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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지식창고지기 2012. 1. 18. 09:58

야고보서 강해



섬길수록 더 귀하게 보이는 주님(약1:1)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믿음을 강조하다가 실수 한 마디 한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는 행위와 더불어 로마서 이상으로 강한 믿음을 피력한 성경책이다. 1절을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란 말이 나온다.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서신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종이라고 한 것과 야고보가 종이라고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완전히 남이다. 그러므로 큰 은혜를 입고 "당신의 나의 주입니다"라는 고백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오랜 기간 같이 한 집에서 죽 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형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형님이신 예수님보고 "당신은 나의 주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야고보는 참된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겸손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본성상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가까운 사람을 더 존중하고 더 조심스럽게 대하려는 자세가 참된 성도의 자세이고, 그러한 자세를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알면 알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태생적으로 함부로 행동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등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들은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조절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처도 덜 받고, 사는 데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말에 "사람은 멀리서 봐야 한다"는 속담이 생겨나게 되었다. 가까이 하면 나쁜 점만 드러나는 데 그렇게 하면 이익 될 것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그 속담은 결코 옳은 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 사람과 오래 사귈수록 더 좋은데..."라는 말이 나와야 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더 좋은데..."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인격이 되어야 참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있는 뭔가 잘못된 부분을 감추려고 하는 성향 속에 "사람은 멀리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면 그 속담은 분명 우리의 삶의 지표로 삶아야 할 바람직한 속담이 아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기 형님이신 예수님의 일상적인 삶을 거의 보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그 형님에게 "나의 주, 나는 종"이라는 고백을 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 유추해 볼 때 예수님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2가지 덕목은 "야고보의 눈"이다. "야고보의 눈"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보화를 발견하는 눈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삶"은 알면 알수록 더욱 존경스럽게 비춰지는 삶이다. "야고보의 눈"과 "예수님의 삶"이 구비되어 있나요? 우리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 주님이 더 귀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귀하기에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귀하게 보이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야고보의 눈"을 가진 분들이다. 또한 우리 주님을 가까이 하고 섬길수록 더욱 귀하게 여기지기에 살아가면서 주님의 삶을 닮고 싶은 거룩한 열망이 더욱 생기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삶"을 가진 분들이다. 야고보의 눈과 예수님의 삶이 겸비될 수만 있다면 이 땅에서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는 자가 될 것이다.



시험을 기뻐하고 환영하라(약1:2-4)

야고보는 첫 주제로 시험을 언급. 성도의 시험은 담임목사를 가장 떨리게 하는 주제요,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이요,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였으므로 서신에서 시험의 문제를 제일 처음 논한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다.

"시험이 없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시험은 온다". 예수께서도 시험 당하셨다는 사실을 보면 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면 시험 당하지 않을 줄로 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에 시험을 당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높고 큰 사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큰 시험 당할 가능성이 많다. 기도를 많이 하면 어떻게 되는가?

기도하면 시험을 당하지 않는 시험 면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 시험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러면 시험을 당해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시험을 당한다"는 것과 "시험에 든다"는 것을 구분하라. 누구나 시험을 당한다. 기도 많이 해도 시험을 당한다. 누구나 시험에 들지는 않는다. 기도하면 시험에 들지 않는다. 성령이 충만하면 시험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나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시험이 없다는 말도 틀린 말이다.

누구에게나 시험은 있다. 그러면 시험을 맞이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고보는 그에 대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 여기서 "여기라"는 말의 뜻은 시험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시험을 기뻐하며 환영하라는 말이다. 왜 시험을 기뻐하고 환영해야 하는가?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 뻔한 결과란 "성도의 최종 승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바르게 기도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그 뻔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은 별 것 아니다. 뻔한 결과를 뻔하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말씀대로 온전히 기뻐하면 그 뻔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 법은 없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아버지가 이겼는데 왜 아들이 그렇게 걱정이 많은가? 욥이 시험을 당할 때의 신앙고백.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주님이 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는가? 주님이 단련하신다고 한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안심하고 마음을 푹 놓으라.

정금 같이 되어 나오는 축복을 받을 준비만을 하시기를 바란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3)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은 시련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앎이라!는 그것이 신앙의 기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르느냐는 말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을 알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 "인내하라"가 아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권면을 하는데, 그 말은 인내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 구비, 만족" 라는 여러 가지 귀한 것을 주신다. 인격을 아름답게 빚는 영적 화장품은 바로 우리로부터 나오는 인내다. 인내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바로 믿음의 시련이다. 영적 화장을 잘 해서 언제나 아름다운 성도로 드러나 보이자.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라(약1:5-8)

야고보는 시험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기도에 관해 언급한다. 교회생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관심사를 "기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없는 신앙생활은 의미가 없다. 기도해야 우리의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 3중 구조.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원리.

1. 지혜를 구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가장 높은 기도가 지혜를 구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시련을 만났을 때 시련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 그렇다면 도대체 지혜란 무엇인가? 1)듣는 것이다. 하나님께 말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라. 2)선악을 분별하는 것. 왕상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참으로 중요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과 직결된다. 3)부엉이의 눈과 같은 것.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휘하는 것이 지혜. 4)날을 계수하는 것.(시90편) "날을 계수한다"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2. 누구에게 구해야 하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1)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란 말. 우리 하나님은 하나를 달라고 하면 열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다. 다만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안 주시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달라는 대로 다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돈만 버린다면 몰라도 자식까지 망치게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나? 그러나 이 다음에 훌륭한 인격으로 준비된 다음에는 다 준다. 하나님은 사려 깊은 분이기에 준비가 된 심령에게만 주시는 분이시다. 2) 하나님은 "후히 주시면서도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다. 사람은 주면서 정죄와 책망의 눈초리를 하면서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받는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주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도와주면서 그렇게 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죄는 아닐 것이나 인간의 연약함이 일부분 표출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는 손길 속에 "자랑하는 마음과 책망하는 눈길"을 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처럼 후히 주시되 꾸짖지 아니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3.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풀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6-8) 믿음으로 구해야 하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고 후의 일을 생각하는 것. 그러면 절대로 그 추구하는 것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만들 수 없다. 결혼할 때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 사업을 할 때 신중히 결정하고 한번 결정했으면 사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다 안되면 다른 것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면 그 사업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두 마음을 품고 항상 탈출구를 염두에 두면 되는 것이 없다.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은 안된다. 믿음의 비약이 필요하다. 일단 맡기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길을 찾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길을 주신다.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미리부터 하면 되는 일이 없다. 그저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 정도로는 결코 인생의 작품이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 일직선으로 온다.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자에게 진정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이다.



