 실체/기관과 기능 사이의 상응?


삼분설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영,” “혼,” “육”의 각 기관과 그 기관들이 수행하는 기능 -- 신의식, 자의식, 세상 의식 -- 사이에 상응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데 있음을 얼마 전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따른다. 세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의 세상 의식(world-consciousness)과 자아 의식(self-consciousness)은 각각 “육”과 “혼”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인간이 외부 세계를 몸 자체만으로 의식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 자료가 신체 기관[눈, 귀, 신경계, 뇌 등]을 통해 접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의식하고 인식의 내용으로 전환하는 데는 우리의 마음(mind) -- 삼분설자의 표현대로라면 혼(soul) -- 이 필수적으로 연관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기 의식과 지정의의 활동 역시 혼 자체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뇌와 중추 신경계, 신체 기관을 동반하는 법이다. 따라서 세상 의식은 몸과만 연관이 되고, 자아 의식은 혼과만 연관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은 한 시 바삐 시정되어야 한다.

 

둘째, 영이 하는 고유의 활동들이 실상은 삼분설자들이 말하는 혼의 작용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영은 결코 스스로 영적 활동을 수행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하자. 이는 삼분설자에 의하면 분명 영의 활동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내면적 성찰, 심령의 즐거움 등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성찰, 즐거운 감정 등은 혼의 작용이다. 따라서 “혼”의 활동과 무관한 -- 혹은 혼의 활동을 초월하는 -- “영”의 활동이란 실제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 삼분설자들은 실체/기관과 기능 사이의 관계 설명에 있어 개념의 낭비 현상을 빚고 있다. 이것은 특히 “영”과 “혼”의 구분에 있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이분설자가 영혼과 육신을 실체적으로 구분할 때에는, 각 실체의 속성을 대조적으로 열거함으로써 왜 두 실체가 구분되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명확한 분석이 “영”과 “혼” 사이에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저 “영”은 하나님 의식의 기관이고 “혼”은 자기 의식의 기관이라고만 할 따름이지, 그 두 가지가 존재적으로 어떻게 나누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과 “혼”을 구별한단 말인가? 영(혹은 혼)이라는 실체 하나만으로도 모든 기능이 다 설명될 수 있는데, 무슨 이유로 -- 사실 이러한 구분이 성경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은 이 논문의 전반부에서 밝힌 바와 같다 -- 그러한 개념의 낭비를 벌인단 말인가? 필자는, 삼분설에 대해 매우 도전적 비판을 가한 어느 신학자들의 진술을 그대로 빌리고자 한다: “한 개인이 하나님 의식(God-consciousness)과 자아 의식(self-consciousness)을 갖는 데 꼭 두 가지 실체가 다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인해 필자는 삼분설이 제시하는 실체/기관-기능상의 멋들어진 도식이 실상은 허울만의 것임을 밝혔다.

이번 분단에서 필자는 왜 삼분설이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하면서도 일반 대중에게는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사항 -- “영”에 대한 독특한 이해 및 실체/기관과 기능 사이의 상응식 설명 -- 모두 표면상으로는 매력적으로 여겨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론적 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성경적으로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상으로든 삼분설이 타당하지 않다고 거듭 천명하는 바이다.

 

 

II. 삼분설의 위험성

 

필자는 이분설이 삼분설보다 성경적으로 훨씬 더 합당하고 충실한 입장임을 여러 방면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혹시 삼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견해라고 해도 -- 물론 그렇지 않지만 -- 필자는 어떤 이가 이러한 인간 이해를 자신의 신앙 생활에 적용하고자 할 때 상당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삼분설 이론이 갖는 본유적 문제점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사역에 연관되자마자 발생하기 십상인 그런 성격의 것이다.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신앙 상태를 삼분설적으로 진단하고 해석할 때 개인과 공동체 내에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갈등과 대립 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불필요한 자아 성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가 하면, 또 반대로 불건전하고 과도한 자기 만족과 자랑의 깃발로 자신을 장식하기도 한다. 또, 혼의 무용성이나 세속성(carnality)이 극도로 강조되기 때문에, 흔히 신자 편에서의 수동성이 장려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합리적 노력이나 상식조차도 경시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내면 위주의 영성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스타일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이어 신앙 공동체의 특징으로 발전이 된다. 한 공동체 내에서 성경 해석이나 신앙적 특징과 관련해 독선적 태도나 권위주의적 “진단”이 판을 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모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거나 사단의 시험에 빠진 것으로 휘몰리고 만다. 이러한 특징이 공동체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다른 신앙 공동체에 대해서도 매우 배타적이고 정죄(定罪)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둘째,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경도(傾倒)된 경건주의적 면모 때문에 삼분설의 유입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필자가 “경도된 경건주의적 면모”라고 할 때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었다. 우선, 감정주의(emotionalism)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의식과 심성 깊숙이 뿌리박은 신앙 전통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받아들이지도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은혜스럽다”는 것은 감동적이라는 말의 기독교적 표현이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의 역할을 간과하든지 무시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경향으로 이원론(dualism)을 들 수 있다. 영혼을 육신보다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후자는 악하거나 천한 것으로 간주한다 [영육(靈肉) 이원론]. 교회와 세상을 성속의 범주로 고착화시켜서 전자는 무조건 거룩하고 후자는 무조건 악한 것으로 치부한다 [영역(領域) 이원론]. 이원론적 인식과 사고 방식이 판치는 한, “세상의 소금과 빛,” “문화 명령,” “전 생활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함” 등의 어구는 공허한 말치레와 표어로 그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신앙적 상황에 삼분설이 유입된다고 하자. 그 피해가 얼마나 크겠는가? 감정주의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릴 것이요, 이원론에는 가속도가 붙어 한국 교회를 풍비박산의 상황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삼분설의 유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아니, 사실 이미 유입되어 여러 모로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합적으로 볼 때, 필자가 삼분설을 배척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삼분설은 성경적으로 타당성이 희박한 이론이다.
둘째, 삼분설의 “영” 이해는 주장하는 것만큼 독특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
셋째, 삼분설이 한국 교회에 유입되고 확산될 경우 전인격적․통전적 신앙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하고 거룩을 이루어가야 하며 지속적으로 속사람의 강건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에 좀 더 마음을 열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결코 삼분설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