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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에게 드리는 고언'에 대한 반론

지식창고지기 2012. 12. 31. 23:48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고언


1. 무거운 책임감

목회자의 책임은 무겁고 무섭다. 목회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의미, 가치관, 행동 방식, 직업 선택, 자녀 교육, 심지어 영원한 미래에까지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잘못 가르치고 그릇 인도하면 영혼들이 파멸에까지 이를 수 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무서운 책임이다. 교육자·책·언론·사회·문화 등도 중요하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비판적인 거리를 두기 때문에 그 영향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친다고 믿을 때 목회자의 가르침과 삶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세계 어느 석학의 어떤 확실한 이론보다도 더 큰 권위를 목회자가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큰 권위를 행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질 각오가 없거나 책임을 질 능력이 없으면 빨리 물러나야 한다. 능력이 있어야 천국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더욱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피지도자들의 영적인 이익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경건한 설교자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는 그가 책임졌던 신학교에서 두 종류의 학생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한다. 매우 유능하여 모든 일에 성공하기 때문에 목회에도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진 학생과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로 만들려고 모든 일에 실패하게 하셨다고 믿는 지원자는 거부했다. 후자는 목회를 해도 실패할 것이고 전자는 너무 교만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스펄전 목사는 전자는 좀 아깝더라 했다. 목회자는 무능할 권리가 없고 자기 발전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2. 철저한 욕망 절제

누구든지 능력이 있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으면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이용할 유혹을 받는다. 그런데 목회자는 다른 어떤 기능인보다 더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정치인·공직자·교육자 등 다른 분야 종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어느 분야의 책임자보다 목회자가 그런 이기심을 더 잘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고등 종교는 이기심과 세속적 가치의 극복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다. 예수님은 교인들의 영적인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더 관심을 쓰는 지도자를 '도적' 혹은 '삯꾼'이라 불렀다(요 10:1,12).

한국교회에는 후손에게 땅 한 평, 돈 한 푼, 집 한 칸도 남기지 않은 한경직 목사 같은 성자도 계셨지만 엄청나게 큰 특권과 부를 가진 대형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더 하나님나라에 공헌했으며 누가 더 교인들과 사회의 존경을 받는가는 불문가지다. 모든 목회자는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점검하고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기가 '도적' 혹은 '삯꾼'임을 인정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다. 보통 인간은 다 '제 잘난 맛'으로 산다. 다만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목회자만이 스스로를 좋은 목자가 아니라 도적 혹은 삯꾼이라 생각하고 부끄러워한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걱정하고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겸손을 과시하고 우쭐한다. 겸손해야 회개와 개선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고해성사를 거듭했다 한다. 자신을 도마 위에 얹어 놓고 난도질을 해서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가려내고 이를 악물고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와 설교 준비는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의 가장 좋은 기회다. 기도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고, 설교의 일차 대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3. 자존심


성직자는 한편으로는 겸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합법적으로 사례를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라리 죽을지언정(고전 9:15)" 그런 것 달라고 요구하지 않겠다 하였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였다. 성직자란 매우 고귀한 직분이다. 그에 합당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 가치를 위하여 천덕스럽고 비겁하게 행동할 수 없다. 비겁한 사람이 존경을 받을 수 없고 영적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비도덕적 행위는 직접 혹은 간접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해를 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약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비도적적 행위는 약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면서 이익을 챙기는 행위고, 약한 사람을 등치는 행위는 비겁하다. 가난한 성도들이 바친 헌금을 자신의 편이나 명예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 연약한 여자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것, 세금을 바치지 않음으로 피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의 부담을 가중하는 것은 모두 비겁한 행위다.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합법적인 욕망이라도 절제할 수 있어야 교인들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목회자가 될 수 있다. 하급 욕망을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종이란 명예를 유지하려면 항상 떳떳하고 공명정대하여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약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사 1:17).


4. 비판의 수용

피지도자의 약점과 실수는 본인에게만 문제가 되겠지만 지도자의 잘못은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영적 지도자의 잘못은 더더욱 심각하다.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고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반성이 철저하고 유혹과의 싸움이 처절하더라도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장점도 다 모르지만 특히 자신의 약점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모든 인간은 부족하고 실수한다. 그런데 목회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대 확장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 권위에 도전하면 큰 벌을 받는다고 협박함으로 어떤 비판이나 이의제기도 불가능하게 하여 가망 없는 독재자가 될 수 있다. 사교 교주나 이단들이 통상적으로 이용하는 수법이지만 이단이 아닌 목회자들 가운데도 의도적으로 그런 오해를 교인들에게 심는다. 역사적으로 모든 독재자가 거의 예외 없이 망했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이 사실을 숙지하고 비판받을 가능성을 열어 둘 것이다. "나를 선하다 하는 자는 나의 적이요, 나를 악하다 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다(道吾善者 是吾賊 道吾惡者 是吾師)"란 경구는 모든 지도자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란 사실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아첨을 좋아하는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고 목회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무 감시와 견제도 받지 않고도 깨끗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교만이다. 비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견제와 감시도 받도록 장치를 만들어 놓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민주적일 이유는 없다. 교회는 다수의 결정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운영되고,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다. 목회자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기본교리, 국가의 법, 윤리적 원칙은 민주적 결정이라도 다른 의견과 타협하거나 양보하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것은 민주적 방법으로 결정하는 것이 지혜롭다. 모든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고 목회자가 모든 것을 다 잘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불필요한 권위를 행사하다가 오히려 꼭 필요한 권위 행사가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맺으며,

나는 신학 공부를 하고도 안수를 못 받은 것은 목회자의 책임이 너무 무서워서다. 그리고 어릴 때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그 무서운 책임을 존경스럽게 감당하셨는데 나는 도저히 그분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위에 쓴 고언은 주로 그분들의 사역과 삶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분들의 고난과 헌신으로 오늘 한국교회는 이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성공이 한국교회 실패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성공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권한과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것이 탐나서 목회를 하려는 '삯꾼'들이 많이 생겨 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빨리 목회를 그만두든지 철저히 회개해서 참목자들이 되기 바란다.