남는 것은 그리스도뿐(약1:9-11)

야고보가 오랜 목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중요한 것들은 '시험', '기도', '가치관'의 문제. 그래서 가치관의 문제를 지적.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가치관은 낮은 형제는 낮다고 상처를 부여잡고 살고, 높은 형제는 부하다고 과시하며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거꾸로 보아야 하고, 거꾸로 살아야 한다. 없어도 낙심하지 않고, 있어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좋은 환경에서만 '좋다'라고 말할뿐 아니라 나쁜 환경에서도 '좋다'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가치관은 1)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2) 정신적이고 영적인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 것이다. 3) 순간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보는 미래지향적 가치관이다. 4) 자기 중심적인 것보다는 이타적이고 봉사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왜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할까요?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10하) 인생은 풀의 꽃과 같다. 이것은 히브리적 세계관이다. 이것만 알아도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철학이 별것 아니다. 인생의 허무와 허망을 아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을 인간의 학문 중에서 왜 최고의 학문으로 여기는 것은 교만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허무성을 알게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보다 한 차원 더 높은 학문은 바로 신학이다. 참다운 신학은 인생이 허무하지만 하나님은 허무하지 않다는 것, 인생은 허망하지만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본문을 보면서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설령 다른 것이 있다고 해도 아주 작은 것으로 알고 그 정도 차이는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는 과정은 조금 달라도 마지막 가는 길이 같은 사실을 극대화하여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다. 그러한 세계관을 가질 때 얻어지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9,10) 이 구절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랑'이다. 사람은 자랑거리가 있어야 한다. 삶 자체를 쓸데없다고 하면서 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자랑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교만이 아니다. 교만과 긍지는 별개의 것이다. 가난해도 긍지가 있어야 하고, 부해도 교만이 없어야 한다. 물질은 없어도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은 많은데 마음이 거지와 다름없는 분이 있다. 반면에 부해도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꽃과 같은 것이다. 다 떨어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안달하지 않고 아주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 또한 대수롭지 않은 일에 죽네 사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두고 봐야 안다. 부한 자는 낮아짐을, 낮은 자는 높아짐을 자랑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므로 주안에서 같은 가치관, 자랑, 종말론적 신앙, 기쁨을 향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그리스도 뿐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뿐이다. 여기에 새로운 세계관이 있고 새로운 가치관이 있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기에 주는 시련이다(약1:12)

누가 복 있는 사람일까요? 대개 사람의 불행은 재물을 복으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성경적 복은 물질적인 복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삶의 지경이 넓혀지고, 시야가 넓혀지는 것이 성경적 복이며,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과 사람을 주시는 것도 성경적 복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구절에서처럼 새로운 개념의 복도 있다. 본문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복에 대한 혁명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복 있는 사람에게도 시험은 온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는 것 자체가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 시험을 참는 것이 복일까요? 미래에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한 전제를 배경으로 생각하고 시험을 복의 바로미터로 본다면 야고보는 냉철하게 시험이 없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은 그 순간에 우리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험을 잘 치루기를 사랑과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성원하실 것이다. 그처럼 성원하시는 하나님께 조금 어렵다고 원망이 웬 말인가? 혹시 시험 중에 있는가? 그때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와서 성원하고 있음을 믿으라. 만약 그렇다면 시험이 복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시험이 없는 자보다 시험이 있는 자가 복 있는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시험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는 마귀가 시험을 걸지 않는다. 가망이 없는 자에게도 마귀가 대들지 않는다. 싸움도 서로 상대가 되어야 싸움이 되듯이 시험도 시험 걸만한 인생이라야 건다. 끝난 인생, 다된 인생한테 무슨 시험을 걸겠는가? 마귀도 그런 인생을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괜히 자극하면 오히려 삶의 투지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간접 증거다. 그러므로 시험이 있음은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2.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소극적으로 무작정 당하면 슬픈 일이지만 적극적으로 참는 것이라면 성숙한 삶의 지혜가 생긴다. 여기서 '참는'으로 번역된 헬라 말은 '휘포메노'라고 한다. '휘포'는 '밑에'라는 뜻이고, '메노'는 '머문다'라는 뜻이다. 즉 참는다는 말은 "밑에 머문다!"는 말로 능동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시험을 당한다'라기보다는 '시험을 참는다'라는 뜻이 있다. 즉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자세를 말한다. 시험이 있을 때 아이고 망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는 순간에 그 의미를 깨닫고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반응하면 믿음, 사랑, 소망, 지혜, 용기같은 소중한 것들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시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하나의 뚜렷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대개 부모들의 잔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사랑에서 오는 잔소리라고 생각할 때 괜찮다. 그러므로 사랑이 개입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기의 기분 나쁜 것을 자녀들에게 잔소리로 푸는 것이나 자기의 야망을 자녀들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잔소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느낌이 자녀에게 들면 그 잔소리 및 징계는 부작용을 낳는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시련인 경우가 많다. 시련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닌 '참 소리'로 그 안에 사랑의 메시지가 있다. 그래서 저는 상담을 오는 사람에게 결론적으로 항상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주는 시련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시련이 가벼워진다. 시련을 죄와 연관시키거나, 저주와 심판으로 생각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시련은 더욱 무거워진다. 시련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대개 사람들은 아름답고 편하게 사랑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 받을 수도 있지만 시련으로 사랑 받는 순간도 있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시험을 쳐야 학생들에게 발전이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을 통해서도 충분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억지로 골탕먹이려고 자주 시험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 시험에 우리가 합격하면 시험치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잘 준비해서 시험을 아름답게 극복하기를 원해야 한다. 준비하고 좋은 점수 받지 못하면 또 시험을 칠 수밖에 없다. 시험이 없을 수 없기에 시험이 없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시험을 줄일 수 있기에 시험을 줄이려고 애써야 한다. 시험을 줄이는 데에는 시험을 대하는 나의 신앙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시험은 교훈적인 의미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시험을 통해 잘 교훈 받으면 그 시험은 다음에 면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험을 잘 치루는 지혜를 구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시험을 참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누가 시험을 참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믿는 자가 참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믿게 하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이해가 필요하다. 성숙한 사람이라야 시험을 복으로 소화할 수 있다. 유치한 사람은 그저 돈 보따리나 굴러와야 복인 줄 안다. 또 그런 사람은 손해를 입으면 그것이 저주인 줄 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시야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시험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이 축복과 은사를 믿게 된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여기에서 '인정받는다'는 말의 헬라어는 '도키모스'다. 그 말은 훈련을 통해 순도가 높아졌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시험에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페이라조'의 시험이다. 이 시험은 본인의 죄와 허물로 당하는 시험으로 회개해야 한다. 또 하나는 '도키마조'의 시험이다. 이 시험은 단련을 위한 시험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본문에서 나오는 시험은 바로 '도키마조'의 시험이다. 즉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우리의 신앙 순도를 높이기 위한 시험이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시켜 나간다. 그래서 때때로 시험을 허락하여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버리게 하신다. 잘못인 것을 알고 미적거릴 때 하나님은 기어이 시험을 통해 끊게 하신다.

