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어디로 가는가, 구름들이여

지식창고지기 2009. 6. 18. 12:19

어디로 가는가, 구름들이여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1>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①

2008-10-20


제 7 장.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들어가는 말

푸른 염소를 부르네 ― 歌

노태맹

수만 나비의 강물, 붉은
하늘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이름받지 못한 말들
들리지 않는 노래 저
뭉글거리는 구름의 시간들

오, 아무에게도 말 걸지 못한 하루
유리로 만든 빌딩 아래
나 푸른 염소를 부르네
돌아갈 처소도 없이 환유의 거리
아무도 나에게 말 걸지 않는
길위에서 나 노래하네

이팝나무 흰 가로수 아래
나 뭉글거리며 푸른 염소를 부르네
내 사랑했다고 믿었던 그 모두는
수만 나비의 시간이었으니
어디로 가는가 구름들이여
어디로 가는가 구름들이여.

[ 출전 : 노태맹 시집 『푸른 염소를 부르다』(2008) ]

(1) 어디로 가는가, 구름들이여

제가 이미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해 말씀드렸다시피, 부여는 세 차례에 걸쳐 한반도로 남하합니다. 제1차 남하는 고구려의 건국기를 즈음하여 부여 일부의 소수세력이 남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소국 백제(伯濟)로 추정됩니다. 제2차 남하는 고이왕 계열로 3세기 초·중엽에 요동지역의 부여는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게 됩니다. 이 때의 주체세력이 부여왕 울구태이고 이 분이 고이왕으로 추정되며 바로 백제의 건국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 제3차 남하는 4세기 초로 이 때는 동호계의 선비가 강성해지면서 만주에서 부여가 큰 핍박을 받게 되자 근초고왕(재위 : 346~375) 계열이 한반도로 대거 남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2), 백제는 한반도(전라도, 낙동강, 황해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합니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일본의 야마토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을 경영하기 시작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야마토 정부라는 것은 실체가 없으니 결국 가야를 정벌한 주체도 근초고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상세히 해설합니다).

즉 이 시기에 한반도의 남부 지역을 경략한 기사는 『일본서기』진구황후(神功皇后) 49년 조의 기사밖에는 없습니다. 그 내용은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에게 명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인데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 아니고 이 시기의 야마토 왕조도 실체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이 시기의 한반도 남부 및 열도의 경략을 한 사람은 바로 '근초고왕-근구수왕'이라는 사실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3세기 후반(266년)부터 5세기 초(413년) 까지 신뢰할만한 사서에는 일본 열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 역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일정한 정도의 틀을 갖춘 고대국가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 후반 즉 4세기경에 규슈부터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기나이(畿內) 등에 걸쳐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묘제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4세기에서 7세기까지를 고분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기록이 없으므로 고분으로 역사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해야 하는 형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분시대는 크게 전기와 중기, 후기로 나눠지는데 전기는 3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소국 연맹체, 5세기 후반~7세기 말까지는 초기 고대국가로 보고 있습니다.3) 다만 여기서 말하는 소국들 가운데는 부여계와 같이 이미 고대국가의 틀을 완성한 민족 이동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이 야마토 왕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세기 후반 가야지역의 유적과 유물들 가운데 김해 대성동 13호분과 2호분의 것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수준이 가장 높은 것이며 여기에서 출토된 왜계(倭系) 유물들은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4)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3세기 후반 또는 늦어도 4세기 초에 일본 열도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공유하는 연합정권이 성립되었으며 이를 전방후원분체제(前方後圓墳體制)라고 하기도 합니다. 전방후원분의 분포 상황이나 규모를 볼 때, 오사카(大阪) 평야나 나라(奈良) 분지가 중심이고 그 주변지대에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전방후원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5) 그러나 『송서』에 나타난 왜왕의 상표문을 토대로 본다면, 왜는 대체로 5세기 즉 430여년 경부터 460여년 경에 야마토 왕조에 의해 간사이(關西) - 규슈(九州) 지역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의 반도부여(백제)는 비류왕 - 개로왕이 다스리는 시기입니다.

그 동안 열도(일본)의 연구에 따르면, 5세기 왜국은 각 지역의 수장들에 의해 공립(共立)된 연합정권으로서 그 범위는 규슈 중부로부터 간토(關東) 지역에 이르며 왜왕은 바로 이 연합정권을 대표하는 대수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5세기까지 열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소국들이 있는 가운데 야마토 정권이 비교적 우위에 있는 형태라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면 기나이(畿內)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 정권은 점차 초월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반도부여에서는 개로왕이 피살되고 반도부여(백제)는 멸망(475)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도부여가 열도의 지원으로 국가를 재건을 하는 것으로 봐서 열도에도 상당한 부여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의문의 인물로 개로왕의 아드님인 곤지왕자입니다. 곤지왕자는 가장 많은 의문과 비밀을 가진 인물로 이 곤지왕자를 잘 분석하면 부여의 역사는 절반을 풀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앞으로 상세히 분석해드립니다).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해, 홍윤기 선생의 견해를 인용하여 곤지왕의 손자들이 반도부여(무령왕)와 열도부여의 왕(게이타이)으로 등극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제 연구의 결과는 곤지왕의 아드님들이 반도부여와 열도부여의 나라님(임금)으로 등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충분히 고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열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 제26대)을 현재 일본 천황가의 시조로 보고 있습니다. 즉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는 일본의 황실은 만세일계가 아니라 세 번째 왕조이며 현재의 천황가는 게이타이 천황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삼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즉 미즈노 유 교수는 스진천황(崇神天皇 : 제 10대) - 닌도쿠 천황(仁德 天皇 : 제16대) - 게이타이 천황으로 세 번의 왕조가 교체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곤지왕자편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이 시기 왜왕들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는 사서는 『송서(宋書)』입니다. 『송서』에는 왜왕이 송나라 황제에 보낸 상표문이 실려있는데 여기에는 왜왕들이 "동으로 정벌하고(東征), 서쪽 지역을 복속시켰으며(西服), 바다 건너 북쪽까지 평정(渡平海北)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야마토 왕조가 규슈 중부로부터 간토(關東)에 이르는 지역의 연합정권을 대표하는 대수장의 지위에서 명실공히 왜왕의 지위를 구축해간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왜왕의 휘(왕의 이름)는 진(珍)과 제(濟)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은 일본 고대사 연구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인데 앞으로 충분히 검토하고 분석해 갈 것입니다.

참고로 위에서 말하는 바다건너 북쪽 즉 해북(海北)이라는 표현을 두고 일본측에서는 한반도로 보고 있고, 한국측에서는 규슈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왜 5왕 편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다시 4세기 초로 돌아가서 부여계의 제 3차 남하 부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시기는 부여가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입니다.6)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봐야합니다.

즉 부여계의 3차에 걸친 이동을 이해하기에 앞서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정세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당시의 국제정세가 어떤 방식으로 부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봐야만 할 것입니다. 먼저 부여계의 이동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모용부(일반적으로 선비족)에 대해 살펴보고 모용부와 고구려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부여의 입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필자 주

(1)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권(해냄 : 2006) 48~90쪽.
(2)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102쪽.
(3) 노중국「5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234쪽.
(4)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푸른 역사 : 2002) 137~144쪽.
(5)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27쪽.
(6) 『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