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쥬신류어(朝鮮類語)와 까오리류어(高麗類語)

지식창고지기 2009. 6. 18. 10:55

쥬신류어(朝鮮類語)와 까오리류어(高麗類語)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18> 끝없는 전쟁의 시작 ①

2008-10-13


제 6 장. 끝없는 전쟁의 시작

들어가는 말 : 닮은 그대, 주몽과 김누루하치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주몽은 쥬신의 건국아버지의 표상(The Symbol of Founding Father)이지, 왕건이나 이성계 같은 분처럼 실존인물로 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주몽과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는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기록들이 기원 전후의 사료에서는 실제 인물로 확인되지 않고, 설령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화나 설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주몽에 관한 이야기(고구려 건국신화)가 실린 책들을 보면 한국 측 자료로는『삼국사기』,『삼국유사』,『동명왕편(東明王篇)』등이 있고 중국 측 자료로는 『위서(魏書)』,『양서(量書)』,『주서(周書)』,『수서(隨書)』,『북사(北史)』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까지 전하는 동명왕신화의 기록들은 거의 대부분 고구려에 관한 것이며, 부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여의 경우 북부여의 신화는 해모수신화이고, 동부여신화는 해부루 · 금와에 관한 신화라는 정도만 남아있죠. 『삼국사기』의 주몽신화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되어 있는 『구삼국사(舊三國史)』의 주몽신화를 요약한 것인데 『위서』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주몽이 남으로 내려올 때 『위서』에는 두 사람(오인·오위)이고 『삼국사기』는 세 사람(오이·마리·협보) 등의 차이가 있죠.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중국 측 사서의 경우와 한국 측의 자료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삼국사기』에는 『위서』에 없는 내용인 해모수신화(解慕漱神話)와 해부루신화(解扶婁神話)가 있습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부여왕 해부루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곤연(鯤淵)에서 금와(金蛙)를 얻은 후 동부여를 건국하는 해부루신화(解扶婁神話)와 유화부인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관계하여 주몽을 잉태하는 해모수신화가 나타나있는데 중국 측에는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초기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불신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전면적으로 믿어야 한다거나(전면적 긍정론) 일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수정론)들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연구를 보면 고구려 본기에 전하는 왕들 가운데 고구려 자체의 전승에 입각한 왕으로서 그 실재함이 확인된 최초의 왕은 제10대 산상왕(山上王 : 197~227)이라고 합니다.1) 무엇보다도 『삼국사기』는 당대의 역사서가 아니고 1천년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문헌 비판은 주변국의 사서와의 대비를 통해서 보다 객관적으로 검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서 태조왕 69년 12월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 한병(漢兵)과 협력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이 대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다른 사서로 확인되는 사실은 위구태의 경우입니다. 당시의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위구태가 한군(漢軍)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분명히 사실인데 이것은 AD 120년 경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 태조왕 69년이라는 점과 태조왕의 재위연수가 무려 93년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이 사건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것이 태조왕 당시의 일로 기록된 것은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던 왕가의 기록들이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되면서 정치적 목적으로 작성되거나 때로는 과장·축소되기도 했을 것이며, 때로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사서들과의 대조를 통하여 엄격한 기준에 따라서 판별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나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태조왕의 재위기간(53~146)이 무려 94년이라는 문제를 다시 봅시다. 이것은 아마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여러 왕들의 기록들을 한 사람의 업적으로 통일시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이 같은 경우는 『일본서기』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진구황후는 100세, 오진천황도 110세에 서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태조왕을 이은 차대왕은 76세에 즉위하여 95세에 서거했으며, 신대왕은 77세에 즉위하여 91세에 서거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반도의 사학계가 지적하는 것처럼, 태조왕에서 차대왕(146~165), 신대왕(165~179)에 이르기까지 왕호가 다른 왕들의 왕호와 다소 다르다는 점도 이 시기를 전후로 무엇인가 역사적 왜곡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여의 동명신화나 고구려의 주몽신화는 사실상 동일하고 주몽 또는 추모라는 말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라는 등의 측면에서만 봐도 주몽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시조가 왕건(王建)과 같은 실존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동명이나 주몽은 쥬신이라는 종족의 건국의 아버지의 표상(Symbol of Founding Fathers)이라고 봐야합니다. 『삼국사기』「잡지」제사조에도 보면, 백제의 경우 대개 동명제를 왕의 즉위 시 처음으로 맞는 새해 정월에 지내는데 이것은 태양신(조국신)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는데 반하여, 실질적인 시조인 구태제는 1년에 4회를 지내고 있습니다. 즉 강현모 교수의 지적과 같이 동명은 특정인물이 아니라 범한국인들 공동의 신(태양신, 천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2)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쥬신을 찾아서』(1권 11장. 주몽, 영원한 쥬신의 아버지)에서 충분히 거론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고구려 전문가인 노태돈 교수(서울대)는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4세기말 소수림왕(371~384) 때 연나라와 남부여(백제)의 침입으로 나타난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남부여계 또는 백제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 고구려 초기 왕계도 함께 정립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3) 이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는 나라의 건국을 보지 못하고 후일 후손들에 의해 신화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장구한 고구려의 역사에서 그런 분은 없을까요?