시험이라는 것을 통해 그처럼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히게 하니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시험과 사건을 통하여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수준을 높이신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을 격상시키신다. 그리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그러므로 시험을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지 마시고, 신앙이 약해졌거나 나약해졌기 때문에 당한다고 생각지 마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에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지 마라. 시험을 믿음으로 참고 기쁨으로 견딜 때 신앙이 자라고, 인격이 자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이 되고 마침내 천국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왜 시험이 찾아올까요?(약1:13-15)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시험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태도가 흔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부부싸움을 해도 그렇다. 자기야 본래 좋은 사람인데 당신하고 살면서 나빠졌다고 하며

그 나빠진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탓일 수 있겠는가? "가정을 좀 먹는 네 가지 탓"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즉 남편 탓, 아내 탓, 부모 탓, 자식 탓을 하지 마라. 그렇게 하다 보면 탓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고약한 사람이 된다. 내 탓은 죄를 끊는 동기부여를 하지만 남 탓은 나의 죄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2.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그 잘못된 일이 정말 환경 때문에 생겨난 일일까요? 아니다. 환경은 큰 이유가 아니다.

지난 다음에 생각해 보라. 진정 그 길밖에 없었는가?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환경 탓이 아니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가난하면 도적질을 해도 되는가? 화나면 살인을 해도 되는가? 안 되는 것이다. 환경 탓이라면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3.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나만 그런가?"라고 하면서 다 그렇다고 보편화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내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죄는 내 죄이고, 자기 잘못은 자기 책임이다.

4.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기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깜빡 실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실수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실수할 수 있는 씨앗이 이미 자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언젠가 연세대학교 앞 공중전화 부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통화를 간단히 하라고 하던 아주머니를 전화하던 청년이 발끈하여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청년 이야기가 한심하다. 자기는 자라면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순간에 자기가 왜 그랬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순간적인 실수였을까요? 아니다. 이미 자기 속에 오랫동안 누적된 욕구불만이 있었다. 그 누적된 것이 그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다.

5.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고 하며 은근히 책임의 초점을 흐려버린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단단히 결심했다면 그 사건에서 충분히 시험을 이길 수 있었다. 우리는 시험을 충분히 이길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해 자기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지 애초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6. 자기 책임을 항상 마귀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마귀가 중간에 장난해서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가장 고약한 태도이고, 가장 무책임한 태도다. 설사 마귀가 중간에 장난을 했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과 의지를 통해 벌어진 일은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7. 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가 될 줄 몰랐다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미숙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일곱 가지 태도는 자신이 자신을 과보호하려는 태도다. 어린아이들을 과보호하면 버릇이 나빠지듯이 자신을 과보호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쁜 태도가 체질화된다. 그러면 문제 해결은 요원해지고 시험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잘못을 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할 때 남을 나를 보호해 주는 역사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내 탓이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고. 축복된 자리를 향한 위대한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본문은 시험이라는 문제를 통해 그 사실을 도전해 주고 있다. 왜 사람에게 시험이 찾아올까요? 본문에서 야고보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다. "왜 시험이 올까요?"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무엇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지, 혹은 시험이 어느 길로 오는지를 알아야 시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보다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야고보는 시험의 근본 원인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4) 원인은 세상이 아니다. 환경도 아니다. 원인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시험은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내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내가 영적으로 부족해서..."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런데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원망의 자리"로 가게 된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것을 대단히 큰 죄로 여기신다. 왜냐하면 원망이란 기본적으로 마음의 간사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원망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망하는 사람을 보면 진실한 삶의 모습을 그릴 수가 없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하와를 대하는 아담의 모습을 보라. 일이 잘될 때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더니 일이 잘못되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저 여자가"라고 나온다. 그렇게 여자 탓을 하다가 나중에는 여자를 주신 하나님에게까지 원망을 돌린다. 이처럼 원망은 자꾸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처음에는 남 탓, 환경 탓이요, 좀더 나아가면 조상 탓이요, 마침내는 하나님 탓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원망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된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하는 죄를 지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내 책임을 항상 먼저 생각하고 슬기롭게 어려운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시험과 유혹 앞에서 취할 태도(약1:13-15)

시험의 원인은 자기 때문이고, 부족해서다. 시험과 유혹에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할까요?

1.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13) 시험을 받을 때에 왜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 하나요?

