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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유일한 입장은 무엇인가?

지식창고지기 2012. 12. 28. 22:24

에베소서 1장은 그리스도인의 모임(교회, 엑클레시아)에 관한 실제적인 계시를 말하고 있는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이며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고전12;12-13, 엡1:22-23, 고전6:17).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를 택하셨다(사42:1, 눅23:35).

그런 다음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 하셨다(엡1:4,5).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교회를 위해서 택하시고 정하신 위치와 영역이요, 입장이다.

 

(엡1:1하)...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엡1:4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1:10하)...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함께 모으려는 것이니라(kjv 참조)

(고전1:9)...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교통 안으로...

(벧전5:1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어야 한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분파적인 교리이든, 어떤 의식이나 규례이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실지로 우리를 그리스도 밖으로 끌어 내는 것들이다.

 

 

"교회(모임, 액클레시아)의 유일한 입장은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다른 어떤 입장을 교회의 입장으로 취한다면, 그것은 유일한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다.오늘날 교리의 교황으로 보좌에 앉은 자들의 사견(私見)으로 해석한 교회의 입장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벧후1:20).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이 이른다고 말 했다(벧후3:16).교회의 유일한 입장인 그리스도를 대치한 입장들을 거절하라!

주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 안으로(είς(into) 함께 모이는 곳(영역, 입장)에는 나도 그들의 중앙(midst)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다(마18:20).

 

 

주님의 이름 안으로 함께 모이는(gathered together into my name) 영역(곳)은 곧 주님이 함께 계신 곳이며 그것은 영역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이 주님의 몸을 이루는 유기적인 모임(Assembly )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실제는 그 영이시다(요14:26, 15:26, 16:13).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 안으로 함께 모이는 것은 그 영안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말한다, 그 영은 바로 예수 이름의 실제와 본질과 능력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본질은 바로 그 영이다(고후3:17, 고전12:12-13, 6:17).

엑클레시아(Assembly 교회)는 한 몸으로서 한영이다. 그러나 표현적으로, 즉 증거하는 교회들로서 일곱 영들(seven spirits)로서 일곱 교회들(seven assemblies)로 확산되고 증거 된다

그러므로 본질의 "한영-한교회(한몸)"는 증거하는 교회들로서 "일곱영들-일곱 교회들"이다.

증거하는 교회들(일곱 교회들)이란 단체적인 그리스도가 확대되고, 증가되고, 표현되고, 확산됨으로 충만케 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이름 안에서의 모임, 즉 그 영안에서의 모임은 주님의 몸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하나를 많이 말하고 있지만 교회의 하나는 오직 본질의 하나만이 실제이다.

금 등잔대의 하나는 금의 본질안에서 하나이다.

살구나무나,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는 각각 그 나무의 본질 안에서 하나 일때 만이 그 나무의 하나이다. 교회의 하나는 몸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며, 그 하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하나요, 그 영 안에서 하나요, 생명 안에서 하나 이어야 만이 몸의 하나이다.

 

어떤 특정한 교리의 하나는 몸의 분파를 낳게 되며, 교회의 특정한 입장을 세우게 될 뿐이다.예를 들어 "한 도시-한 교회"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입장을 반대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은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라고 말한다.

화평은 실로와 살렘, 즉 예루살렘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매는 줄이 곧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한 몸안에서 하나요, 한 성령 안에서 하나이며,한 소망 안에서 하나요, 한 주 안에서 하나요, 한 믿음 안에서 하나이며, 한 침례 안에서 하나이며,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엡4:4-6).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일한 입장

 

오직 화평(peace)이신 분(실로-살렘-예루살렘)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교회의 입장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입장(영역, 위치, 곳)이다.

할례받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어떠 곳에서나 자신들의 신을 섬길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모이는 중심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이어야 한다. 바로 그 선택하신 곳에 자신의 이름을 두셨으며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다.그 외의 다른 입장들, 다른 장소들은 헛된 성지들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장소들(입장들)은 그분의 권위가 결핍되어 있었고, 그분의 이름의 실재가 없었고, 그분의 임재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다른 입장의 모임은 헛된 것이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권위있는 그분의 말씀과 사랑스럽고 고귀한 그분의 이름과 마음을 사로잡는 그분의 임재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이 택하신 곳(입장) 실로에서 모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위와 그분의 이름과 분의 임재가 있는 유일한 입장을 지키지 안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안식의 주인이시고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실로-살렘-예루살렘)가 하나님이 정하신 모임(엑클레시아)의 유일한 입장이다.

오늘날 대 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택하신 유일한 입장이 아닌 사람들이 스스로 선정한 다른 입장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보다 그들의 교리를 더 중히 여기고 고귀한 그분의 이름인 그 영(성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사로잡는 그분의 임재인 기름 부음에 이끌림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각 교파들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각 입장들로 하나님이 정하신 유일한 입장을 대치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입장들이며, 금송아지 경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지 못하도록 사탄에게 사용되었던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 아론은 금 송아지를 만들었다(출32장).

 

 

하나님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출20:4), 사람들은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한다.