손봉호 / 고신대 석좌교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자문위원장

 

 

 

 

존경하는 손봉호 교수님!

 

교수님께서 한국 기독교의 개신교와 목회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추상(秋霜)'같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와 목사들을 바로 세우고자 불철주야 애쓰시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빛과 소금같은 존재이십니다.

교수님과 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그나마 한국교회는 희망이라는 빛이 아직은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역시 교수님의 '목사들에게 드리는 고언'을 읽으면서

'도적삯꾼들에게 돌맞을 각오를 하시는구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미친놈에게 미친놈아 하면 미친놈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도적'과 '삯꾼'도 매한가지입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몇가지 반론을 하고자 합니다.

부디 '신학'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흉보지 마시고

굴러다니는 돌이 어떤 소리를 내는 지 귀 기울여 주시는 아량을 베푸소서!

 

 

교수님!

 

예수님께서 '도적'과 '삯꾼'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른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불리우는 당시 이스라엘의 내노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신실한 종교 지도자들을 '도적'이요 '삯꾼'이라고 불렀을까요?

 

교수님께서는 한국 개신교의 목사들 중에서 부패하고 타락하여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르는

'교인들의 영적인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더 관심을 쓰는 지도자'들을

예수님께서 '도적'이요 '삯꾼'이라고 불렀다고 하십니다.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1~10]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만을 지목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두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감히 백성의 상좌에 앉아 지도자 행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도 버거운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신학에 맞추어 수많은 교리(장로들의 유전)를 만들어 올무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도적'이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시고 불러서 제자로 삼으신 사도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하십니다.

아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하십니다.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하십니다.

 

백성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고

맹신도들에게 아비라 칭함을 받고

교인들에게 지도자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 모두 '도적'이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시대 기독교의 '성직자'요 '지도자'라는 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

 

 

교수님!

 

'삯꾼'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국어 사전에 의하면 '삯꾼'은 '품삯을 받고 임시로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라는 종교의 성직자들은 모두 '삯꾼'일 뿐입니다.

특히, 개신교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진정한 '삯꾼'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십일조와 성전건축헌금과 온갖 명목의 감사헌금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이라

하늘에 쌓은 보화라

하나님께서 곳간이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신다'며 축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거두어 들인 돈과 재물로 창고가 넘치도록 자신의 삯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삯꾼'은 목자가 아닙니다.

이들이 바로 양의 탈을 쓴 이리요       

불의의 재물을 탐하는 발람의 후예들입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삯꾼'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목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주의 종"' 이라는

거짓말과 그 배짱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삯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이라는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양들이 그들에게 속아 자신은 신실한 종교인이라는 믿음으로

멸망의 구덩이로 향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거짓 선지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증거합니다.

 

 

[신명기 13:1~5]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예레미야 23:21~30]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수십 수백 수천억원의 건물을 지어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주님의 몸된 교회'요 '거룩한 성전'이라 부르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형상을 벽에 걸어놓고

그 십자가 형상을 향하여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재물을 탐하는 맘몬(mammon)신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끌어모아 돈을 갈취하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

'하나님께 자원하여 돈을 바치는 자 육십 배, 삼십 배, 열 배의 축복이 있을지어다!'

그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요 꿈 꾸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오직 ''일 뿐입니다.

그들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발람'의 후예들입니다.

자신의 '교회'에 물질과 헌금으로 풍족하게 충성하는 부자들에게는 '축복'을 선물하지만,

물질과 헌금으로 충성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믿음'이 부족하다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미 3:5) 

 

이 시대의 '도적'이요 '삯꾼'이요 자칭 '주의 종'이라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예수님을 따르려고 나아온 길잃은 양들을 꾀어내어

배도의 길로 인도하는 '독사의 새끼'들이요,

그들이 안식을 누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요 '거룩한 성전'이라 숭배하는 건물은

'강도의 소굴이요 회칠한 무덤'입니다.

 

 

교수님!

 

그렇다면 이런 '도적'이요 '삯꾼'이요 '거짓 선지자'인

기독교라는 종교의 지도자인 '성직자'들을 길러낸 것이 성경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신학'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이신 사도들이 그들의 선생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교수님처럼 신학을 전공하신 신학자들이 그들의 선생이 되십니다.

 

이 진실이 교수님을 존경하는 저를 참으로 안타깝게 합니다.

 

 

존경하는 손봉호 교수님!

 

교수님께서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이 모두 '미친 놈의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리시더라도

저는 여전히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교수님과 함께 한국교회를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 오늘 이 땅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교수님과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마태복음 7:15~23]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