그와 같은 불평과 원망이 참된 회개를 막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회개보다는 형벌을 피할 생각을 더 많이 가진다. 그러나 기꺼이 벌을 받으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기꺼이 벌을 받으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벌을 덜 내리신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면서 놀라운 비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시험과 야단을 덜 맞는 비결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무조건 내맡기는 것이다. "주님! 주님 뜻대로 저를 요리하옵소서!" 탕자가 돌아올 때 그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할 것인지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하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무 조건이 없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면서도 조건, 이유, 변명이 많다. 그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진실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서는 안된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이 옳습니다. 원인은 저의 욕심에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옳습니다. 저를 때리신 것도, 저를 실패하게 하신 것도 잘 하신 일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것이 바로 회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이러한 회개다.

2. 남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14) 다윗은 밧세바 사건이 드러나자 그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철저히 회개했다. 왕의 권위를 가지고 "저 요사한 계집이 유혹해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했다. 아무리 엄청난 죄를 짓고 그 죄가 드러나도

남에게 그 죄를 돌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의 책임까지 지지는 못할망정 내 책임까지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된다. 얼마 전의 미국 대통령 클린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왜 클린턴이 자신의 그 부끄러운 성벽을 끊지 못하고 있는가? 그가 교회는 다니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험이 찾아오거든 깨끗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해야 미래의 삶이 보다 소망적인 삶이 될 것이다.

3. 죄가 장성하지 못하도록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15) 죄가 장성하게 되면 나중에 빠져 나올 길은 점점 좁아진다. 그러므로 죄가 장성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차단하려고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죄를 이길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 길을 출발해 보시오. 가끔 유혹이 오는 것은 어떻게 막기가 힘들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최대한 막으려고 해야 한다. 도벽이 있는 사람들은 몇천 원을 도둑질하고 수년간 감옥에 갔다 온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인다. 그것을 어떻게 끊는 것은 힘든 일이나 방법이 있다.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은 기도라는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진실한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을 때 우리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바른 신관을 꼭 붙잡으십시오(약 1:16-18)

무시로 당하는 그 숱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이 선물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가 정말 중요한 문제다. 신앙생활의 든든한 기초는 하나님의 행하심보다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있다.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에 관심이 많다.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반대 방향으로 일을 하실 때 시험에 들고 믿음이 쉽게 흔들릴 가능성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사람들은 철든 신자가 된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해 달라!"고 하다 철이 들면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며 달라고만 하지 않는다. 철이 든 신자는 하나님의 어떤 분이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아도 시험에 들지 않는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른 신앙고백이 있을 때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다. 시험의 뜻도 알 수 있고 시험의 결과도 환히 내다볼 수 있다. 야고보의 신관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다!" 이것만이라도 분명히 알면 시험을 이기는데 문제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생관이 아니고 신관이다. 신앙고백이야말로 모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토대가 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6)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속지 말라.

1. 괴롭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속기 쉽다. 그때 사단이 미끼를 던진다. "네 죄가 많아서 그래..." 회개하기 위해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가 이런 잘못을 저질러서 하나님이 나를 치신다"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빠지는 양심에 대해서는 흔히 '사단의 양심'이라고 부른다. 사단은 하나님을 '잔인하신 하나님'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에 그와 같은 '사단의 양심'을 자꾸 집어넣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양심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도 부족한 시간에 사단의 양심을 가지고 불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면 되겠는가? 그처럼 사단이 양심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너무 깊이 빠지지 마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대로 치시면 남아 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야말로 허물대로 치지 않는 가장 확실한 증거.

2. 욕심에 이끌리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속임을 당하게 된다. 욕심이 있을 때 사단이 다가와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런 사단의 수단에 넘어가면 급기야 하나님이 인색해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잘해주시면서 나에게만 못해주시는 것만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웃어주시면서 나에게는 눈을 흘기시는 하나님 같다. 자신에게는 나쁜 하나님이고, 섭섭하게 하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다.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렇게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자주 떨어지는 것은 기복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축복도 모자란다. 기도하는 것도 '주세요'가 주제다. 이런 욕심 끝에 결국 원망과 불평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관이 빗나가게 된다.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이 남는다. 생각할수록 분하기만 하다. 욕심 많은 기복주의자가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상처가 많고 삶의 기복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귀의 장난에 속지 말라. 바른 신관을 갖고, 그 신관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다. 축복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축복을 판단하자.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약1:6-18)

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바른 신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1.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기에 기도가 되고 마음이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선물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주신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부모와 자식간의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부모님께 받은 것이 많다. 효를 아는 사람은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철이 든다. 그러나 못된 사람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하고 부모님에 대해 원망을 한다.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는 받은 것만 있고 남에게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겸손이 체질화된 사람은 남에게 해 준 것은 별로 기억하지 않고 받은 것은 오래 기억한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남에게 준 것만 있고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만이 체질화된 사람은 받은 사실은 금방 잊어 먹고 준 사실만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래서 "나에게 왜 이렇게 주지 않느냐?"라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 신세를 많이 진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늘로부터 땅으로부터 다 받은 것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신다. 즉 똑같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평범한 원리나 이 평범한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남과 똑같은 것을 받지 못했을 때는 불만을 품게 된다. 그 불만과 불평이 자기가 받은 것을 잊어먹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각양각색이다. 은사는 각양이기에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남과 다른 것을 받은 것이다. 내가 남과 다른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내가 가진 것의 의미와 소중함을 알게 된다. 9가지 은사를 다 받고 그에 합당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한 가지 은사만 잘 개발해도 그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일생 내내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7)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어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때가 되면 한번 선택했기에 하나님은 언젠가는 꼭 회복시켜 주신다. 하물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저버리시겠는가?

3.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흔히 야고보서는 은혜는 없고 행위만 얘기하는 서신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해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하)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강력히 피력한 말씀이 어디 있는가? 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는가?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라고. 첫 열매가 무엇이며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구약을 보면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이 그 말씀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첫 열매가 중요한 것이다. 먼저 믿는 사람이 나중 믿는 사람의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 믿는 사람은 그를 인도한 사람만큼 밖에 못 믿는다. 물은 수위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도한 사람이 낮 예배만 나오면 인도 받은 사람도 낮 예배만 나온다. 인도한 사람이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인도 받은 사람도 새벽을 지킨다. 인도한 사람이 교회에 한 달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면 인도 받은 그 사람도 한 달에 한번 정도 나오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그 사실을 안다면 소중한 첫 열매가 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돈이 없어서 시험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인간관계가 잘못되어서 넘어지는 것도 아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대개 신관이 잘못되어서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소중하게 지켜 가시기를 바란다.



