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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란과 소래교회 (1)

지식창고지기 2011. 11. 11. 17:22

동학란과 소래교회 (1)

 

1) 혼미한 시대

 

1880년대의 한국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원군 10년 집권의 몰락과 뒤따른 민씨 정권의 실패, 그리고 대원군의 재집권 기도,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등 민생을 위한 정치는 실종된지 이미 오래였고 국정은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져 암담한 사회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적떼들이 밤낮을 가지리 않고 길 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높은 관리나 사대부의 집을 식은 죽 먹듯이 터는 무법천지가 연출되기 시작하였다. 날이 저물면 출입을 자제해야 했고 밤이면 사대문 밖은 이들의 전용 활동무대로 변하고 말았다.

 

무정부상태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화적떼들의 방화와 약탈행위가 예사로 자행되였으며, 이들의 행동을 막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관리들과 지방토호들은 자기들의 직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소·빈농들의 재산을 쥐어짜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극도로 혼란해질대로 혼란해진 사회는 이제 민란을 손짓하여 부르고 있었고, 호서와 호남의 동학은 신도의 수를 늘려가면서 때를 기다리게 되니 결국 사건은 동학으로 인해 터지고 말았다.

 

2) 동학은 힘을 내고

 

극단적인 사회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이단사술(異端邪術)에 현혹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던 서인주가 1890년 8월에 풀려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1892년 10월 그는 교주 최제우의 [신원 상소](伸寃上蔬)라는 명목으로 공주에 1만여 명의 교도들을 집합시키고 충청감사 조병식과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상소를 한다. 이 때에 있었던 교주신원운동은 단순한 신원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당시 농민들이 기대하는 대 사회 운동의 실마리를 만들어 가는 데 본 뜻이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계속 대형집회를 유도해 갔다.

 

1893년으로 접어들면서는 지방에서 하던 상소운동을 서울로 올리게 되며, 궁궐 앞에서 이른바 복합상소(伏閤上蔬)를 실행하였으며, 아울러 "척양왜(斥洋倭)"의 구호도 함께 외침으로써 교주신원의 문제로 시작된 동학의 움직임은 서서히 정치적인 색깔로 옷을 바뀌어 입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이들이 붙인 벽보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사상적으로 강력하게 무장되어 있었는가를 알게 된다. 1893년 2월 14일 밤 미국선교사 기퍼드가 경영하는 기포학당(야소교 배척격문이 붙은 곳은 기포 학당(奇布學堂)이다. 언더우드가 설립(1886)한 고아학교(언더우드학당)를 기퍼드가 운영할 때 기포학당으로 불렀다. 이들이 붙인 격문은 "기독교는 경천(敬天)이 아니라 패천(悖天)을 한다"는 선동문구가 있었다.)에 서양 학문을 배척하는 벽보가 붙여진 것을 필두로 2월 18일에는 개신교 예배당에도 벽보가 붙었다. 이 벽보의 내용들은 대개 "어서 짐을 싸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고 "만일 그리하지 않을 경우 갑옷 투구를 입은 군인들이 3월 7일을 기하여 공격할 것이니 그리 알라"는 통고형 벽보였다.

이들은 그 후 보은에서 7,8만 명을 헤아리는 교도들이 모여 "척양왜창의(斥洋倭倡義)"의 큰 깃발을 세우고 군중집회를 하며 기세를 올리기도 한다.

 

이 때 이들을 지휘하는 핵심 지도부의 사상은 반봉건 반외세의 방향으로 굳혀 있었다.

 

 

2. 동학란과 소래교회 (2)

 

3) 동학란의 시발

 

척양왜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원평집회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회오리를 일으키며 봉건 이씨 정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1893년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11월경의 일이다.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탐학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황주·중화·강계·회령·종성·개성·안주·운산·금성·양주·양근·익산 등지에서 봉기를 시작하였고, 합덕의 농민 수천 명은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의 집과 그 형제, 친척들의 집을 불태우기도 한다. 이 때부터 동학란의 주동 인물인 전봉준은 본격적인 거사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접근해 가게 된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강제노역을 통하여 만석보를 건조하였을 뿐 아니라 만석보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하여 1894년 1월 10일 드디어 배들평야에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집결하였고, 다음 날 11일 아침에는 고부관아가 이들의 손에 점령되고 만다. 그리고 그 동안 하지 못하였던 숙원사업인 탐학관리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폭력의 의미를 농민들에게 분명히 깨닫게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동학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동학란은 1894년 3월, 전봉준과 손화중이 함께 전라도 무장에서 4천여 농민군을 소집하고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4) 황해도의 동학

 

황해도에도 동학의 세력이 민중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봉기는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들은 1894년 10월 장연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동학도가 봉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10월 25일에는 해주성을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본격적으로 무력 봉기를 하게 된다.

