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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둘 다 소중해요

지식창고지기 2011. 8. 12. 11:52

'칭의와 성화' 둘 다 소중해요
구원론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사도 바울은 치우지지 말 것 강조

 

장창수 목사

 

 

구원론에 관련하여 온갖 주장들이 난무한다. 칭의나 성화 차원에서 구원론이 쟁론화되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주장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원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성경적인 구원론의 이해에 대해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뻐 이렇게 이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3~5).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이후 세 가지 면에서 신앙 삶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의 믿음,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다. 사도 바울은 이들 세 가지가 골로새 교인이 보여준 신앙 열매라고 이렇게 말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믿음 사랑 소망은 성도들이 신앙 삶 중 자신의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바로미터와 같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신뢰하는 믿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며, 다른 성도들을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소망하기 때문에 이미 언급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놀라운 인내력을 보인다.

 

 

믿음·소망·사랑이 하나이듯 

 

그러므로 다른 서신에서 이들 세 가지가 이렇게 소개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이들 세 가지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뒤 골로새 교인들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보인 구원의 증거였고 성장의 증표였으며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균형 잡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최초의 믿음 이후 신자들은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즉 예수님을 자신의 주(主)로 계속 그리고 반복적으로 신뢰하는 믿음과 다른 신자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랑 그리고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을 더욱 자라게 한다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우리가 알듯이 구원 얻게 하는 최초의 신앙고백은 칭의(稱義)의 은총을 가져다준다. 이 은총을 받은 성도는 그 신앙이 자라가며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인 다른 성도들을 열심히 사랑하고 확고한 소망으로 인해 범사에 탁월한 인내력을 보인다. 이런 신앙 삶을 우리는 성화(聖化)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성화도 구세주인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고 사는 계속된 신앙고백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칭의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최초의 그리고 단 한번의 신앙고백만으로 신앙 삶이 충분하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칭의는 성도의 삶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성화라는 방식으로 반드시 드러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화는 칭의의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시해야 할 사실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조화를 보이는 아름다운 신앙 삶이 어떤 것인지를 논했지 믿음과 사랑과 소망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 분리되면 신앙 삶은 그만 균형을 잃어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사도 바울의 이런 논리는 지금까지 교회나 교인들이 이들 세 항목을 나누어 묵상하길 좋아한다는 사실에 큰 경종을 준다. 그러나 이들은 나누어지지 않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신앙 삶은 세 가지 관계에서 그 성장을 보여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이며 셋째는 자신과의 관계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칭찬하며 이들이 세 관계에서 아름다운 성장을 보였다고 칭찬했다.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반복적인 신뢰 행위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며, 사랑은 다른 성도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랑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뜻하며 그리고 소망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앙망하는 자세로 이 소망의 소유자는 놀라운 인내력 또는 자제력이란 성숙한 인격을 뜻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믿음으로 구원 받고 난 이후 신자들은 이들 세 가지 관계에서 자신의 성장을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때 신앙 삶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보이며 아름다운 조화(調和)를 보인다.

 

그러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있으나 이웃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수직적이지만 수평적이지 못해 손에 피를 묻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행위와 같다(사 1:11~17). 반면 이웃 사랑을 열심히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거나 바르지 못하다면 그 사랑은 인본적인 박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갈 5:6). 물론 이 윤리만으로 인간은 절대로 구원 얻지 못한다. 더구나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이 없는 종교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행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가짜이며 위선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 칭의(稱義: justification)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치우친 비성경적인 구원론이며 또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만 강조하며 칭의를 무시한다면 이 또한 치우친 구원론이다. 신앙 삶에서 칭의와 성화는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므로 모두 필요하며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성도의 최종적인 소망인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성된다.

 

이 점에서 은혜와 율법, 또는 복음과 율법은 서로 반대 개념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율법은 구원 받은 이후 신자가 지켜야 할 기독교 윤리 도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출애굽 사건 이후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430년간 애굽에서 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면 율법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법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돕는 길잡이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기 위해 율법을 구원의 수단인 양 주장했다. 이들은 칭의를 배제한 성화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이즘의 잘못이었다.