하나님께 가증스런 범죄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위하여 신을 만든 것으로 혼합 경배를 하는 것이다.혼합 경배는 음행이며, 음행은 우상숭배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 안에서도 은사 있고,재능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고 변개하고 혼잡케 하여 자신의 생각(견해)을 첨가하고 혼합 함으로 우상들을 제조하는 기술이 능한 자들이다.그리하여 그 특정한 역량있는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게되고 음행을 하게 된다.

 

주님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고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셨다(사29:3, 마15:8-9).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깊은 잠을 자는 잠의 영을 부어주어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셨다. 소경이된 그들에게는 성경이 봉인된 책일뿐이다(사29:10-11).신약에서 바리새인들인 그들을 소경으로 여기시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하셨다(마15:14).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3:13-15).

그러나 주께로 돌이킨 자들의 눈은 보고, 귀는 들을 수 있다(마13:16).

그 날(주께로 돌이킨 날)에는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소경의 눈이 어두움에서 와 흑암에서 볼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29:18, 35:5).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대치한 것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을 때, 우리는 소경이되고 귀머거리가 됨으로 자동적으로 벙어리가 된다.그러나 우리가 과감히 우리가 붙들고 있는것들(그리스도를 대치한 것들)을 버릴 때, 우리의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고 보고 듣게 됨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멸시하고 특정한 교리의 입장을 따르는 것은 발람의 교리를 지키는 교리의 지킴이들이다.발람의 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올무(덫)를 놓아 포로로 사로잡아 그 포로된 왕국의 음식인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들이다(계2:14, 민25:1-3,31:16,벧후2:15,유11). 이와같이 발람의 교리의 지킴이들이 곧 니골라파의 교리의 지킴이들이다(계2:15). 히브리어 발람(Balaam)은 백성을 정복하다. 백성을 삼켜 버리다라는 뜻의 (bala)와 백성, 평민을 뜻하는 암(am)의 합성어이다.

 

계시록 2장 6절과 15절에서 말하는 니골라파(Nicolaitans)는 히브리어"발람"의 헬라어 번역니콜라오스(Nicolaos)로서 일반 백성(loas) 또는 평신도를 정복한다(Nicoa)라는 뜻이다.

발람의 교리의 지킴이들은 곧 니골라파의 교리의 지킴이들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하는자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내부의 적들이다.

 

그 특정한 교리로 사로잡혀 포로가 된 그들은 그 나라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의 왕(교리의 왕)이 지정해 준 음식을 먹음으로 자신들을 더럽혔다(단1:4하, 5, 8).

니골라파의 교리의 포로가 된 그들은 오늘 오히려 그 교리를 지키는 지킴이들이 됨으로 주님의 책망의 말씀을 피할 길이 없다(계2:15).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 사악한 교리의 지킴이들이 혼합경배의 입장으로부터 구출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고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입장, 즉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곳에서 경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탄의 종인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지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매우 비참한 것이었다(왕상12:26-33).

다른 입장인 벧엘과 단에 경배의 중심지를 세운것은 이스라엘로 음행하게 한 것이며, 이러한 음행은 곧 우상 숭배인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신약 교회들 안에서도 특정한 지도자들이 그들의 사사로운 견해에 따른 성경해석으로(벧후1:20) 성경을 더하거나 삭제하여 특정한 교리인 금 송아지들을 만들어 경배의 중심 내용이 되게 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오류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절대자(교리의 교황)의 가르침으로 발람의 교리, 즉 니골라파의 교리를 지키는 교리의 지킴이들이 되게 함으로 우상의 제물(사견으로 해석한 것)을 먹게함으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

 

 

지체들의 기능들을 마비 시키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파의 교리는 본성적으로 하나이다.

오늘날 특정한 교리 안에 포로 되어 있는자들에게는 주님의 회복, 즉 주님께서 전진하실 길이 없다.니골라파의 교리란 특정한 성경교사들의 교리로 무식한 일반적인 성도들을 삼켜 버리는 덫(올무)이다.

예표론으로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되었던 그림들은 오늘날 각종 교리의 포로가 된 니골라파의 교리의 지킴이들이다. 전자는 포로의 영역이 지리적이요 물리적이었지만, 신약 교회에서는 영적이고 사상적인 문제이다.

 

니골라파의 교리의 지킴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주님의 신실한 순교자(마르튀레스)인 안티바들(계2:13)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위의 성경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지 않고 그들의 절대자(왕)의 교리를 더 선호하고 지지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니골라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로서 성경을 가감없이 따르고 지키는 진리의 증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님은 성경보다 더 높아진 각종 교리(니고라파의 교리)를 거절하는 주님의 신실한 순교자 안티바들을 찾고 계신다(계2:13. 12:11. 17:6).

 

주 예수의 증인들(마르튀레스)이란 엑클레시아(교회)의 또 다른 방면의 이름이다.

헬라어"마르튀레스"는 복수로서 단체적인 증인들을 말한다(행1:8 원문 참조).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순교자의 삶을 살고 순교자로서 죽는것이다.그 보다 더 고상한 것은 없다(고전15:31,골1:24,요일3:16,계12:1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