빛깔 있는 언어생활을 하자(약1:19-22)

야고보는 목회자로서 1-18절까지 네 가지 문제에 대해 가르쳤다. 그것은 시험의 문제, 기도의 문제, 가치관의 문제, 신관의 문제다. 본문부터는 신앙생활에서 구체적인 실천의 원리를 가르친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말에 관한 원리다. 말은 인생의 성공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리고 말은 신앙생활의 성공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또한 말은 인격과 인간관계를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말공부다. 말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많이 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 야고보의 주의사항 1조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이 금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침묵만 하면 될까요? 아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문제해결 자세다. 침묵이 항상 금만은 아니다. 정말 필요한 말을 할 때는 해야지 우리가 소극적으로 살아서 되겠는가? 말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침묵이 금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을 가지고 정말로 해야 할 좋은 말, 사랑의 말까지 닫아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필요한 경우에는 적절하게 사랑과 격려가 담긴 말을 하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사회는 풍요롭게 되고 인생이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말을 해야 하나 지혜롭고 빛깔 나게 해야 한다.

지혜롭고 빛깔 나는 언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가르치는 말보다는 동참하는 말을 하도록 애써야 한다.

오늘날 말로 인해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 이유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가장 관계를 틀어지는 하는 말은 가르치는 어투의 말, 설교하는 어투의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앙적 경험이 많고 신앙이 깊은 것 같은 사람에게 나오는 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이 "가르치는 말"로 들리기 쉽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말을 하기 즐겨 하는 분들은 자기의 말이 "훈계하는 어투의 말"로 들려지기 쉽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심각한 문제로 고통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 선의로 말을 했어도 "나는 기도하는데 너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식의 가르치는 어투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 함께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 "자기 자신도 기도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식의 동참하는 어투로 들리게 된다. 동참하려는 말의 성육신은 인간의 대화에서 참으로 중요한 원리다.

살다 보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도 눈치껏 물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대답하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을 말을 주로 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집에 심방을 갔는데 아이 문제로 속상해 하는 것 같으면 "지금 댁의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눈치를 보건대 자녀가 재수하는 것 같은 집에 가서 아이에 대해 물으면 "내 아이 지금 재수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분 좋게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눈치를 잘 살펴서 상대방을 세워 줄 만한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상대방의 기분과 처지를 이해하려는 성육신의 말의 원리다.

2. 말의 단장과 더불어 마음을 단장해야 한다.

말과 마음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겸손한 말이 나온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사람을 아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말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즉 인간 내부의 것(마음)을 통해서 외부의 것(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에서 발견한 한가지 귀한 원리가 있다.

그것은 내적인 것(마음)이 외적인 것(말)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외적인 것(말)이 내적인 것(마음)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소중한 마음(내적인 것)의 영향을 받아 소중한 말(외적인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외적인 말의 훈련을 하다 보면 내적인 마음이 단장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복을 걸치는 것에 따라 사람의 행동이 많이 달라진다. 사람이 신사복을 걸치면 신사다운 행동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라도 예비군복을 걸치면 행동이 아주 달라진다. 남자들의 경우에 예비군 훈련장에 가보면 멀쩡한 사람이 예비군복을 입으면 하루아침에 개망나니 행동을 한다. 그래서 멋대로 행동하고,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 조금 구석진 곳만 보이면 바지 내리고 실례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신이 걸친 의복도 중요하다.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려면 의복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의복에 대한 시각부터 달리 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 얼마나 구체적이고,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마음 문제를 고치려면 어려운 것부터 시작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음이 울적하고, 삶의 권태를 느끼고, 짜증이 나는가? 그렇다면 울적한 의복, 권태로운 의복, 짜증스런 의복부터 고쳐 보라. 사치가 아닐 정도로, 유혹을 주지 않을 정도로 짧은치마도 입어 보라. 그러나 의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울적한 언어, 권태로운 언어, 그리고 짜증스런 언어부터 고치고 멀리하려는 자세다. 그리고 난 다음에 빛깔 있는 언어, 즐거운 언어를 사용해 보라. 그러면 어느 샌가 마음에도 봄기운이 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에는 화장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화장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1)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사는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세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막는다.

2) 너무 교만한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남들이 보아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화장을 하면 자세가 조금 더 다듬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 화장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의 단장이다. 그리고 말의 단장은 마음을 단장시키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한다. 자녀들이 정말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말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 말 훈련은 다른 어떤 교육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훈련된 자녀는 한때의 실수로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절대로 전체적인 인격이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3.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면 성내기도 더디 하라."(19) 야고보 사도는 성내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왜 사람들이 성을 낼까요? 심리학적으로 보면 몇 가지 원인이 있다.

1) 온전히 그리고 끝까지 듣지 않는데서 성내게 된다. 사정을 끝까지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비판부터 하려 들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성내게 된다. 말로 인한 상처의 대부분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3) 그 말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않아서 성내게 돤다. 어떤 사람은 감정 내키는 대로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오히려 신음하며 괴로워한다. 성내는 것에 대한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논리 부족으로 성내게 된다. 아는 것이 부족하니까 큰 소리밖에 남는 것이 없다. 이유야 어떻든 사람의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온유함으로 진리의 도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상처와 훼손이 말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영혼과 인격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아름답고 빛깔 나는 언어를 쓰는 데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성을 내게 되는 이유(약1:19-24)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면 성내기도 더디 하라."(19) 교회생활을 하면서 세치 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생겨나는가? 교인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해야 하겠지만, 지나친 기대를 통해 실망으로 빠져드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한다. 교인들을 가장 실망스럽게 만드는 일은 말하는 태도, 성내는 태도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을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한다. 왜 사람들이 성을 내게 될까요?