BC 1세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주몽과 가장 근접한 인물로는 『한서』에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기록을 봅시다.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나라의 법을 범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난동을 피우는 것은 역심이 있어서이니 이를 평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여의 무리들은 유순하지만 흉노는 아직도 정벌하지도 못하였고 부여·예맥이 다시 활동하면 큰 우환거리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추의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4)

이 기록은 AD 12년경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가 보기엔 이 추(騶)라는 분이 고구려의 건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봅시다.

첫째, 위의 기록은 시기적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 고구려 건국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죠. 둘째, 추(騶)라는 말은 음을 빌려 쓴 말로 '말먹이꾼'이라는 비칭(卑稱)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주몽(朱蒙), 추모(鄒牟), 추무 등의 발음과 거의 동일합니다. 셋째, 당시 고구려를 대표하는 지위를 나타내는 말은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쫓겨난 시기가 BC 75년경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나라와 이 지역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고구려후 추의 세력과의 갈등이 깊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고구려후 추라는 분이 우리가 말하는 주몽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 따르면, 몽이라는 말은 말갈족의 당나라 조공사절의 이름에 빈번히 나타나는 말로 인명을 나타내는 파생접미사로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생략이 될 수도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주몽 또는 추무는 추와 다를 바가 없죠.5) 결국 고구려왕 추는 한나라(사실은 신나라) 대군을 맞이하여 장렬하게 전사하고 그 목은 장안으로 옮겨져 효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왜 이 분이 전혀 다른 형태로 신화화되었을까요? 제가 보기엔 이 추(騶)라는 분이 고구려 건국의 가장 큰 촉매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인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이 추(騶)의 혈족들을 중심으로 단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손들은 더욱 은밀하게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실질적인 고구려의 건국을 추진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를 건국하게 되면, 조선조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보는 것처럼 그 선조들에 대해 추존(追尊)하게 됩니다. 『양서(梁書)』에는 "광무제 건무 8년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고 이 때 비로소 고구려왕을 칭하였다."라고 합니다.6) 즉 AD 32년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왕으로 부르지도 않았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고구려후 추의 서거 이후 고구려가 서서히 고대국가에 가까운 나라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 되지요.

