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과 주권의 상실
러일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한일협정서를 통해 한국에서의 전권을 장악한 일본은 한국 내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한편 미국과 “가츠라-테프트”(Katsura-Taft)밀약을 체결했다. 1905년 7월 27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육군성 장군 테프트(W. H. Taft)와 일본 수상 가츠라(桂太郞) 사이에 맺어진 소위 가츠라-테프트밀약, 즉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협정서에 서명했다. 그 달 일본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중재로 러일간 포츠머스(Portsmouth, New Hampshire)조약을 맺어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특권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루즈벨트는 일본과 대립적 관계를 갖기보다 강국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정복한 강대국 일본과 동반자 관계를 통해 이미 확보한 기득권을 유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루즈벨트가 이에 앞서 1905년 3월 29일 한국의 입장에 서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 미국이 간섭하여 막아야 한다며 일본에 편향적 시각을 갖고 있던 주한 미국 전권공사 알렌(Horace Allen)의 직위를 갑자기 해임시켰던 것도 미국의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에 힘입어 일본은 이어 8월에 영국과 제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보호의 권리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영국으로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고 대신 인도에서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계산이 이면에 있었던 것이다. 강대국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선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러시아로부터 변동반도, 장춘, 여순 간의 철도를 양도받아 만주 침략의 기반을 닦는 한편, 러시아로부터 사할린 남반부를 할양받아 동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열국들과의 동맹조약과 포츠머스조약 이후 한국을 아예 자신들의 속국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이를 위해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송해 자신들이 만든 한일협약안을 한국이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일본군이 궁성을 포위하고 반대자가 일본 헌병에 연행된 가운데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제 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5가지 조항이 포함되었다:
첫째, 일본 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한국의 외교 관계 및 그 쌍무 일체를 감독, 지도하고 외국 재유의 한국민과 그 이익도 일본의 외교 대표자나 영사로 하여금 보호케 한다. 둘째, 한국과 타국 사이의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를 일본이 맡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성질을 띤 조약 혹은 약속을 맺지 못하도록 한다. 셋째, 일본 정부의 대표자로서 서울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자유로이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갖게 하고,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방에 통감 지휘 하에 이사관을 두게 한다. 넷째,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을 가진다. 다섯째,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조약 체결 이틀 전 고종은 헐버트(H. B. Hulbert)를 루즈벨트에게 특사로 보내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이러한 노력도, 일부 대신들의 저항도 일본이 미국과 결탁하고 일제의 총칼이“황제와 대신들을 폭력으로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앤드류 그라댄제프(Andrew J. Grajdanzev)가 근대 한국(Modern Korea)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은 일본 편에 서서 1882년에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제 한국은 일본의 총독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훗날 “총독부는 일본군의 철수와 더불어 곧 붕괴될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불과했지만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다.
라토렛이 일본의 발전(The Development of Japan)에서 말한 것처럼,“1905년 한국은 이론적으로는 아직 독립국이었다.”그러나 조지 매큔(George M. McCune)이 오늘날의 한국(Korea Today)에서 지적한 것처럼“그 후 한국은 일본 총독에 의해 식민지로 통치되었고,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이 기울여졌다.”실질적인 권한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 실제적으로 모든 실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자연히 일본의 한국 주권 강탈로 백성들의 배일감정은 극에 달했다. 1906년 한국을 방문한 매켄지에게 한 소년이“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선생님, 일본이 나의 조국을 강탈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단지 그 소년만의 고백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정서였다.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 전반에 대한 모든 전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6년 12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통감(統監)에 임명하고, 1907년 1월 31일에는 일본 공사관을 통감부(統監府)로 개편해 한국 통치를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1907년 5월에 이완용을 수반으로 한 내각을 조직하고, 2개월 뒤인 1907년(光武 11年) 7월 19일에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송한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에게 양위 조서를 내려 강제로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27일 황제즉위)시켰다. 1907년 7월 18일, 한국 황제의 퇴위가 발표되자 자강회 동우회, 기독교청년회의 회원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군중이 대시위 운동을 전개하여 새 왕궁인 경운궁의 대한문 앞에 꿇어앉아 통곡하면서 퇴위 반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집회를 해산시키려는 일본 경찰관과 충돌하여 몇 명이 살해되었고, 일본은 보병 51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점령했다. 고종황제의 양위를 반대한 박영효(朴泳孝), 이도재(李道宰), 남정철(南廷哲)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유배되거나 감금당했다. 일본은 그 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주재하기 시작한 뒤 외국 공관들이 행여 자신의 조선 통치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의 여러 외국 공사들을 서울에서 철수시켜 버렸다.
일본은 1905년 해양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지는 한국의 독도(獨島)를 아예 자신들의 조근현(鳥根縣)에 편입시켜 버렸다. 그리고 한국의 토지를 점유하기 위해 과거 지결제에서 등기제로 법제화시켜 일본의 한국 토지 매입을 용이하게 만들고, 그 이듬해에는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燈明規則)과 토지가옥저당규칙(土地家屋抵當規則)을 제정해 토지 매점을 보증해 주었다. 그 결과 3년도 되지 않아 1907년의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의 토지 소유자는 7,745명에 달했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 총면적만도 230,803,000평이었다. 이미 개항지에 개설된 일본인들의 수많은 상점과 그들의 무역의 기득권으로 조선은 정치적인 식민지뿐만 아니라 경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예속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일본인 이주정책을 추진해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의 관리, 상인, 농민, 고리대금업자, 심지어 낭인들까지 대거 조선으로 유입시켰다. 그 결과 1897년에 약 2만 명이던 일본인들이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던 그 해에는 무려 17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미 열국과의 조약을 통해 한국의 일본 통치를 인준 받은 일본은 아무런 국제적인 비난이나 저항 없이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고종은 미국에 있는 헐버트 선교사에게 비밀리에 서한을 보내 조약이 무효하다는 사실을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했지만, 이미 필리핀 지배를 볼모로 일본과 협약을 체결한 바라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고종은 헐버트의 지원을 받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회의의장인 러시아 대표를 비롯한 각국 대표들에게 호소했지만, 그것 역시 조선이 일본과 강제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정당한 조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외에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