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신학교로 성장한 평양신학교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Samuel A. Moffett), 리(이길함, Graham Lee), 언더우드(Horace G. Under- wood), 스왈른(소안론, W. L. Swallen), 베어드(배위량, W. B. Baird), 번하이셀(편하설, C. F. Bernheisel), 클락(곽안련, C. A. Clark), 헌트(한위렴, W. B. Hunt), 레이놀즈(이눌서, W. D. Reynolds), 게일(기일, James S. Gale), 그리고 엥겔(왕길지, George O. Engel) 등이었다. 특별히 이 중에서도 마포삼열, 소안론, 곽안련, 이길함, 그리고 이눌서 등은 평양신학교의 발전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눌서를 제외한 네 사람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미국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1925년 프린스톤 출신의 라부열 선교사에게 교장직을 물려줄 때까지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1년 초대 교장을 맡은 이래 1924년까지 무려 24년 간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양신학교를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신학교로 발전시켰다.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는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들은 그 해에 열린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출신별로 보면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4명은 평양, 한석진, 서경조 2명은 의주, 그리고 양전백은 구성 출신으로 평양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들 모두가 북부 출신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령별로는 서경조와 방기창이 58세로 가장 많았고, 한석진이 41세,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가 40세였고, 양전백이 39세로 가장 젊었다.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에 김필수, 이원민, 최충진, 윤식명, 장관선, 정기정, 최관흘, 김창성 등 8명이 졸업했다. 그리고 1910년 7월 15일에 거행된 졸업식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2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1907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4개의 장로교선교회는 평양신학교를 “長老敎會神學校”로 지정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한 후 그 해 6월까지 계속된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역자로서의 영적인 채비를 갖춘 십자가 군병이 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이들 신학생들은 평양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영적 무장을 갖추었는데,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그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1907년 이후 16명에서 33명의 신학생이 꾸준하게 졸업해 1916년까지 총 17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1915년에는 230명이 재학하고 있어서 평양신학교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회신학교”가 되었다. 1916년 현재, 신학교 재적생은 본과 187명, 후과 43명, 총 230명이었다. 신학교 교장 마포삼열이 1916년 신학세계에 기고한 “장로회신학교 약사”(長老會神學校 略史)에 의하면, “근년(近年)에 지(至)야 중학교(中學校)와 대학교(大學校)에 수학(修學)고 자격(資格)을 상당(相當)히 예비(豫備) 청년(靑年)이 다수(多數)히 입학(入學)”하여 신학교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학생들의 질도 놀랍게 향상되었다.
1916년, 졸업생을 배출한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많은 졸업생들이 각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갔고, 뒤 이어 1909년 졸업생 윤식명과 1912년 졸업생 최태진이 제주도 선교사에 합류했으며, 길선주와 양전백이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각각 한국에서 가장 큰 평양 장대현교회와 평안북도에서 가장 큰 선천의 선천읍교회를 9년 동안 담임하고 있었다. 한석진이 총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의 편집장에, 1909년 졸업생 김필수가 총회장에, 1912년 졸업생 박태로, 1913년 졸업생 사평순, 김영훈이 중국 산동 지방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10년 졸업생 최성주, 1911년 졸업생 김덕선과 차형준, 1913년 졸업생 김내범과 최봉석, 그리고 1914년 졸업생 한경위가 만주 한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고 있었으며, 1909년 졸업생 최관흘이 시베리아의 한인들을 위해, 그리고 1910년 졸업생 주공삼이 도쿄에서 한인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비록 졸업생 중 한 명이 목사 면직을 당했지만, 1916년까지 평양신학교 졸업생들은 국내 목회 현장이나 해외 선교 현장, 혹은 국내 여러 기관에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1908년 5월,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麥古黙, Mrs. Nettle Flower C. McCormick)의 지원으로 건축비 5,500달러에 달하는 신학교 교사가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의 넓은 대지(약 6,000평) 위에 착공되어 그 다음해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한식 2층으로 상층은 중앙에 기도실과 교수실이 있고 남쪽에 4학년 교실이, 북쪽에 5학년 교실이 각각 있고, 하층은 서쪽에 1, 2, 3학년 교실이 연접되어 있고, 동쪽에는 창고와 수위실이 각각 마련되어 있었다.” 교사의 동남쪽 언덕 위에 기숙사 여섯 동이 건축되었는데, 교사 남쪽 옆에는 맥코믹 여사가 보낸 기부금으로 두 채의 한식 건물 “맥코믹 기념 기숙사”를 건축했다. 그 외 남장로교에서 지은 언덕 위의 벽돌 2층집은 “알렉산더 기념 기숙사”, 그 뒤에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지은 한식집 2층 기숙사는 “마르다 기념 기숙사”,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회에서 지은 북편 길가의 기숙사는 “빅토리아 기념 기숙사”라 불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처음에는 주로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 1907년에는 북장로교의 로스(盧世永, Cyril Ross, 1868-1963), 샤프(史佑業, Charles E. Sharp, 1870-1952), 사이드보텀(謝普淡, Richard H. Sidebotham, 1874-1908), 헌트, 캐나다 장로교의 그리어슨(具禮善, Robert G. Grierson, 1868-1965), 그리고 남장로교의 전킨(全偉廉, William M. Junkin, 1865-1908)이 강의를 담당했고, 1909년에는 마펫, 리, 게일, 스왈른, 벨(裵裕祉, Eugene Bell, 1868-1925), 푸트(부두일, William R. Foote, 1869-1930), 맥커친(馬路德, Luther O. McCutchen, 1873-1960), 클락 등이 강의를 맡았다. 그러다가 1916년, 평양신학교는 6명의 정규 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를 확보하여 교수진을 확대 재편함으로써 신학교로서의 면모를 더욱 공고히 갖출 수 있었다. 나아가 1918년부터는 신학생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신학지남(神學指南)을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레이놀즈(Reynolds) 선교사의 책임 하에 성경사전(Bible Dictionary)도 간행했다. 1921년에는 5년 과정의 교과과정이 1년 2학기 총 3년 과정으로 개편되었고, 지도자 과정을 위해 6주 2년의 기독교 교육 과정도 개설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