더우기 황해도의 동학군에는 각촌에 산재해 있던 엽수(獵手) 800여명이 합세함으로써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해주 감영을 점령한 후 감사 정현석(鄭懸奭)과 판관 이동화(李同和) 및 중군(中軍)이하 관속들을 모두 잡아 결박하여 당아래 끌어 내리고 무수히 구타함으로써 평소의 분풀이를 하게 된다.

이 후 동학군은 11월 13일에는 송화와 평산을, 14일에는 장연과 신천을, 15일에는 옹진을, 17일에는 연안부를, 19일에는 은율군을, 21일에는 백천군을 각각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앞의 책. 156쪽.

 

기세등등한 황해도의 동학군은 이번에는 서학(西學)의 본거지인 소래교회를 진멸하기 위하여 위세를 떨치며 소래를 포위하고 점차 포위망을 좁혀 들어온다.

 

5) 동학란과 서경조

 

장연지역의 동학군은 기세가 매우 당당하였다. 그들은 과감히 장연읍을 습격하여 군기고를 탈취하고 총검으로 완전무장을 하니 그 일대는 삽시간에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저들의 기세가 날로 충천해지자 각 고을의 남자는 태반이나 동학도가 되었고, 약삭바른 사람들은 이중생활을 하여 평일에는 동학당에 가담하고 주일에는 교인의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경조가 인도하는 소래교회에서도 때마침 수 십명에서 수 백명으로 신도가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이같이 이중적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때 동학군이 소래의 서경조와 양인 매켄지를 처치하기 위하여 진격해 온다는 소문이 매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서경조도 이를 피부로 느끼며 매켄지와 피난 갈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동서남북 모두 동학군에 포위되어 있는 형편이어서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해주의 접주 해주포가 30리 밖까지 진격해 왔다는 소문이 날아들었다.

 

서경조는 용단을 내렸다.

 

생사를 주님께 맡기고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혈혈단신 동학의 진중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동학군의 우두머리 김원삼을 직접 만나 자신을 해치려는 이유에 대하여 따져 묻고, 변론을 전개한다. 동학의 많은 접주들은 그의 대담성에 간담이 녹았고 그의 웅변에 무릎을 꿇었다. 최후로 김원삼과 [東學大典]을 사이에 둔 변론으로 서경조는 동학과의 접전을 승리로 마무리짓는다.

 

이 후 김원삼은 "소래의 서경조와 매켄지를 극히 보호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퇴거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중교적을 가지고 시세를 관망하던 자들은 신실한 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불신 주민들도 교회를 찾게 되니 환난은 오히려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동학을 토벌하는 지방 군인들도 소래를 침범치 아니하였고, 특히 동학 토벌군의 본부 영장 노성학은 서경조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소래를 지나게 되면 오히려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뵙지도 못하고 강변으로 돌아가니 용서하라]는 서신을 보낼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이런 사건과 소문은 삽시간에 황해도 전역에 퍼졌고 소래는 일약 피난처로 각광을 받게 된다.

 

 

2. 동학란과 소래교회 (3)

 

6) 兒養淑氣

 

동학 당시의 상황을 서경조가 남긴 글을 통하여 직접 들어 본다.