1. 끝까지 다 듣지 않는데서 성내게 된다. 사정을 끝까지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누구나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해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비판부터 하려 들기에 문제가 된다. 가정생활을 돌아보자. 많은 사람들이 자녀에게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고 자녀에게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 못한다고 화를 내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기막힐 일이다. 누군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가? 하고 싶은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고, 해도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하나?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구박하고, 친구들도 따돌리는 마당에 집에 오면 부모까지 "공부 못하면 나가 죽으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정말 갈 곳이 없다.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구 몰아치면 그것이 죽으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는 또 어떻게 하나요? 나의 영원한 배우자이지만 교양과 겸양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해야 하는데 자기 중심적으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화를 내서는 안되는 상황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끝까지 들어보려 하고, 이해해보려 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2.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성내게 된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겠다는 각오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는 없다.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상처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말로 인한 상처의 대부분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온유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가 모든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며 판단하는 말을 통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아니다. 인간은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3. 그 말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않아서 성내게 된다. 어떤 사람은 감정 내키는 대로 말을 해 버린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중에는 그 말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가 오히려 신음하며 괴로워한다. 왜 그런 일이 생기나? 그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자기 말의 잘못에 대해 괴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뒤끝이 없는 것을 자랑한다. 그런 자랑을 하는 분들은 대개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사람들이다.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상처를 주고 난 다음에 자기 혼자 뒤끝이 없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4. 논리 부족으로 성내는 경우도 많다. 어거지의 방편으로 성을 내게 된다. 그러므로 지식의 증대를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하되,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위 네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가르치려고 하고, 훈계하는 스타일의 말을 하며, 듣기보다는 말하고 주장하려고 한다.그래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항상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를 더디 하며, 온유한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자.



말씀을 들을 때 조심할 것(야고보서1:22-24)

무엇이 말씀을 올바로 듣는 자세인가? 성도의 신앙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듣는 자세'를 통해 서다. 학교에서 강의.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보시지만 우리의 듣는 태도를 특히 주목하신다. 말씀의 내용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태도와 자세도 중요하다. 말씀을 집중적으로 들으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믿음 중요한 것은 알고 말씀 중요한 것도 안다. 믿음 및 말씀과 '들음'이 같은 선상에 있다. 오늘날 신앙의 부족한 단면은 그 이유가 듣는 바른 자세의 결핍에서 그 원인이 있다.

1. 들을 때는 청력을 가지고 듣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들어야 한다. "말씀을 잘 전하나 보자! 틀린 부분은 없나 보자!" 그렇게 판단하는 자세로 있으면 어느 말씀이 은혜가 되겠나? 그런 자세라면 바울의 말씀도 은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요새 말씀의 기갈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은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의 내용이 과거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세가 과거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을 때 혼신의 힘을 다해 들어야 한다.

2. 듣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흥회꾼'. 누가 말씀을 잘 전한다고 하면 보따리 싸들고 달려간다. 말씀을 듣고 "은혜받았다, 재미있었다"고 하나 그렇게 말씀을 재미로 들으면 진짜 참 은혜가 없다.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믿음이 생겨나면 자연히 행함이 뒤따르게 되고 믿음과 행함이 겸비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말씀이 귀를 간지럽히지 않고 심령을 울리도록 해야 한다. 특히 진지해 보이지만 위험한 것은 말씀을 학문적으로 듣는 것이다. 벧엘공부, 크로스웨이 공부, 주제별공부... 그러나 그렇게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한없이 공부하고 한없이 탐구할 뿐, 아무런 결론도 없고, 아무런 열매도 없다. 그것도 말씀을 듣기만 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는 것 자체를 예배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는 그것이 공로가 되기도 한다. 말씀을 들었으면 소화하여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3. 듣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활의 변화도 없이 아멘 소리만 크다면 문제가 많다. 아멘은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큰 힘을 준다. 성도는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지만 목회자는 아멘 소리를 들으면 은혜 받는다. 말씀을 전할 때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아멘은 "그렇습니다!"라는 뜻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으므로 입의 아멘이 손의 아멘으로 실천되어져야 한다. 마21:28.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맏아들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은 잘했지만 안 갔다. 아멘은 열심히 해놓고 아멘의 삶을 향해서는 가지 않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듣기만 하는 것이 체질화되면 스스로 속는 자가 된다. 아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험을 당하고 보니 아는 것이 없다.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시험을 당하고 보니 능력이 없다. 심지어 중생한 줄 알았는데 시험을 당하고 보니 중생하지 않았다. 말씀을 듣고 행동해야 은혜가 있다. 교회에 참여해서 봉사하는 자만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반면에 헌신과 봉사가 없으면 은혜의 깊은 뜻을 모르게 된다. 봉사하고 바쳐본 사람만이 은혜의 신비한 능력을 알 수 있다. 듣고 아멘이라고 동의했으면 그 아멘의 삶을 행하라.



법안에 사랑과 자유가 있다(약1:25-27)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26) 일반적으로 <법> 하면 속박을 연상하나 법은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신호등을 볼 때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도다. 그래서 부담 없이 신호등의 지시에 따르므로 교통문화가 얼마나 자유롭게 되는지 모른다. 신호등을 볼 때 답답함을 연상하고 속박을 연상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자다. 물론 억지로라도 신호등을 지키려고는 할 것이므로 틈만 나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위반하려는 마음을 가진다. 모든 법은 자유하게 하고자 있는 것이고 법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성도라면 10계명을 듣고 기분이 좋아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주님의 명령을 듣고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

신행일치의 삶은 아무리 가르쳐도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면 그러한 삶이 비교적 쉬워진다. "법은 즐거운 것이다. 법은 자유하게 하고자 있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법을 속박으로 느끼게 마련이다. 그래서 "법이 싫다."고 한다. 그 말은 "빛이 싫다."는 말과 같다.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달빛이 싫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법을 속박으로 느꼈다. 율법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요, 힘겨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법에 치이고 눌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법으로 명예를 높였고 어떤 사람은 법을 차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법을 속박을 주는 것으로 알고 지키려다가 한계를 느끼고 법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은 후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이단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헌신을 강요하고 법으로 얽어맨다. 율법주의로 사람을 속박하다가 단물 다 빨아먹고 그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한다.

