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전세로 반 세겔을 받았을까'
반 세겔의 사회·종교적 함의
김동문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해마다 한 차례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성전세는 성전 화폐 기준으로 20세 이상 성인 남자들은 반 세겔을 바쳐야 했습니다. 성경(출 30:13)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들은 은 5.7 그램 정도를 내야 했습니다. 이 성전세는 원래는 유월절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방문징수도 했습니다. 이들을 반 세겔 받는 자라는 별명으로 언급합니다.
성경([마 17:24]은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세 납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찾은 베드로가 그 돈으로 자신과 예수님의 성전세를 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반 세겔의 화폐 가치는 두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환율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정환율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실물 가치를 지녔는지를 단정 짓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3년 전의 달러 가치와 지금의 달러 가치가 변하고 물가도 변한 것을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통상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동도 노동 나름이었고, 노동자 하루 품삯도 예루살렘 같은 도시와 지방 소도시, 농촌 등 지역별로 달랐다는 것과 시대별로 그 품삯의 경제 자치도 달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확하게 그것이 얼마 정도였는지 단순하게 규정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반 세겔에 그려진 독수리 신상
그런데 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세겔과 반 세겔의 돈이 지녔던 사회적·종교적 의미였습니다. 성전세용 세겔은 로마 정부에 국세를 내거나 지역 정부나 통치자에게 지방세를 내는 데 사용하던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전 유지 보수 관리 및 날마다 아침에 드리던 진설병(떡) 비용으로 충당되던 것입니다. 반 세겔 또는 세겔은 로마 정부나 지역 정부가 만든 돈이 아닙니다. 그 돈은 두로였습니다.
잠시 세겔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겔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면 이 돈이 지닌 사회학적 종교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 세겔은 대략 2센티미터 조금 더 되고 그 무게는 6그램이 넘습니다. 한 세겔은 대략 2.5센티미터 정도 크기에 12~14그램 안팎입니다. 이 돈에 그려진 인물은 두로의 신 말까르트로 로마식으로 표현하면 헤라클레스 신에 해당합니다. 독수리 신상은 당시 신들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세겔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십계명 가운데 1, 2계명에 어긋나는 돈이었습니다. 성전세를 위하여 제사장들은 돈을 새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들지 않고 이방 신상이 그려진 돈을 가져다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방 신상이 그려진 돈만을 성전세로 받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성전의 중요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신앙 상식이나 양심이 무너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은 이 돈을 성전세를 내는 유일한 돈으로 활용했습니다.
형식주의의 폐해와 해악 보여준 반 세겔
이 돈을 성전세로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단순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 돈의 무게입니다. 앞서 소개하였던 것처럼 출애굽기 30:13에 나오는 것과 같이,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성소의 세겔대로 10게라의 은을 바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10게라는 대략 6그램 안팎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제사장들은 당시 유통되던 돈 가운데 (물론 로마 정부가 만든 돈이 아니었지만) 6그램 안팎의 돈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두로에서 만든 말까르트가 그려진 반 세겔 또는 세겔이었습니다.
새로운 돈을 만들기보다 형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무게가 가장 근접했던 두로 은화 즉 반 세겔과 세겔을 성전세 용도로 공인한 것이었습니다. 1, 2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성전세 10게라의 무게를 드리는 것에 주목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형식주의가 가져오는 폐해와 해악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것만 같습니다. 성전세를 내면 그만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돈에 그려진 우상의 이미지는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 수단이 목적이 되고, 형식주의에 갇혀 본질을 잊고 살곤 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이도 드리기만 하면 축복을 보장하는 어떤 물질주의 행태가 떠오릅니다.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구약 시대의 어그러진 종교 현실의 재현이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는 오늘도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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