 

 

칭의 이후 성화에 힘써야

 

이제 우리는 구원론을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최초로 고백한 믿음으로 죄인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 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출생한다. 이를 우리는 칭의라 말한다. 즉 칭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음을 뜻한다. 이 이후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구원 받은 죄인은 하나님의 자녀 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기 위해 자라야 하며, 말씀에 따른 선행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정당한 시민임을 하나님께 보여야 한다. 이런 노력과 삶을 성화라고 말한다. 이런 훈련이 잘 된 성도, 즉 선행으로 하나님나라 시민다움을 이 지상에서 보여준 신자만이 마침내 하나님의 적법한 상속자로 나타나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한다. 이를 우리는 영화라고 부른다. 이렇게 신분과 삶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서로 분리되지 않듯이 칭의와 성화도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칭의와 성화와 영화는 각각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단어와 관련된다. 칭의는 믿음으로, 성화는 사랑으로, 영화는 소망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관련시켜 골로새 교인들의 균형 있는 신앙 삶을 칭찬했다. 이들 셋이 모여 성도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나뉘어 어느 하나만 주장되면 성도의 구원은 그 의미를 잃는다.

 

혹자는 칭의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칭의는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다. 성경은 또한 성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다(빌 2:12). 그러므로 이런 주장은 기독교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첫째, 기독교교회 안에 성화를 이루지 않는 신자들이 양산될 것이며 둘째, 칭의 이후 죄를 지어도 구원 받는다는 구원파의 비성경적인 주장이 기독교 교회에서 유행할 수 있다.

칭의론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은 한 번 택한 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은총으로 영화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 신자는 자신만 간신히 구원 얻어 천국에 들어가나 그에게 상급은 전혀 없다(고전 3:13~15). 다른 신자는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위의 두 종류의 신자들은 대단히 소극적인 신앙의 삶을 하나님 앞에 살 것이다. 이런 신자들은 결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 감격하여 스스로 주를 위해 몸을 드리는 적극적인, 활동적인 그리고 헌신적인 성도가 필요하다. 이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확장될 것이다. 이 점에서 칭의의 은총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은 불충분하다.

 

그리고 칭의만으로 충분하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지상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세워 자신의 양들을 돌보도록 했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는 사도 즉 목회자의 도움으로 성화를 이루고 재림 이후 하나님 앞에 선 영화에 이른 성도를 가리켜 말한다. 즉 목사는 성도들의 성화를 돕기 위해 존재하고 일한다(엡 4:11~12). 그리고 하나님은 성화를 이룬 정도를 보고 이들이 받을 상급의 수준을 결정하실 것이다. 이를 알기 때문에 성도는 칭의 이후 성화에 당연히 힘쓴다.

 

칭의와 성화와 영화, 즉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시간 개념으로 마지막으로 살핀다. 칭의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믿음은 시간으로 보아 과거에 속한다. 과거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 역사와 그 결과 그리고 이를 이루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성도에게 향한 것으로 지금 이곳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 점에서 현재 성도가 실천하는 사랑은 구원 얻게 한 믿음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 위에 소망은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될 구원과 관련된다. 시간으로는 미래에 속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종국적으로 이 소망을 위함이었다. 영화는 과거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고 현재 믿음으로 성도가 누리는 구원을 종국적으로 완성시킨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림 소망이 배제된 신앙은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자들의 것이다. 이렇게 시간 개념으로도 구원 또는 신앙 삶은 균형 감각을 가져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은 성경을 묵상함에 있어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우(愚)를 자주 범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둘이 모두 기록된다.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대로 이 둘을 모두 취해 균형 있는 해석을 찾아 치우치지 않는 교리를 세워야 한다. 이때 기독교 교회는 활발하게 성장할 것이다. 믿음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이 더는 계속되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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