야고보는 법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각성을 촉구한다. 율법은 원래 의미는 자유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자유하라고 주신 것이지 괴로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라고 우리에게 양심을 주신 것이 아니다. 잘못했을 때 괴로운 것이 양심의 역할이라고, 거짓말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양심의 존재이유다. 거꾸로 생각할 필요도 있다. 양심이란 내가 선한 일 했을 때 내 마음이 기쁘고, 착한 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좋아지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우리는 법을 모두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우리의 속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법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법을 어겼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법은 질서다. 질서는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질서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만 혼란은 결국 우리를 죽인다. 법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기에 그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 "간음하지 말라."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율법이 사악한 사람들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법도 마찬가지다. 남을 속일 때 남이 속으면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나 속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것이다. 이런 인격의 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대할 때 그 안에서 사랑을 연상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는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을 하고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신앙생활은 정말 행복한 신앙생활이 될 것이다.



참된 경건의 척도(약1:25-27)

경건이란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고통과 번민만 무성해진다.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면적 인식이다. "지금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경건이다. 일반적으로 외면적인 모습으로 경건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경건이 광고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경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자랑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자기 자랑에서 시작해서 자기 자랑으로 끝난다. 어느 교회의 전단지. 명함에까지 "40일 금식기도 3번!". 신앙인들을 가끔 외적인 모습으로 자기의 경건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몇 시간 새벽기도 한다", "나는 일주일에 몇 번 예배를 본다." "나는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는다."가 경건의 척도인 줄 아나 그것은 그냥 하는 것이지 자랑거리가 아니다. 내면적인 경건이 없으면 외면적인 경건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경건이 외면적인 자랑거리가 되면 틀림없이 내면적 경건은 사라진다. 참된 경건의 척도는 무엇일까요?

1. 혀를 조심하는 것.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행하리니..." (민14:28)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한 말씀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하면 정말 원망스런 하나님으로 너희에게 나타나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리 무슨 종교행위가 있어도 경건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지적하는가? 입으로는 경건, 경건을 말하지만 말조심을 하지 못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 되고 있다. 참된 경건은 말조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2.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 고아와 과부는 옛날에는 무방비로 노출된 약자다. 까딱 잘못하면 노예로 끌려간다. 그래서 그들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고아와 과부가 불의한 주장을 해도 무조건 그 편을 들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의의 편을 들기를 원하신다. 다만 그들을 돌보라고는 명하셨다. 돈, 지위, 건강보고 사람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 있음을 보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참된 경건이다. 돈이 없다고 무시하고 능력이 없다고 무시하고 머리가 나쁘다고 무시한다면 참된 경건이 아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다.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절대로 경건한 사람이 아니다.

3.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게 하지 않는 것.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말을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 들어가라는 전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서 하나님의 원리로 세상을 빛깔 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참된 경건이다. 경건은 지식도, 감상도, 의식도, 모험적 신앙행위와 외적인 신앙활동도 아니다. 경건이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겸손하게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특별히 혀를 조심하시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기도하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세속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물들이는 분들이 되자. 그래서 참된 경건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길 기원한다.



5가지 차원의 인간관계(약2:1-4)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 신앙생활은 수직관계와 수평관계가 잘되어야 한다. 수직관계는 근본이요 수평관계는 결과다. 주님의 십자가(+)는 수평관계와 수직관계가 다 좋아야 함을 나타낸다. 수직관계도 일직선이어야 하고, 수평관계도 일직선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일직선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온다. 인간관계에서도 일직선의 사고를 가진 자비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외모로 높음과 낮음을 평가하지 않는 일직선의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관계와 인간관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과의 수평관계를 잘 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수직관계가 잘되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수직관계가 바로 됨으로서 인간과의 바른 수평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관계가 잘못되었을 경우가 있다. 회복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잘 안될 때가 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이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때부터 비로소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이다. 이 근본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를 잘 가져서 바로 되면 그 공로로 하나님과의 길이 통하는 줄 안다. 이는 복음이 아니라 이단들이 주장하는 사상이다. 인간관계로 고민이 된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인간관계가 하나님관계보다 앞서거나 더 신경 쓰인다면 인간관계의 문제는 더욱 꼬이는 길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때 신앙과 정신이 병들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관계가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여야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 인간관계가 풀릴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이것을 근거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존재 의식이 있으면 아무런 교만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과 의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웃을 볼 때도 부드럽고 겸손하게 대하게 되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게 된다. 은혜로 구원받은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야박하게 저울질하겠는가?

1. 사람을 물건으로 보는 관계. 사람을 볼 때 "이 사람과 친해두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부터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고약하게 나쁜 생각이다. 이런 사람은 돈 있는 사람은 낫게 봐주고 돈 없는 사람은 눈 아래로 본다. 그러나 진실한 부자의 경우에는 자기가 돈이 있기 때문에 더 평가해 주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2. 이웃을 내 향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관계. 이웃과 관계를 할 때 자신에게 기쁨을 주면 좋은 이웃이나 그렇지 못하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내친다. 그처럼 자기 이웃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인도주의적 관계. 이 관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관계.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4. 형제관계. 이 형제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5. 이웃을 그리스도 대하듯 하는 관계. 이웃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저분을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뵙듯이 한다. 우리 모두에게 이 다섯 번째의 인간관계가 있기를 기원한다. 내 이웃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시야보다 놀라운 시야가 어디 있겠으며 그런 태도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영성이다.