연이어 『삼국사기』에서는 태조대왕을 국조왕 즉 건국시조라고 하는데 이 분은 유리왕의 손자이고 그 어머님은 부여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국조왕 태조는 일반적으로 건국시조의 시호이므로 그 이전의 고구려가 있었기는 했지만 태조 이후에 나라의 틀이 잡혀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① 주몽이라는 쥬신(범한국인)의 건국 시조의 표상이 존재하고 ② 고구려 후 추의 가문을 중심으로 고구려인들의 자치력을 확대, ③ 자치력의 확대로 인한 한족(漢族)과의 대립, ④ 고구려 후 추의 피살, ⑤ 대무신왕 때 왕을 처음으로 칭하고 ⑥ 한나라 상제·안제 연간에 고구려의 왕 이름은 궁(태조대왕에 해당)이고 이 분이 고대국가의 틀을 구성한 후, ⑦ 산상왕 때 최초로 왕의 실재와 기록이 일치하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구려후 추(騶)의 일대기는 칭기즈칸, 청태조(아이신조루 누루하치 : 경주김공 누루하치)의 가족사와도 너무나 흡사합니다.

청태조 경주김공(慶州金公)7) 누루하치(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의 경우에는 부족장이었던 할아버지(아이신자오뤄 쟈오창아 : 愛新覺羅覺昌安)와 아버지(아이신자오뤄 타크시 : 愛新覺羅塔克世)가 명나라의 음모로 참살당합니다. 이들은 명나라에 대해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명나라는 만주쥬신(만주족)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 유력자들에게 한편으로는 벼슬을 주고 그를 이용하여 통제하다가 세력이 커지니까 함정을 만들어 암살한 것입니다.

김누루하치는 이에 대한 분노를 참으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히 그러나 보다 더 실질적으로 힘을 기릅니다[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할 말 같군요]. 물론 한족의 명나라는 김누루하치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감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는 만주와 몽골을 심하게 이간질하여 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결국 지속적인 한족과 만주쥬신의 갈등은 저 유명한 '싸얼후(薩爾滸 : Sarhŭ)' 대전을 촉발합니다.

'싸얼후 대전(1619)'은 동아시아의 역사상 3대 전쟁으로 쥬신의 역사(Jushin history)에서 가장 위대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싸얼후(Sarhŭ)'란 만주어로 울창한 숲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현재는 푸순(撫順) 인근의 오지(奧地)입니다. 싸얼후 대전은 역사상 한족(漢族)과 쥬신 사이에 벌어진 최대 전쟁의 하나로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싸얼후에서 2만의 정예 병력으로 명나라의 27만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8) 싸얼후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김누루하치는 본격적으로 중국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초기에 김누루하치의 선대는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들 세력의 확대를 우려한 명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엉뚱한 누명을 씌워 살해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고구려 후 추(騶)의 죽음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조가 처참하게 살해된 뒤 그 후손들이 각성하여 조용히 그러나 철저히 힘을 기르고 부족을 재통합하고 대제국의 기틀을 다져가는 모습도 거의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일치합니다. 김누루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고주몽에 비유한다면, 태조대왕(53~146) 등 고구려의 기틀을 실질적으로 세운 분들이 바로 김누루하치에 비견될 수가 있습니다.

(1) 쥬신류어[조선류어(朝鮮類語)]와 까오리류어[고려류어(高麗類語)]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체 한국인 즉 쥬신을 부르는 명칭 가운데 가장 견고하게 살아남은 것은 쥬신(조선, 숙신 등)과 까오리(고려, 고구려 코리 등)입니다. 이제 이 용어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쥬신사 연구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쥬신(Jushin)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정리를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까오리(Cauli, Korea)를 중심으로 정리해 봅시다.

『삼국지』에 나타난 부여에 관한 기록에는,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리는 발음이 까오리로 추정됩니다(이 말은 현대 중국 발음도 까오리[gaoli]이고 '高麗'의 발음도 동일합니다).『위략(魏略)』에는 고리(槀離)로 되어있는데 이렇게 한자어가 조금씩 다른 것은 이 말이 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북사(北史)』에서 충실히 고증하고 있습니다.9) 바로 고리(高離) 또는 고리(槀離)라는 말에서 현재의 반도쥬신을 지칭하는 코리어(Korea)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만, 코리어에 대한 여러 용어들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한국인들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을 지칭하는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쥬신류어[조선류어(朝鮮類語)]이고 다른 하나는 까오리류어[고려류어(高麗類語)]입니다.

