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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에 대한 반론

지식창고지기 2012. 12. 31. 23:47

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출 32:1~6, 출 35:20~29)

 

 

 

오늘 본문은 영화를 통하여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가 있는 동안 산 밑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산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이라 부르며 한바탕 잔치를 떠들썩하게 벌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40일간을 지냅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24장 마지막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8)."

그곳에 있으면서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모두 다 기록하여 두는데, 그 내용이 25장부터 시작해서 31장까지 이어집니다.

 

31장 마지막 절인 18절에,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모세, 돌판을 던져 부수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받고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산 밑에서는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이 다른 신을 만드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32장의 기록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행태에 당연히 하나님이 진노하셨지요. 진노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 후속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34장에 걸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을 던져 부수어 버리지요. 그래서 다시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 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출 34:1~3)."

그래서 산에 다시 올라갔다 내려온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35장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인 32장으로 돌아와 볼까요. 이 일이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의 고통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런 좋으신 하나님을 결국 없다고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이 본문은 우리 믿는 자로서 생각해 볼 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으로, 이 사건을 저지른 자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32장을 살펴보면서 금송아지 사건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가 살펴봅시다. 우선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들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금을 모으는 주관자인가 하면, 실망스럽게도 모세의 형인 아론입니다. 32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그런 일을 말려도 부족할 텐데, 오히려 백성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도록 방조한 책임이 아론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의 뼈대는 아론 –제사장이 되는 사람– 이 백성에게 금붙이를 바치라 하고, 그 금들을 모아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일단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건을 굳이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신과 우상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에 해당되는 사항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면 우상을 만들기 위해 금붙이 즉 헌금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면, 35장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II. 성소를 위해 헌물을 바치다

그래서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의 의미를 자세하기 살펴보기 위하여, 35장의 상황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25장부터 31장까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성소를 짓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말씀을 간직한 모세는 산 밑으로 내려가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 밑으로 내려가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하는데, 그만 사고(32장)가 생겨서 전하지 못하고 다시 올라가 돌판을 받아오느라(34장)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35장에서야 비로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달하게 되는데, 성소를 짓기 위하여 모세가 백성에게 명령한 구절을 살펴봅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개정개역 출35:4~5)."

성소를 짓기 위한 헌물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기본 원칙은 어떤 것일까요?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자원해서'입니다. 강제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게 바로 백성에게 바치라고 할 때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5장 20절 이하입니다. 백성이 금붙이들을 가지고 몰려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예물을 바칠 때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2장의 사건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35장에서 '성소를 만들기 위해 헌물을 바친 것'과 32장에서 '자기들의 신을 만들기 위해 금고리 등을 바친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겉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다 헌물을 가져다 바친 것,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속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들의 속마음을 살펴봅시다. 먼저 성소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35장의 경우입니다.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가? 바칠 때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출 35:29)."

35장에서 성소를 짓기 위해 헌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원함'입니다. 그렇다면, 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려고 금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32장에는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제로 바쳤습니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그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마지못해서 가져왔다거나 억지로 가져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런 때에 오히려 자발적으로, 열성적으로 바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건은 두 가지 측면, 즉 겉과 속마음 모두 동일합니다. 자원하여, 열성적으로 재물을 바친 것, 모두 똑같습니다. 각자 그들이 신이라고 믿는 존재 –하나님과 송아지- 에게 재물을 '자원하여' 가져다 바친 것,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사건 -32장과 35장의 헌물 사건- 이 살펴본 것처럼 똑같은 것이라면,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그래도 뭔가 하나님에게 재물도 드리고 또한 시간도 드리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한다고, 출애굽기 35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금송아지 만든 사건(32장)과 똑같은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그래서 아무리 그래도 그 두 사건 사이에 무언가 차이가 있어야 하겠는데, 차이가 보여야만 우리 마음이 놓일 것인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사건에서 차이는 무엇이며, 그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35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21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22절)."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29절)."

여기에서 '여호와께'라는 말이 두 사건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호와께'라는 말이 있으니 35장에서 드린 헌물은 분명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고 32장의 사건에서는 그게 아니라, 사람에게 주고 사람을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명쾌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32:7~8)."

III. '자기를 위하여' 대(對) '하나님께'

어떻습니까? 확실히 구분되지요? 그렇게 성경상으로는 확실히 구분이 가능합니다. 객관적인 기록에 의해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그 구분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위해 드린 것이냐, 자기가 만든 신에게 드린 것이냐? 현실상에서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그런 구분이 가능한지, 따져 볼까요? 첫째, 옆에 있는 사람, 김 집사 이 집사가 드린 헌물이 과연 하나님께 바친 것인지, 어떤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남이 하는 종교적인 행동, 헌금이라든지 열성을 내어서 봉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 제삼자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낸 헌물이 그런지 아닌지, 제삼자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사람,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과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겉으로만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결코 남의 경우는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다음 나 자신, 본인은 어떨까요? 알 수 있을까요? 일단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다, 아니다는 확신이 있다 없다,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오직 내가 바치는 경우 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있기에 나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참, 아니지요?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나와 받으시는 하나님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문제가 있습니다. 실상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다행하게도, 이단 종교에 빠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뭐 자기들이 이단의 잡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은 또한 아니니, 문제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 그것을 확실히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32장 1절을 보십시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IV. 부재(不在)가 더 잘 보인다