"동학당이 또 니러나니라 이 해 겨을에 그 당이 대발하여 旗鼓와 銃劒을 가지고 장연읍을 치고 군긔를 탈취하며 方伯과 郡守를 사로잡고 무법한 셰샹이 되여 민간에 집곡 집젼과 륵도(저자주: 集穀 集錢 勒道)를 식힘으로 각 동에 남자난 태반이나 동학당이 된지라. 이때 내 집에 수십명이 모여 례배를 하난데 더러난 동학에 단니며 매쥬일 갓치 례배를 하난거시 좌우를 관망하난 모양이라. 이때는 동학의 셰력뿐이라. 숑쳔에 양인과 셔경조를 죽인다난 소리가 一日도 끝치지 아니하며 그 위험함을 견댈 수 업난지라. 김목사와 같치 피난할 방침을 의논하나 水陸간 十里를 피할대 업난지라. 一日은 김목사와 내가 죽기로 작졍한 후에는 두려옴 업시 담대히 젼도를 하니라. 一日은 해쥬 일포가 우리를 죽이려 온다난 소래가 부졀하더니 황혼에는 삼십리허에 왓다하난지라. 내가 한사람과 같치 등불을 들니고 마조 가미동에 가니 가미동은 숑쳔셔 十里되난대 황해도 내에 셰력이 만혼 大包라, 고로 호왈 감사포라. 괴슈쟈들과 내가 소친한지라. 뎌희들 모힌중에 드러가 인사후에 해쥬포가 나를 죽이려 온다하나 리유와 여려가지로 문답을 하니 뎌희가 니굴한지라. 괴슈쟈 김원삼이 東學大典이라 한 책을 내여놋코 날다려 보라하거늘 내가 일쟝반을 보고 덥퍼 노으니 웨 아니보고 본거슬 알겟나냐 하거늘 사람이 만든책을 사람이 아지 못하리오 하니 김원삼이 나 본책에셔 兒養淑氣 一句를 보이며 이 구졀을 알겟나뇨 하거늘 이때 나는 무심이 보앗스나 림시응변으로 뎌희들을 꺾그려고 생각하고 나난 알앗스니 몬져 貴解를 듯고져 하노라 하니 金이 모든 사람을 가라치며 뎌 사람들은 다 아지 못하되 나는 알앗스니 갓난 아희의 맑은 긔운을 그대로 기르라 난말이라 하거늘 내가 크게 웃고 이같치 무식하뇨 自古로 갓난 아희의 맑은 긔운을 그대로 기른쟈 누구뇨 셩인이 요순으로브터 공자에 니르러 능히 그러하뇨 사람이 능히 못할 글은 有不如無라하니 金이 그런즉 엇더케 해셕 하나뇨 내가 쳔쳔이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의 맑은 긔운을 갓난 아희 보양하듯 하라 난말이라 하니 金이 가만이 듯고 무릅흘 치며 과연 大先生이로다 天道하난 大先生이로다 하고 食物노 대졉하며 해쥬포는 념려말나 내가 중로에 사람을 보내여 불너오리라 하니 이 날 밤에 이 일은 쟝로 교회의 큰 관계라. 이튼날 린근 각동 졉쥬의게 지휘하야 숑쳔에셔 양인과 셔경조를 극히 보호하라 한지라 이튼날 내가 또 가미동을 가셔 죵일 담화하다가 셕양에 작별하고 나오니 괴슈 두 늙은 이가 들밧긔 젼송할새 내가 거러나오며 말하며 차차 인도하여 한 수풀머리에 서셔 두 늙은이의 소매를 급히 잡으며 이거시 웬일이오 무리를 만히 모흐며 막중 군고를 타파하며 군긔를 탈취하며 긔를 밧고 중북을 울니며 총검을 가지고 인민의 젼곡을 륵탈하니 쟝차 엇지할 모양이오 하니 두 늙은이가 十二月 夕陽 寒風에 젼신을 떨더니 내 말을 듯고 놀나난 빗츠로 왜양을 배척코져하노라 하거늘 내가 왜 척양하뇨 知彼知己라야 필승하나니 자긔도 不知어니와 知彼乎아 不知라 하거늘 내가 오합지졸이 가령 일만이라 하고 양일병 二十名이면 진멸하리라. 지금 일본병과 강화병이 임의 출발하여 각 요로를 막앗스니 釜中之魚라 멸문지화를 당할터이니 친한터에 안져 볼 수 업노라 하니 두 늙은이가 내 말을 듯고 얼골 빗이 누르려지며 내 손을 잡고 엇지 아나뇨 내가 신문을 보니 十日젼 일은 아노라 하니 두 늙은이가 그런즉 엇지하리오 동학의 일은 내가 생명으로 보호하리니 우리의 생명을 구하여 달나 하거늘 이는 내가 할 수 업난 일이오니 듯난대로 알게하여 줄터이니 치운대 드러가라 하고 도라오니라. 이튼날 김목사와 같치가셔 존경함을 만히 밧고 오니라. 차후로는 그 젼에 동학에 치명하고 례배에 참예하던 사람들도 동학에 가지안코 아조 밋기로 작뎡하며 동학에 참예아니하고 동졍만 보고 잇던 동중 사람들도 다 갓치와셔 례배하니 매쥬일 三四十名이되더라 이때 본군에셔 병대를 조직하야 동학을 토벌할새 각 동에 작폐가 불쇼한지라. 본 군슈와 교셥하야 근동에 동학에 참예 아니난 사람과 같치 례배하난 사람의 명하에 물침하라난 문권을 엇어주고 伯氏께셔 셔울 法部大臣 셔광범씨의게 각 사람 렬명한 완문을 내여 경병을 막게 하엿더니 본 군병대 영쟝 로셩학은 의쥬 사람으로 그 젼에 심양 라목사의게 셰례를 밧은 사람이오 날과도 친한 사람이라. 내게 편지하기를 병대를 거나리고 귀동에 드러가면 분요할가 하야 가, 뵈옵지 못하고 강변으로 도라 가오니 용셔하라 한지라.") 서경조. 앞의 책. 95-99쪽.

