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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 전도 왜 하는 걸까'에 대한 반론

지식창고지기 2012. 12. 31. 23:52

사람들과 접촉점만 찾으면 모두 용인하는 문화…공감과 존중이 먼저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사명을 예배와 전도로 이해해 왔다. 특히 전통 종교의 저항을 받으며 복음을 전파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도에 힘을 써 기독교인의 숫자를 늘려야 했기 때문에 전도가 가장 우선적인 교회의 과제가 되어왔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선교 1세기 만에 전체 국민의 20%에 육박하는 인구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고, 전국에 6만 개에 달하는 교회당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서는 3대 종교 중 유일하게 개신교만이 감소하였는데, 그동안 대부분 교회들이 전도에 매진해 왔음에도 오히려 감소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심각한 개교회주의 때문에 교회 간에 교인 쟁탈전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고,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양적인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무리한 전도 전략을 구사한다는 문제가 있다. 최근 서울의 한 교회에서는 새 신자에게 냄비와 드라이어를 준다는 전도지를 뿌렸다가 구설에 올랐고, 또 다른 교회에서는 청년 교인들의 사진을 이용하여 소개팅 콘셉트의 전도지를 만들어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교회에서는 아예 주일예배에 참석하면 한 시간에 현금 5천 원을 주겠다는 광고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과거에도 초코파이나 티슈 또는 솜사탕이나 팥빙수를 주면서 전도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이런 방식은 그야말로 도를 넘은 기상천외한 전도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들이 이른바 비신자들과의 '접촉점'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거룩한 실용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장려되기도 한다. 경기도의 한 대형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현관에 걸려 있는 교패를 떼어내고 자기 교회의 교패를 붙이기도 한다고 한다. 이를 확인한 집주인이 교회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면 교역자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면서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하면서 '접촉점'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도 들릴 지경이다.

이러한 전도 방법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도라는 것이 일단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사를 찾아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접촉점을 삼는다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지극히 물질주의적이고 자극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까지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역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베푸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고통을 당하고 소외당한 사회적 약자와는 거리가 멀다. 한편에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이들이 교회 문턱을 넘어서게 하고 설교 말씀을 들을 기회를 얻는다면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으로 교회를 찾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제 전도 방법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에 볼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키 크고 잘 생긴 전도사가 북 치고 장구 치며 아코디언까지 연주하면서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많은 아이가 신기하고 재미있어하며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자연스럽게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고 등록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런 전도 방법이 설득력이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영역을 중시하며 존중받고 싶어 하므로 이런 행위들을 사생활 침해라고 여길 것이고 이런 전도 방법에 마음을 열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전도 방법

그렇다면 이 시대에 적실성 있는 전도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의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이미지가 실추하고 공신력이 땅에 떨어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이러한 상황을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수단으로 만회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미끼와 같은 수단에 현혹되는 사람이라면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같은 종교적인 필요보다는 더 많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기만을 기대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마음으로 이웃의 형편에 공감(sympathy)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며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단순히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환경을 바꿔나가고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삶의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쉽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간다면 조금씩 서서히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는 태도를 보여 왔다.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전도의 대상자와 타협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를 낮잡아보기 쉽다. 이렇게 자신의 집단 안에 매몰된 사람은 더 넓은 사회의 지평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 수준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봉사 활동마저도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벌이는 사회봉사가 대부분 일회성 활동이고, 자기만족 중심이며, 시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부분의 사회봉사가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사회봉사는 단순한 시혜 행위도 아니고 복음 전도의 수단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고,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한국교회는 이 부분에서 진정성을 담보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 한국교회가 펼치고 있는 사회봉사 및 사회복지 활동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베풀어준다는 의식보다는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교회가 지역을 공동체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라는 관점에서는 특정인이 우월한 위치를 점하지 않고, 주종의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 역시도 다양한 지역사회 구성원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다른 구성원들을 존중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에서만이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복음을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재영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존경하는 정재영 교수님,

 