성도의 명분이 크다(약2:5-7)

본문은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실상을 고백하며 이 실상을 알고 부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하라는 권면. 5절은 세 가지 원리. 1)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신다는 원리. 2)그 택한 자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는 원리. 3)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원리. 하나님의 선택은 가난한 자 중에 있다. 사람이 자기의 심령 상태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택을 입을 따름이다. 마음이 가난할 때와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게 되고, 건강할 때보다는 병들었을 때 더 하나님을 찾게 됨으로 결국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택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가난한 자다. 진실한 부자는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에 합당한 가난한 자다. 하나님을 붙들 만큼 가난하다는 것이 소중하다. 혹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연약하다고 느껴 실망하고 있는가? 그러나 믿음의 시각으로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매달릴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가난 속에 함께 할 뿐더러 우리도 그 가난함 속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실상 가난할 때 진정 사랑을 아는 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참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은 부한 데에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여왕 남편일 것 같다. 아내에게 줄 선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작은 선물이라도 참 좋고 고맙다. 그때에는 주는 것도 기쁘고, 받는 것도 다 기쁜 일이다. 사람의 선물에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가난할 때에는 그 선물의 의미가 더욱 감격적으로 전달된다. 가난하면 아름다운 사랑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것 같다. 부유하기 때문에 줄 것도 없을 것 같고 받을 것도 없을 것 같다. 정성을 다해서 주어도 별로 고마워할 것 같지 않고 막상 주려고 해도 줄 것이 마땅치 않은 것 같다. 부잣집에 선물을 주려면 참으로 곤란함을 느낄 때가 많다. 무엇을 주어도 고마워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런 실상을 전하고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부자만 좋아하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로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6절에서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부자는 좋아해도 너희를 누가 괴롭히느냐?" 사실상 부자들이 사람을 압제하고 더 많이 괴롭힌다. 그리고 계속해서 7절에서 성도의 이름은 정말 아름답고 소중한 이름인데, 부자들은 부유하다는 사실로 그 이름을 훼손하려고 한다. 교회에 나오면 모두 똑같은 성도다. 그 성도라는 이름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다. 어느 누구도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할 수 없다. 주인과 노예가 같이 교회에 나오면 교회에서는 서로 형제가 된다. 그런데 "노예 주제에..."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우리 초대교회 때에 있었던 일. 백정인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와 열심히 봉사했고 그 교회에서 나중에 장로 투표를 했는데 그가 장로가 되고 양반 출신의 어떤 사람이 떨어졌다. 그에게 "장로님!"하고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백정보고 장로님이라는 호칭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양반은 기분이 나쁘다고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세웠다. 결국 백정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여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양반교회는 몇 년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와 가난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변적인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성도의 명분 등이 정말 큰 것이다. 큰 것과 적은 것을 구별할 줄 알자.



사랑이 왕의 법입니다(약2:8-13)

본문은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이다. 과연 무엇이 최고의 법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야고보는 이 말씀을 최고의 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첫째 메시지는 "네 몸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다. 둘째 메시지는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 왜 자기 사랑이 필요할까요?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상담하러 가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실력 있는 의사나 상담가를 찾아가지 말고 사랑을 알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자기의 구원 문제, 가정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 찾아가면 위로는 받을 수 있으나 참 사랑은 알지 못하고 진정한 문제 해결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사랑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이웃의 범주에는 남편, 자녀, 친척이 다 포함된다. 그러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포괄하는 사랑의 법이 왕의 법이다. 그래서 사랑의 법 이상의 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분은 주일에 물건 사지 않는 것을 철저히 지킨다. 그러나 그런 법보다 더욱 지켜야 할 법은 사랑의 법, 용서의 법이다. 미움과 질투와 분노와 한은 마음속에 그대로 지닌 채 주일에 물건 사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겉모습의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왕의 법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왕이 지켜야 할 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벧전 2:9)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왕의 법은 바로 '내가 지켜야 할 법'이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자주 실수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남에게 가르치는 말은 잘 하지만 자기에게는 잘 못하는 모습이다. 왜 그런 모습이 생기는 것일까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를 높이 보거나 달리 보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은 가르치는 말이 아예 입에 붙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말이 아예 입에 붙은 분들과 대화를 하면 말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결국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사장이 말단 직원에게 잘못을 훈계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잘못한 것에 한해서 그 잘못을 분명히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못써!"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렇게 사람의 인격을 건드리면 그 충고는 절대적으로 무효가 된다. 흔히 말하듯이 앉는 의자가 다르다고 인간 자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자리가 높아진 때문이지 인간성이 더 훌륭하고, 인격이 더 높아진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오늘날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긴다. 지위가 높다고 양반 노릇 하는 태도는 절대적으로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민의식, 평등의식, 일반의식이 먼저 있기를 원하신다.

진정한 왕은 평민의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 만왕의 왕으로서 우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33년간 민정을 시찰하시고, 몸으로 사랑의 삶을 직접 사시고, 십자기에서 죽음까지 체험하신 우리 주님의 위대한 평민의식을 항상 기억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이끄실 것이다. 그 축복의 순간에 "평민의식"과 "성육신의 삶"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지만, 동시에 사람을 향해서는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왕의 법은 위대한 평민의식 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법을 잘 지켜도 이웃 사랑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10) 이 말씀은 사람에게 흔히 있기 쉬운 공로설을 부인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보통 죄를 10가지 지었어도 의를 11가지 행하면 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로설이다. 그러나 그 공로설은 자세히 보면 옳지 않은 이론이다. 그 이론은 기독교에서뿐만 아니라 세상법에서도 통하지 않는 이론이다. 나라를 위해서 평생 수고해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다. 지난날 나라를 위해서 수고 많이 했다는 사실로 현재의 죄를 봐 주지는 않는다. 정상참작과 공로를 참작할 수는 있지만 죄는 죄대로 엄하게 심판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공로설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통하지 않는 원리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대우 한 것 한가지만 가지고서도 그는 의인일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가 된다.

다시 한번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말씀을 음미해 보라. 그 말씀이 너무 추상같은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니다. 한번 그 말씀을 이런 식으로 거꾸로 생각해 보시오. "그 하나를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된다"는 말씀으로 말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위해서 고민하고 있는 그 한가지 일에서 정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지키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고민하는 그 하나부터 하나님 원리대로 지켜보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실제적인 비결이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2) 법을 지켜야 온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한 차원 더 나아가면 율법주의자의 율법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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