 

 

2. 동학란과 소래교회 (4)

 

7) 구명운동

 

동학란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였던 소래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후속조처도 원만하게 처리한다. 동학란 후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기선의 구명운동이다.

 

이기선은 동학의 거물로 해서지방을 총괄하는 도접주였다. 그는 흰다리(白橋里)에 살고 있었다. 매켄지는 이 사람과 수삼차 접촉하여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동학당의 도접주로 활약하였으나 동학이 패하자 주모자로 체포되어 장연읍에 구금되었고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때 서경조는 이씨 문중의 대표이자 그의 조카인 이승철을 대동하고 이기선의 구명을 위하여 장연군수 등을 만나면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형장에 끌려가 참형 직전에 있는 이기선을 극적으로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하여 이씨 문중은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이 때 신앙을 가지게 된 이승철은 목사가 되어 서경조목사의 대를 이어 소래교회의 제 2대 목사가 된다. 또 그의 장남 이진희는 소래교회의 장로로 소래교회에서 운영하는 해서제일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한다. 그의 3남 이용희씨는 광복 후 월남하여 흑석동교회의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었다.) 대구면지. 앞의 책. 140쪽.

 

이 사건은 동학란을 피하여 소래에 왔던 사람들과 황해도민들에게 큰 감화를 주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R. E. 스피어(Speer)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동학도들은 기독교를 반대하고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저들의 "반기독교, 반선교적 공작은 기독교에 대한 강한 충격을 주는 동시에 넓은 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을 뿐 이라고 하였고, 민경배교수는 "黃海道 西北部에서의 基督敎와 東學의 만남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人情으로, 돌아 설 곳이 없는 이들에게, 머물러 保命할 처소를 마련해 준 기독교, 獻身과 사랑으로 겨례와 함께 同行하는 血脈의 다짐"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8) 전화위복(轉禍爲福)

 

한국 근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고통 속에 신음하던 민초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었던 동학란은 정부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 진압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교회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고 예수의 품은 영원한 피난처가 되는 것을 민증들의 가슴 속 깊이 심어 주었다.

 

초창기 한국 교회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 신앙을 가지게 된 원인은 [영적인 요구]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변의 안전과 생명의 보전을 위하여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실은 선교사의 한 보고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수의 역도 (동학도)가 와서 기독교도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외국인이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지방관리들도 내가 그런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민경배(1983). "한국의 기독교와 그 민족교회의 성립"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숭전대학교 출판부. 248쪽

 

선택의 유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처음부터 영적인 갈망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경우보다 육신적인 일로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이런 대전제하에 동학란에서 얻은 교회의 소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교회는 민중의 도피성(逃避城) 역할을 잘 감당하여 많은 사람에게 평안을 보장해 주었고,

 

둘째, 서경조 등 소래교회의 지도자들은 위기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신자들 가슴에 심어 주었고,

 

셋째, 동학란 후에는 자신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구출함으로써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여 예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었고,

 

넷째, 각종 이기적인 동기로 교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교회는 저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잘 가르쳤고, 저들고 하여금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였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임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