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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이즘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 공동체와 바벨론 공동체의 교류/정연호

지식창고지기 2011. 10. 24. 19:15

유대이즘이란 무엇인가?
탈무드의 형성과정(7) – 이스라엘 공동체와 바벨론 공동체의 교류

탈무드는 미쉬나에 아모라임 학자들의 논의가 더해져서 형성된 것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틴) 땅에서 만들어진 것을 예루살렘(혹은 팔레스틴) 탈무드라 하고, 바벨론에서 만들어진 것을 바벨론 탈무드라고 한다. 양 탈무드는 언어, 문체, 내용, 주제의 범위 및 법적인 권위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이스라엘 땅에서 편집된 미쉬나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아모라임 시대 초기에 바벨론 학자들이 팔레스틴 학자들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 탈무드는 유사한 점도 있다.

이런 유사성은 양 공동체의 일반적인 교류와 더불어, 양 지역의 학자들 사이를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했던 ‘네후테이’ (נחותי)의 공헌이 결정적이다.

1. 양 공동체의 교류 상황

미쉬나와 탈무드가 형성되던 시기에 팔레스틴 지역과 바벨론 지역은 각 각 로마와 파르티안 제국에 속해 있었다. 주전 63년 이래로 팔레스틴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바벨론 지역은 페르샤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안 제국(주전 238- 주후 226)의 지배하에 있었다. 때때로 양 제국간에는 영토 확장을 위한 군사 충돌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과 바벨론의 유대인들간의 상호 방문과 이주를 통한 교류는 중단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인들과 현인들이 파견한 대표단이 양국을 오가면서 이스라엘 땅의 학당에서 내린 새로운 규율들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특히 제2차 유대 항쟁, 곧 바르 코크바 항쟁(줗 132-135년) 이후에 이스라엘 땅의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지역으로 도피(이주)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바벨론 유대 공동체는 바르 코크바 항쟁 이후로, 많은 지도자들과 현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독자적인 토라 연구를 위한 학당들을 설립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한편, 이스라엘 땅의 유대 공동체는 쇠퇴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다. 바르 코크바 항쟁 이후 야브네의 학당이 갈릴리 지역으로(우샤, 세포리) 옮겨 지는 과정에서 다소 쇠퇴했으나, 랍비 유다 하-나시의 지도하에 미쉬나가 편집되는 시점에 이르면 팔레스틴 학당의 권위는 최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주후 3-4세기 이후로 팔레스틴의 경제적 위기와 기독교화된 로마(비잔틴 제국)의 억압으로 팔레스틴 공동체와 학당은 점점 쇠퇴하게 되는 반면에, 바벨론 지역의 학당들은 더욱 융성하게 되면서, 탈무드 시대 말기에 이르면 팔레스틴 랍비 지도부의 지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위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2. 네후테이(נחותי)

팔레스틴과 바벨론 공동체간의 가장 강력한 연대 관계를 형성한 주역이 ‘네후테이’이다. 아람어로 ‘내려 가는 자들’이란 뜻을 지닌 ‘네후테이’는 탈무드 현인들에게 붙여진 칭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과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할라카’와 가르침을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팔레스틴과 바벨론 학당간의 교류는 특히 주후 3-4세기에 활발하였다. 가장 초기의 네후테이는 팔레스틴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팔레스틴 학당과 랍비들의 견해들을 전달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역사 정보들을 바벨론 학당에 전달하였고 이스라엘 땅의 학당들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서도 친숙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네후테이의 목적이 팔레스틴 현인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데에 있었다기 보다, 바벨론의 부유한 유대인들로부터 팔레스틴 학당을 위한 모금 활동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 공동체를 ‘오고 간 학자들’이 양 쪽 학자들의 결정적인 분열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음이 틀림없으며, 바벨론 탈무드 내에 상당한 양의 팔레스틴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음은 ‘네후테이’의 활동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