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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배경으로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강서매일학교 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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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는 1910년 12월 29일 데라우찌 총독이 선천을 지나가는 기회를 타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며, 총독암살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선천에는 8,000명의 주민이 거주했는데 그 중의 반이 기독교인이었고, 선천 주변의 마을에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알프레드 샤록스(Alfred M. Sharrocks, 謝樂秀, ?-1919)가 지적한 것처럼 체포가 잇따라 일어나 “어떤 때는 한두 사람, 어떤 때는 한꺼번에 몇 사람씩, 그리고 지금은 드디어 우리 가까이에서 50명 이상이나 체포되었다.” 체포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왜 자신들이 체포되었는지, 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본당국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언론과 자신들의 신문들을 통해 언론을 조작해 총독을 죽이려는 전국 규모의 음모가 있었고, 미국 선교사들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을 항간에 퍼뜨렸다. 선교사들과 윤치호, 영기석, 유동설,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인 600여 명을 포함하여 700여 명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123명을 투옥시켰으며, 증거 조작을 통해 그 중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105인 사건”이다. 기소된 123명 가운데 98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이 중에는 10대 소년들도 있었다. 이들 98명의 교인 중에는 장로교인이 89명, 감리교인이 6명이었으며, 기타 교파가 2명이었다. 89명의 장로교인 가운데는 현직 목회자가 5명, 장로와 집사가 각 8명씩, 각 지교회 평신도 지도자가 10명, 입교인이 42명, 학습교인이 13명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89명의 장로교인 중에서 단 1명을 제외하고는 선천과 평양의 교회 출신들이었다는 점이다. 기소된 이들 123명 모두가 경찰 심문에서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다고 보도되었으나 검사 앞에서 그들 모두는 실제로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또 그런 음모를 알지도 못한다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검사가 무죄하다면 왜 경찰에게 그렇게 고백했느냐고 질문하자 “도저히 고문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들 중에는 검사 앞에서 시인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경찰이 조작한 자백서를 검사 앞에서 부인할 경우 경찰로부터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경은 온갖 고문을 가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총독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강제로 자백을 받아 냈고, 사건을 목격한 단 한 명의 증인도 채택하지 않고 강제로 받아 낸 자백만으로 재판을 강행했다.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열린 이 공판은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큰 공판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자백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경찰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재판이 시작되자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 같은 한 사람을 뺀 모든 피의자들이 격렬하게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저항하면서 고문을 견디지 못해 강요에 의해 자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젊은이 가운데는 “경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서 그들의 웃옷을 벗어 그들이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법정에 보여 주려고 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당국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당국은 이 사건을 “신문에 보도하지 못 하게” 했으나 모든 사람들은 이들 기소자들에게서 하나같이 “고문에 의해 자백을 받아 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실제로 이들이 심문 과정에서 받은 악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곤 했다. 감방은 특별히 더 추웠다. 몸은 얼어 죽을 지경으로 싸늘하게 식었다.” 105인의 피고 중 가장 나이 어린 선우훈(鮮于燻)의 수기에 의하면 심문과정에서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태극서관의 김근형(金根瀅)과 경주의 정희순(鄭希淳)은 악형을 받고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팔을 잃고 어떤 사람은 눈알을 뽑혀서 빈사상태에서 피를 토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졸도하고 음식도 주지 않으며, 물조차 주지 않으며, 잠도 재워 주지 않기 때문에 광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데라우찌가 정치를 하기 시작하자, 한국인 애국자와 크리스챤에게 큰 타격을 주기 위하여 서둘러서 터무니없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사건이라는 대사건을 조작하고 이것을 사실화할 목적으로 우리들을 심한 고문에 걸고 있는 것이다.
길선주 목사의 아들 길진형은 그때 받은 고문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일경은 그에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의주에 있었다고 혐의를 씌웠으나 그날 그는 대학에 있었다. 이 사실을 증언해 줄 두 명의 외국인 교수의 증언 기회조차 묵살하고 갖은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브라운이 지적한 것처럼 재판이 진행되면서 이들에 대한 “법원의 적대적이고 불공정한 태도는 점점 더 명백해졌다.” 외국 언론들의 보도도 접하는 선교사들은 국내의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내용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박해하기 위해 날조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원인도 모르고 기소된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그들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인단들 역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일제는 처음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이 사건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자 이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다.” 전혀 근거 없는 “환상적인 음모”(a fantastic plot)를 날조하여 선교사들마저 싸잡아 범인으로 매도하는 일제의 만행을 피부로 체험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강력하게 항변했다. 한 변호사는 이 사건의 허구성과 조작된 알리바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재판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판사님들은 기소장에 124명을 기소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123명만 있습니까? 당신들은 경찰에 자백했던 사람 중 하나가 총독을 죽이려고 기차 정거장에 갔다고 고백하던 그 시간에, 실제로 투옥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일제는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를 석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날조와 허구성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105명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1912년 7월 쯔가하라(塚原) 판사의 심리로 수많은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첫 공판이 열렸다. 이미 일제에 의해 매수된 105인 중 “김일준(金一俊)이 안태국과 이승훈의 지도 아래 메이지 44년(1911년) 12월 26일, 평양에서 1박을 하고, 27일 동지 16명을 인솔하고 정주로부터 오전 6시, 열차로 선천역에 도착하였다고 진술한 데 대하여, 안태국은 일어나서 세 가지 사실을 들어서 김일준의 진술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혔다.” :
1. 재판관은 즉시 27일 아침 6시, 정주역에서 선천역까지 16명분의 단체표를 팔았는가 여부를 조사할 것. 2. 그날은 동지 유동열이 치안유지법에 걸려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다가 만기가 되어 석방된 날이다. 나와 이승훈 외 8명의 동지가 그를 맞아서 명월관 지점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여기에 그 영수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가 어떤가 조사해 보라. 나와 이승훈은 그날 밤 서울에 있었는데, 유령이 선천에 갔는가. 3. 12월 27일부 광화문 우편국에서 평양 대동문 윤성운에게 “남강하거출영태국”이라는 전문을 보냈기 때문에 양쪽 우편국에서 조사해 보라.
안태국의 제안에 따라 재판은 휴정되었고, 쯔가하라 재판관이 안태국이 제시한 제안을 조사한 결과 그날 아침 6시 정주역 출발 선천행 차표 발매 수는 6매이고 종일 판매 총 수가 11매임이 판명되었고, 안태국이 제시한 2, 3의 알리바이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다시 일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알리바이 성립을 위한 증거서류가 미리 만들어 둔 조작된 허위서류이며, 60명이 기차편으로 정주에서 선천으로 간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갔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피고들의 명확한 알리바이와 증거 사실조차 거부하고 이들 모두에게 징역 5년에서 10년까지를 구형했다. 혐의를 받은 이들은 서울 고등재판소에 상소했고, 1912년 11월 26일부터 1913년 2월 25일까지 재판은 무려 51회에 걸쳐 열렸다. 이들은 굴하지 않고 법정 투쟁을 통해 이 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항변했지만 그래도 6명에게 징역이 내려졌다. 1913년 3월 20일, 경성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제 1심 판결문의 유죄 부문은 고등법원에서 파훼(破毁)되었다는 이유로 윤치호, 양기택, 이승훈, 안태국 등에게 각각 징역 6년, 왕관빈(王觀彬)을 징역 4년에 처한 것 외에 전원 무죄를 언도했다. 이것은 블레어 선교사가 지적한 대로 “일본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105인 사건이 처음부터 조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반정부 음모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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