그동안 교수님께서 현재의 한국 개신교의 왜곡되고 부패한 종교 행태에 대하여

꾸준히 제시하는 대안을 보면서 참으로 구구절절 지당한 말씀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개신교의 말썽많은 전도에 대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냉철하게 살피시고

그에 따른 합당한 종교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대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교수님이 몸담고 계시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대안일 뿐입니다.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교수님의 대안이라는 것은 돌들이 소리지름에 대한 입막음용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처럼 왜곡되고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그 본질에 대한 성경적인 고찰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여 저는 고상하고 지혜로운 신학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통하여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의 문제의 근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와 시날 평지의 바벨탑 사건을 잘 아시지요.

신학에서는 어찌 이 부분을 말씀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성경묵상을 통하여 이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대홍수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나와 두려움에 떨고 있던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모든 동물을 우리의 식물이 되도록 우리 손에 붙이셨답니다.

다시는 모든 생물과 땅을 홍수로 침몰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십니다.

결코 한 곳에 모여 성과 탑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시날평지에서 자신들의 지혜로 창조의 산물인 돌을 대신하여 벽돌을 굽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게 하겠답니다.

 

이것이 창세기부터 전해지는 인간의 교만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저지르는 불순종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면서 어찌 그리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지요.

 

신학과 교리로 성경을 대신하며

자칭 성직자(신부,목사,기타 등등)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대신하여

세계 곳곳에 쌓은 바벨탑이 바로 기독교의 개교회(성당, 성전, 교회, 기타 등등)요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여 그곳으로 모여라 모여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은 무리를 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요?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그리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후예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바벨탑을 쌓고 그 탑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창세기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으로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존경하는 정재영 교수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신 분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곳에 함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씀드립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7:1~5]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네가 고백했듯이 나사렛 예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그렇지만 내 아들을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곳에 살면서 나에게 예배하지 말라.

오직 너희는 내 아들 예수의 말을 들으라.'

 

교수님,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곳에 그 누구의 이름으로 그 어떤 형식의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라 이름하는 그 어떤 형태의 종교적인 행위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교수님께서 아시다시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분은

오직 그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언제 그 어느 곳에 성전이라 이름하는 그 어떤 건물을 짓고

그곳에 모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라 하셨는지요?

 

아닙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십니다.

너희들이 한 곳에 모여 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린다 하나

그것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어느 한 곳에 모여 건물을 짓고 날과 달과 해와 절기에 맞춰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저를 사악한 자다, 이단삼단사단이다 정죄하시는 분들의 말씀처럼

제가 거짓 영에 의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1~24]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존경하는 정재영 교수님,

교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전도와 선교에 대하여 또한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시면서 

전도를 하실 때에 사람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으셨습니까?

오히려 제자들과 함께 전도를 하시던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어떻게 하셨는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7~12]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이것뿐입니까?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사도들의 전도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또한 어떻게 하셨습니까?

 

큰 핍박이 나서 유대와 사마리아 온 땅으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행 8:1)

 

존경하는 정재영 교수님,

무식하고 무지하기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그들보다도 더한 제가

오직 성경 묵상을 통하여 살펴보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코 지금의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형태의 건물과 종교적인 의식을 통한 예배와 전도와 선교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당신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라 칭하는 건물을 지으시길 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성전이라 우상숭배하며

전도와 선교와 예배라는 명목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모아

향기로운 예물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명목의 헌금을 거둬들여 재물을 쌓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하는 지금의 기독교의 행태를 기뻐하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 몸담고 계시는 기독교의 신학과 교리를 떠나서 진실로 그렇게 믿으십니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감사와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진실로 작금의 기독교라는 종교를 원하셨던 것인가 말입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신학적으로는 참으로 무식하고 무지하고 부족하기만 한 제가 교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허접한 글로 반론을 편 것에 대하여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서도,

항상 작금의 한국 개신교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교수님의 충정어린 고언에 대하여

늘 공감을 느끼며 그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교수님께 늘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12. 12. 3. 가장낮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