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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지식창고지기 2012. 12. 29. 11:01

 

에클레시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제도교회가 대다수의 교인들이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 믿고 다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워주신 교회는 ‘에클레시아’로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제도교회’가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와

기독교라는 종교로써 사람이 세운 ‘제도교회’가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에클레시아가 영적, 신본주의적, 성서적인 회중(모임, 교회)으로 존재한다면,

제도교회는 육적, 인본주의적, 비성서적인 기독교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면,

제도교회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신학에서는 무형교화와 유형교회로 분별합니다.

에클레시아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에클레시아(έκκλησία)는 έκ와 καλέω의 합성어로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어의로 ‘모임, 회중’이라고 헬라어 사전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영역은 건물을 뜻하는 ‘Church’로,

한역은 ‘敎會’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감스럽게도 에클레시아는 제도교회와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에클레시아는 원어적인 개념으로 존재할 뿐,

실제적인 기독교는 에클레시아의 ‘성도의 모임’이라는 인적 요소만이 아닌,

건물(예배당)이라는 물적 요소와 신앙적 의식(儀式)이나 방법,

또는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요소가 갖추어진 단체를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에클레시아가 아닌 제도교회로 존재하므로 인하여

항상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라면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교회가 에클레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예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가 잘못되었으니

우리가 개혁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을 해야 하는 교회는 예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이 세운 제도교회인 것입니다.

이제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우신 에클레시아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에클레시아(교회)는 누가 세웠으며, 무엇이며,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명백히 밝힌 말씀입니다.


“내가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우리니”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우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전술한대로 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며,

에클레시아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에클레시아가 존재하는 곳은 베드로라는 반석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이라는 제자의 육신적인 이름이 아니고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시며

성령으로 이를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2-3)

 

이 말씀을 보면, 성도들이 곧 에클레시아(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교회)란

고린도 지방 각처에 있는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오늘날과 같은 특정지역에 위치하는 특정 제도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도적, 물적 요소가 없어도 오직 인적 요소만이 충족되면,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사람 이상의 성도가 모이면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그 곳에 주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에클레시아(교회)는 성립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이 세우신 에클레시아(교회)에 예수님이 함께 하심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도행전에도 이와 같은 인적 요소만이 존재하고 주체가 되는

에클레시아(교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제도적, 물적 요소는 객체로서도 존재하지 아니 했습니다.(행 2:43-47, 4:32-35)

 

혹시, 일곱 사람을 안수하여 선택하고(행 6:1-6)

직분자들의 자격을 열거한 바울 서신(디모데전서, 디도서)을 보고

오늘의 제도적 요소를 성서적 요소로 간주할지 모르나 스데반이 설교하고 빌립이 세례를 주었으며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할 수 있었던 정황들을 볼 때,

오늘의 제도적 요소와는 그 개념이 상이한 것으로 제도적 요소라기보다는

고린도전서에 기록한 은사적, 지체적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는 성도들의 집회를 위한 건물이나 강대상,
건물에 필요한 집기 등

물적 요소는 어느 한 곳에도 거론된 일이 없으며,

총회니 노회니 당회, 제직회 등 제도적 요소도 기록된 일이 없고,

그 곳이 개인의 집이든 공공의 건물이든, 산이나 들이든, 동굴이든,

감옥이든 상관없이 에클레시아(교회)는 존재했고

단체적이고 조직적인 인위적 전도 프로그램이 없었어도

오히려 핍박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각 처로 뿔뿔이 흩어졌을지라도

에클레시아(교회)는 계속해서 확산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에클레시아(교회)이고

성령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도교회가 조직적인 인간의 힘을 과시하는 교회라면,

에클레시아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나그네(행8:4,벧전1:1)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확산시키는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위적인 제도를 앞세우는 교회는 세상적인 핍박이나 환난

또는 재정난이나 인맥의 세력다툼 등으로 분쟁하고 타락하고 와해되지만

에클레시아는 초대교회가 보여주듯이 비록 흩어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방법을 모색하거나 제도적인 사역의 흔적을 남긴 바가 없으며

교회 건물을 건축하기 위한 계획이나 노력을 기울인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역자로서 조직적인 교회의 보호도 받지 못했으며,

어느 한 곳에 안주하여 대우나 특혜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비록 핍박받으며 쫓기는 삶을 살다가 종래는 순교했으나

예수의 증인으로 복음 전도자로 손색없는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질적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습니다.(행 20:7-35)



종말신앙이 확고했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 세상 속에서 세상 밖의 삶을 살았기에

교회의 제도, 조직, 건물이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 소망, 사랑으로 말씀에 따른 종말신앙과 부활신앙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확산시키는 것은 지도자나 성도들의 인위적인 능력이 아니었고

오직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의 첫 말씀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신 것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종말신앙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초림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시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종말신앙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기한이 언제가 되던 주님이 재림하는 날까지가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신앙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만 요구되었던 것이라면

복음이 성서로서 보존되고 보급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마 24:14)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로 일컬어지는, 세상적 권력에 의한 핍박의 세월이 지나가고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의 기독교의 국가적 공인으로 권력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에클레시아는 종말신앙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종말신앙이 사라짐에 따라 주님의 권능과 약속을 불신하고 인위적인 제도와 조직력으로