쥬신류어는 현대 한국어 한자발음으로 조선(朝鮮 : Cháoxiān), 숙신(肅愼 : Sùshèn), 직신(稷愼 : Jìshèn), 제신(諸申 : Zhūshēn), 식신(息愼 : Xīshèn), 직신(稷愼 : Xīshēn), 여진(女眞 : Nüzhēn), 쥬신(珠申 : Zhushēn) 등이고, 까오리류어(高麗類語)는 콜리(忽里 : Khori), 고려(高麗), 고리(槁離), 고리(槀離), 고리(高離), 고리국(藁離國), 탁리(槖離), 삭리(索離),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등입니다. 쥬신류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을 해드린 바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까오리 류어들을 정리합시다.

코리어(까우리 : Korea)에 대한 많은 말들은 초기에는 고리(槁離), 고리("槀離" :『魏略』), 고리(高離(『三國志』), 고리국(藁離國), 탁리(槖離), 삭리(索離)10) 등 초기 사료에 나타나는 코리 또는 홀리(Khori) 또는 까오리는 '원(原)코리어(Proto-Korea : ?~3C BC?)'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나타난 용어들로 고구려(高句麗)로 발음하는 고구려(高句麗), 고려(高麗), 구려(句麗) 등은 고(古)코리어(Old-Korea : BC 1C?~668 AD)로,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渤海)는 대(大)코리어(Great-Korea : 698~926 AD), 왕건(王建)이 건국한 중세의 고려(高麗)는 중세 코리어(Medieval!!-Korea : 918~1392 AD)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한 용어들은 모두 국제어인 영어로 'Korea' 또는 'Corea'로 표기가 가능합니다. 이러한 용어들을 까오리 류어[고려류어(高麗類語)]라고 정의합니다.

대부분 한국학자들의 논문에서는 高句麗 또는 高麗를 현대 한국어 발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고구려(Goguryeo/ Koguryo)' 또는 '고려(Goryeo/Koryo)'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 고대사 연구의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高句麗'라는 용어 자체의 발음이 원래와는 다르게 단순히 '고구려'로 번역되면서, 이전에 한국인과 관련된 수많은 까오리류어(槁離, 槀離, 高離, 藁離國, 槖離, 索離)와 무관하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 쥬신을 의미하는 고유어가 있고 그것을 한족(漢族)들이 음차(音借)하여 사용한 용어인 高句麗를 다시 한어(漢語)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한국어로 음독(音讀)함으로써 그 원형(原型)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입니다.11)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들조차도 '고려'와 '고구려'를 다른 용어로 생각하게끔 되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많은 사서에는 고구려(高句麗) 대신 고려(高麗)를 사용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우리가 高句麗를 '고구려'라고 읽는 것은 현대 한국어의 한자음의 발음대로 읽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말하면 고구려(Goguryo)라는 나라는 원래부터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 민족 고유의 국가를 까오리에 가깝게 불렀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高句麗' 또는 '高麗'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쓰면서도 까오리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입니다. 이 책에서 고려(高麗)를 까오리(Cauli)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에서 사용된 려(麗)라는 글자는 그 발음이 '[리(li)]'로 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둬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기』12)나『당서(唐書 : 940)』13),『당운(唐韻)』 또는 명나라 때의 『정자통(正字通 : 1671)』에서 '麗'의 발음이 "呂之切" 또는 "力之切"로 리[li]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현대에도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까오리 빵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까오리는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식 한자 발음을 지고한 가치로 생각하다보니 그 원래의 이름을 방기하고 나라 이름을 국제적으로 학문적인 미아(迷兒)로 만든 것입니다[아마도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가 되었다는 논리 즉 '소중화(小中華)의식'이 나라 전체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高句麗를 앞으로 '코리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앞으로 영어로 한국 고대사관련 논문을 써야하는 경우는 이 부분에 대한 많은 고려가 필요합니다. 특히 영어 논문이나 해외의 무료 백과사전 포털사이트(http://en.wikipedia.org) 등에 고구려를 Goguryeo/Koguryo로, 모허[말갈(靺鞨)]를 Malgal[말갈]로, 쉬(허)모[예맥(濊貊)]를 Yemack[예맥]으로 표기하여 웃지 못 할 내용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고유명사들은 그 해당되는 사람들의 고유어로 표기해야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최대한 그 발음에 가깝게 기록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서울(Seoul)을 한성(Hancheng : 漢城)이라고 하면 잘못된 표현이죠. 김운회는 어디를 가든지 김운회입니다. 김운회를 '긴운까이[일본발음]' 라든가 '진윈후이[중국발음]'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오류들은 반도의 사학계가 만든 해외 홍보용 고급 국사책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런 식의 작업들은 한국사를 해외에 알리기는 고사하고 더욱 모호하게 몰고 갑니다.

