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주는 약속들
토마스 왓슨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성경은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잠28:14)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복 있는 삶이 약속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처신할 수 있으며 약속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다.(마7:12) 이런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셈인가? 지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해 실제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성도의 예복(禮服)이자 표이다.
옛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했다. 아브라함, 백부장 고넬료,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다(창22:12,행10:22,왕상18:3). 아무리 고귀한 도덕성을 갖추었더라도 쉽게 성도가 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성도가 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떨리는 손으로 천국 문을 두드렸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선택한 백성을 자신의 양으로 일컬으셨다(요10:27). 양은 두려워하는 본성을 지녔다.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방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지혜의 근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해서(잠3:15) 어떤 보석도 우리를 지혜만큼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욥28:28)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의 면류관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주의 깊게 성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인도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핀다. 그런 사람은 "영혼아 아무 이상이 없느냐? 승리하고 있느냐? 패배하고 있느냐? 아직도 약속을 처음 믿었을 때처럼 미성숙한 상태냐? 아니면 그동안 얼마나 자랐느냐? 은혜와 죄 가운데 어느 것이 너를 지배하느냐?" 라고 묻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영혼의 상태를 철저히 관리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없도록 주의한다. 그는 항상 마음으로 묵상하며 자신의 심령을 부지런히 살핀다.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시 77:6)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친밀하심(비밀)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시 25:14) 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어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있다. 그는 선택의 비밀과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기름부음을 이해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라는 말씀대로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시119:59)라는 말씀대로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혜는 주로 생각 안에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의 헛됨을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어진 세월의 짧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며 구원의 소중함을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혜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외인을 향하여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4:5)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친절한 태도를 갖게 한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혔던 것처럼 말이다. 경건은 공손한 예의를 취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행위를 자제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추문을 일으키거나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고후11:12)라는 말씀이 암시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면서도 자신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마음에 할례를 받을 수 있고 신중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위험을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장차 다가올 그분의 진노를 모면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참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천국행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징표이다.
지식이 있는가? 사탄도 마찬가지다. 신앙고백을 하는가? 사탄도 그렇다. 사탄은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 자녀가 아버지를 대하는 경외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사탄을 능가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천국백성이라는 징표이다.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우리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37;22).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신다. ‘여호와’의 히브리어 어원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영원성과 독립성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눈부신 용모'로 위엄을 드러내신다. 욥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깜짝 놀라며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위엄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뢰와 같은 소리로 자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수여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탁월한 성품'으로 위엄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거룩하심, 권능, 정의와 같은 성품을 통해서 신성한 본성을 빛처럼 뿜어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통해서도 위엄을 드러내신다. 다윗은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 하리이다."(시145:5)라고 말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낸다. 우리는 태양 안에서 이글거리며 별들 안에서 반짝이는 하나님의 위엄을 본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40:15)"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욥41:19) 하마와 악어도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위엄은 교만한 자들을 겸손하게 만드시는 능력을 통해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풀을 먹게 하시고 들짐승과 같게 만드셨다.
이런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셈인가?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시76:12) 하나님의 위엄은 두려운 위엄이다. 장차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두려움으로 대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죽음이 정복되고 양심이 깨어나며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을 빌려 "너희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렘5:22)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정의를 두려워해야만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생각해야만 장차 천국에서 그 분을 경외하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좇는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거룩하고 은혜롭고 공경심이 가득한 두려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지극한 아름다움은 천국에 가득 넘치는 사랑과 기쁨의 원천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우실 뿐 아니라 위엄이 있으시다. 이 때문에 하늘의 성도들은 그분을 숭앙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잠19:23) 이 생명은 육신의 삶을 말한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잠10:27)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본래 사는 날 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시91:16) 라는 말씀대로 장수는 하나님의 복이다. 장수의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있다. 죄는 생명을 단축시킨다.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학대하고 원기를 낭비함으로써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수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신6:24)
또한 이 생명은 영적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우리를 생명 즉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생명은 달콤하고 영생은 더 더욱 달콤하다. 어거스틴은 "진정한 생명은 곧 영생이다"라고 말했다. 가장 복된 생명은 다하지 않는 삶 즉 항상 주와 함께 있는 삶이다.(살전4:17) 영광의 등불이 항상 꺼지지 않고 환히 비추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영생 즉 하나님과 천사들과 영원히 함께 누리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완전한 만족을 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19:23)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만족이 없다. 그런 사람은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따르며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무엇인가 빠진듯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창고가 가득해도 마음에 안식이 없다. 달콤한 쾌락의 물은 갈증을 달래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갈급하게 만든다. 로마황제 세베루스는 "나는 세상의 모든 쾌락과 영광을 누려봤지만 단 한 번도 온전한 만족을 얻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만족한 삶을 누린다. 그의 영혼에는 은혜가 충만하고 그의 양심에는 평화가 가득하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허락하실 때 "주님 이제 충분합니다. 주님의 종인 저는 질그릇이오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일시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항상 만족을 느낀다. 참된 만족은 결코 다함이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죽을 때에도 편안히 눈을 감고 죽은 뒤에는 면류관을 얻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적은 소유에도 만족한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유가 적더라도 신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기 때문이다. 적은 소유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니 부족함이 없고 만족스럽기만 하다. 다니엘은 마음에 만족이 있는 가운데 채식을 했더니 육식을 한 사람보다 더 윤택해 보였다. 아울러 적은 것은 더 많은 것의 약속이다. 항아리에 담긴 적은 양의 기름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지극한 기쁨과 복의 보증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적은 소유가 깨끗하지 못한 많은 부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다. 나사로의 빵 조각이 부자의 만찬보다 낫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안전함을 보장한다. 참 신자는 해를 당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그를 해치지 못한다. 그에게서 돈을 빼앗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절대로 빼앗을 수 없는 보화가 있다.(사33: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33:6) 감옥에 가두어도 그의 양심은 자유롭고 목숨을 빼앗아도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두른 사람은 총탄을 맞더라도 뚫리지 않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형통함을 보장받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 건강과 재물이 그를 이롭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것들을 베풀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복에 이바지 하도록 만사를 다스리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이가 잘 될 것이요"(전8:12) 라고 성경은 약속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세상에서도 형통한 삶을 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정결한 삶을 살게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다.(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시19:9)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맑고 찬란하며 마음과 삶을 깨끗하게 만든다. 샘물이 더러운 흙을 씻어내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는 그에게서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깨끗이 없애준다.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경외심은 마음의 성전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깨끗이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자가 되게 해준다.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5)라고 말했다. 바울도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바울의 인생 목표였기 때문이다. 경외심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제물을 바쳐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암5:21-22)라고 말씀하신다. 그릇된 마음으로 건네는 선물을 기뻐하면서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영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엄숙하기만 하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오히려 큰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경외심은 위로의 태양을 안내하는 새벽 별과도 같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경외심은 항구적인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외콜람파디우스는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햇빛이 성가시냐는 질문을 받자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면서 "나는 이곳에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소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기쁨을 누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육신의 두려움을 내쫓는다. 육신의 두려움은 경건한 삶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경외심은 두려움을 내어좇고 용기를 심어준다. 어떤 역본성경은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출18:21)라는 말씀에서 "재덕이 겸전한 자"를 "용기 있는 자"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육신의 두려움이 없다. 콘스탄티노플의 황후 유독시아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그는 "나는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황후에게 전하시오"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모세의 지팡이가 애굽 술사들의 지팡이를 모두 삼켜버렸듯이 육신의 두려움을 모두 삼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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