세상을 향해 기독교의 힘을 보여주려고 제도교회가 출현하게 되었고

그 교회는 성당이라는 건물 안에 주님의 말씀과 임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세상적인 종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에클레시아가 아닌 제도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항상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는 교회로 뒤틀리고 타락하여 왔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공인된 사역자들의 제도적인 위상은 권위와 기득권을 유발하여

교회를 뒤틀리게 하고 타락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인으로 사회속에 어울려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원을 만들고 교권의 강화로 교회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한편 성인(聖人), 성화(聖畵), 성상(聖像) 숭배 사상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고

예배의식은 성의(聖衣), 성물(聖物), 성당(聖堂)으로 포장되고

지역을 관장하는 주교(主敎)들의 막강한 감독권과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출되는 교황(敎皇)은

공의회에서 무류성(無謬性)을 공인 받고 성서 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기독교 공교회(Catholic Church)로

발전되면서 마치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말기(末期)와 같이 사역자들에 의한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결국 중세 종교 암흑시대를 연출하면서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는 구교와 신교로 양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서, 오직 믿음만을 기치(旗幟)로 내세웠던 개신교회 마저도

종말론적 신앙으로의 회복을 위하여 사역자들의 권위적 위상을 지체론적 위상으로,

교회의 제도적 요소와 물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객체이며 오직 인적 요소만이 주체가 되는 에클레시아로,

그리고 세상적 관습과 관례의 유입을 차단하고

세상 속에서 세상 밖의 신앙생활인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도모하는 신앙으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한 진실한 노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파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모두가 자파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꾀하고 있으며

목회성공학이니 교회성장학이니 하면서 편견적이고 인위적인 이론 신학을 연구 발전시키고

사역자들은 직업적인 종교인으로, 비사역자들은 기복신앙의 종교인으로 굳히기 위하여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부여된 ‘만인 제사장’적 개념을 역행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비성경적 제도를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고

명예와 권세와 부를 추구하는 기업화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위치는 명예 회장이나 고문격인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사역자의 위상을 높이는 참고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출세를 위하여, 기복을 위하여 복음을 팔고 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의 참 모습은 신약성서 속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본질을 회복하는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지체로서

각자가 주님의 은사로 택함을 받은 ‘제사장’ 임을 자각하고

제도적 요소와 물적 요소를 과감하게 초월하고 인적 요소만이 주체가 되는

예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로 존재해야 합니다.


제도교회가 타락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개혁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교회는 이미 에클레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파스칼은 ‘팡세’에 <테르툴리아누스 “교회는 결코 개혁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장(B-890)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120 여년에

로마 교회의 아프리카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이 말을 했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후 120 여년에 파스칼은 이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타락할 수 없고 개혁이 필요치 않는 예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는 무형교회로서 영원불변합니다.

그 존재 위치는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제도교회일지라도 가정일지라도 직장일지라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라면,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존재합니다.

요즘 컴퓨터에 의한 인터넷상의 버츄얼 사이트(Virtual site)에도 존재합니다.

오히려 에클레시아로서 가장 합당한 곳이 인터넷상의 사이버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외견상 제도적 요건을 갖춘 교회라 할지라도 그 제도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충실한 교회라면 에클레시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나 신학에 구속되어 특정한 형식이나 의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례로 성경은,‘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이웃을 비판하거나 폄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의 일원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아울러 성령의 전(殿)인 몸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지구 위의 그 어느 곳이라도, 제도가 없고 조직이 없어도 에클레시아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나 중국에는 남한과 같은 제도교회가 없고, 위장된 관제(官製)교회만 있으므로

에클레시아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남한과 같은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이 세운 에클레시아는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유형교회를 위한 무형교회가 되어서는 안되며

무형교회를 위한 유형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기독교에 교파, 교리, 신학이 없다면, 또한 건물이 없고 제직이 없다면,

그리고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전도 프로그램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속수무책으로 구원사역도 할 수 없고 복음 전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의 존재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가 안 된다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역사를 상기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13:11)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거부하고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과 기적적인 섭리를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장차 왕의 제도로 인한 불행과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었습니다.(삼상8:10-1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神政)’을 거부하고

왕이 다스리는 제도적 ‘왕정(王政)’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신정’을 외면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살 수 있는,

살아야 할 선민임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왕정은 인위적인 제도가 필수지만 신정은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제도교회 역시 항상 변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인위적인 제도가 필요하지만

에클레시아는 항상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영원불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성령이 섭리하시는 에클레시아의 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일 이를 거부하고 인위적인 제도만을 고집한다면

왕의 제도를 수락하고 ‘왕정’을 선택한 이스라엘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제도교회가 왕정이라면 에클레시아는 신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분노하심으로 왕을 주고 진노하심으로 폐했듯이

분노하심으로 제도교회를 허락하시고 진노하심으로 폐할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 글은 저 혼자만의 지식이나 지혜의 능력으로 정리된 글이 아닙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도우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불러내주신 많은 형제님들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입니다!

 

 

명쾌한 정리입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로 된 교회들,구교나 신교나 다 이미 세상의 다른 종교 중의 하나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실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참 교회,에클레시아는 진실한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모임 장소가 성당이나 예배당이 아닌 가정집 같은 소박한 곳에서 모여
그런 장소에서 많은 수가 모여,어떤 종교적 힘을 과시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지 않고
적은 수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진지한 믿음이 있는 모임이야 말로
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혼동된 것을 밝혀 잘 정리를 하신 형제님은 정말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 정리된 글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도우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불러내주신 많은 형제님들의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