이러다 보니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말이 서로 안 통하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즉 모허(Mohe)라고 하면 어느 나라의 역사가라도 이 분야의 전문가라면 모두 알고 그것과 관련하여 조금만 들어도 이 말이 한국인들과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되는데, 전혀 엉뚱하게 '말갈(Malgal)'이라고 하니, 한국인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다른 말들과 잘 연결이 안 되는 것이죠. 조선(Cháoxiān), 숙신(Sùshèn), 직신(Jìshèn), 제신(Zhūshēn), 여진(Nüzhēn), 쥬신(Zhushēn) 등도 쥬신(Jushin)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을 굳이 현대 한국어의 한자발음에 집착을 하니 서로 다르게 들려 민족 원류 전체가 모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사학계는 세계화가 가장 안 되었거나 가장 세계화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리, 까오리, 콜리(忽里 : Khori)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더욱 심각합니다.

필자 주
(1)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 1999) 12쪽.
(2) 강현모 『한국설화의 전승양상과 소설적 변용』(연락 : 2004) 20-22쪽.
(3) 노태돈, 앞의책, 50쪽~53쪽, 92쪽~93쪽.
(4) 『漢書』卷99 「王莽傳」始國四年
(5) 노태돈, 앞의책, 59~60쪽.
(6) "光武八年高句驪王遣使朝貢始稱王至殤安之間其王名宮"(『梁書』 高句麗傳 )
(7) 청태조를 김누루하치로 호칭을 하는 문제는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006) 242~325쪽. 아이신자오뤄는 경주김공(慶州金公)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만주쥬신(만주족)들의 성씨에 대해서는 열도쥬신의 성씨와 관련한 다른 장(제20장. 열도부여의 전개)에서 상세히 검토할 것이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만주족의 성씨는 무쿤(穆昆 : Mukun 또는 Mokun)과 하라(哈拉 : Hala)로 나눠지는데, 무쿤은 씨(氏)에 해당하고 하라는 큰 혈연집단이다. 예를 들면, 하라가 김씨라면, 무쿤은 경주 (김씨), 안동 (김씨), 부안 (김씨), 전주 (김씨) 등을 말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어 사전』에는 무쿤은 족(族), 하라는 성(姓)으로 으로 번역한다. 무쿤은 반도쥬신(한국)식으로 말하면 본관(本貫)인 셈이다.
(8) 『滿文老檔』「太祖」;『滿洲實錄』5
(9) 『북사』의 이 부분 주석에는 "出自索離國 梁書卷五四高句麗傳「索離」作「櫜離」, 三國志卷三0夫餘傳註引魏略作「高離」(殿本作「槁離」), 隋書卷八一百濟傳作「高麗」. 按「櫜」音「高」. 「索」當是「櫜」之訛. 「櫜離」即「高麗」也. "와 같은 말이 있어 索離, 櫜離, 高離, 槁離, 高麗 등이 모두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 『북사』의 내용 즉 주 9)를 참조.
(11)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조차도 '고려'와 '고구려'를 다른 용어로 생각하게끔 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많은 사서에는 高句麗대신 高麗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2) "麗音離"(『史記』券六 ).
(13) 『唐書』唐書釋音券弟一 本紀第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