개정개역 성경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우리말이 재미있지요?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이 말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로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한동안, 오랫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조바심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디 옴을 보고'라고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보고. 본다는 말 아시지요?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로 '본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was so long in coming down from the mountain." (NIV)
"Now 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delayed to come down from the mountain." (NASB)

이 '본다'는 말,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려고 하는 그 어떤 것, 그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며, '보라' 하시는데, 그래서 평소에 하나님을 보기는 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비로소 그게 하나님의 역사였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되고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어서, 그 살아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애가 타서 '보라, 제발 좀 봐라' 하시는데, 우리는 정작 보라는 것은 보지를 않고 엉뚱한 것을 보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으니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니까, 그 대신 뭐가 보입니까? "더디 옴을 보고." 보는 것도 두 가지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을 보는 경우'가 있고 '볼 필요가 없음에도 그것을 쓸데없이 보는 경우', 그렇게 두 가지입니다. '모세가 더디 옴을 보고'라는 말은 쓸데없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곧 모세의 부존재가 눈에 확 띈다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우리말 속담.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사라지면 그때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뜻이죠.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항상 크게 다가오는 법.
그때까지는 모세가 있든 없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었는데,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세의 부재가, 모세의 지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불안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더디 옴을 보고 나서, 그래서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쓸데없는 것을 본 결과, 그들은 모세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모세가 더디 오는 것 하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다. 관계가 있어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정확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려 했고,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이제 안 계시는구나, 하면서 다른 신을 찾았던 것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런 질문에 그들은 똑바른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서두에 이 사건이, 이 일이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의 고통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고 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을 유의해야 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에 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임이 분명한데, 잠시 우리 앞에 보여야 할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소(35장)를 만드는 대신에 사람 눈에만 번지레한 금송아지(32장)만 만드는 결과를 낳는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며 또한, 바른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오늘 말씀,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 35:22)."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출 35:29)"는 말씀이 우리에게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면, 무언가 바치려면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아무리 적은 것을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시고 기쁘게 열납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 드릴 때에 기쁘게 열납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세용 : (전) Evansville 제자교회 담임목사
(현) 전주 강림교회 협동목사
수병원 원목
<저서>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아담은 공처가였을까?>

 

 

 

 

오세용 목사님!

(목사님의 글에 대한 저의 반론이라서 목사님 성함을 부릅니다만,

이 글은 목사님 개인에 대한 글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 목사님들께 드리는 글입니다.

섭섭하시고 심기 불편하시더라도 양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목사님의 '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출 32:1~6, 출 35:20~29)'를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이 일이 말씀대로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모세를 택하시고 부르시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출애굽을 하게 하셨으며,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여정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굽어살피시며 함께 하시며 붙들어 주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춤을 추고 제사를 지냈으니

비난이 아니라 모두 불살라 버려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각주없이 성경 읽기에 흠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요, 목사님!

 

이것은 정말 궁금해서 여쭈어봅니다만,

목사님께서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개신교 목사님들만을

특별히 택하시고 부르시어 이방인의 지도자로 세우셨다고 믿으시나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 놓고 성소를 짓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을 해 주셨듯이

목사님들에게 수십 수백 수천억원짜리 교회를 짓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해 주셨나요?

코흘리개 유치부부터 7~8순 노인네까지 성전건축헌금이다 십일조다 구역헌금에

수십가지 명목의 감사헌금을 만들어서 자원하여 여호와께 드리라고 하셨나요?

그것이 오직 사리사욕에 눈 먼 목사들의 뒷배를 채우는 재물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하여 성소에 갖다 바친 예물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교인들이 교회에 자원하여 예물을 갖다 바치라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이라고 교인들에게 설교하시나요?

목사님의 교인들은 그런 분이 하나님이라고 확실하게 알고 계신가요?

 

 

오세용 목사님!

 

목사님의 교인들은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교회를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드리며,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리시나요?

그럴때마다 하나님은 교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기쁘게 열납하시던가요?

혹시 목사님께서 교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기쁘게 열납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목사님!

 

저의 질문에 대답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대답할 가치도 없다면 상관없습니다만,

만약 고맙게도 대답하시겠다면 우선 저와 함께

제가 각주없이 읽는 성경을 함께 보시지요.

 

 

 

[이사야 59:1~15]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오세용 목사님!

 

목사님께서 이단을 말씀하셨지요.

이단(異端)이 무엇입니까?

처음은 같으나 끝이 다른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항상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라 더디 오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춤을 추고 제사를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지금 이 순간도 저 아프리카에서 동남아에서 한겨례인 이북에서 이남땅 도처에서 

병들고 굶주리며 죽어가는 수많은 가난한 이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수백 수천억원의 헌금을 걷어 예배당을 짓고 성전이라 부르며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자랑하는 

바로 이 땅의 기독교라는 종교의 우상숭배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송아지를 다시 만드는 우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목사님들의 설교에 은혜받고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목사님들이 가로채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온갖 명목으로 해외 여행을 다니고

자식들의 학자금으로 사용하고 은퇴예우금으로 적립하더란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성전에 자원하여 갖다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자원하여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믿으시는 삼위일체 성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치는 것이 곧 성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십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지금도 자원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 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기쁘게 열납하여 주신답니다.

 

누가 이단(異端)인 것입니까?

 

 

오세용 목사님!

 

저와 같이 한없이 부족한 자의 미친 소리에 심기가 무척 불편하실 줄 알기에

그만 줄이고 끝으로 목사님의 귀한 말씀을 도용하면서 마칩니다.

 

"제가 다행하게도,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뭐 자기들이 이단의 잡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은 또한 아니니,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