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새롭게 열리는 일본의 역사

지식창고지기 2009. 6. 18. 12:30

새롭게 열리는 일본의 역사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9> 한 줄기, 두 연꽃 ①

2008-11-10


제 10 장. 한 줄기, 두 연꽃

들어가는 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진구황후 51년조에는 "내가 친교하는 백제국(百濟國)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사람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옥(玉)을 비롯한 수많은 진기한 물건 등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해마다 이 진귀한 물건들을 부치니 나는 너무 기분이 좋다. 내가 살아있을 때와 같이 후하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제에 대한 최초의 평가입니다. 사실상 근초고왕의 말이지요. 백제를 하늘이 주신 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좀 이상합니다. "옥을 비롯한 수많은 진기한 물건"이라는 표현이 한반도보다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들립니다. 즉 위의 기록에서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이고, 백제국을 일본으로 고치면 딱 들어맞는 말이 됩니다. 상식적으로 봅시다. 일본은 옥의 대표적인 산지인데 "이전에 없는 옥"이라는 말을 일본의 진구황후가 했다는 말이 상식적이지 않죠. 죠오몬 시대의 유물들에도 옥은 풍부히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살펴봅시다.

한국 최고의 옥 전문가인 노진환 교수와 이민부 교수에 따르면, 옥에는 경옥과 연옥이 있는데, 한반도에서 나는 것은 연옥이며, 경옥(硬玉 : 翡翠[jade])은 한국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반도 유물로 출토되는 옥 장식물들은 경옥으로 아마도 남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1) 고대 쥬신은 옥을 매우 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쥬신의 시원지에서 가까운 곳이나 쥬신의 이동로 중간에 옥 생산지가 있었거나, 원래 중개무역과 금속가공이 이 주요 직업인 쥬신이 옥생산자들과 많은 접촉을 했을 가능성이 있죠.

최근 랴오허(遼河)나 내몽골 지역의 이른바 홍산 문화지역에서 발굴되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옥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반도의 유물가운데 옥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죠. 예를 들면 경주의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68%가 옥 종류의 구슬이라고 합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쥬신들이 애용하고 소장했던 경옥이 한반도에서 생산되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호탄)와3) 미얀마와 티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옥의 산지이며 일본에서도 경옥이 납니다.

따라서 "수많은 진기한 물건"이라든가 "이전에는 없던 것"이라는 표현은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석해온 대로 진구황후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당시에는 야마토 왕조의 실체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진귀한 물건들을 조공을 받을 사람이 없었고, 만약 있다면 기록상으로는 근초고왕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닌도쿠 천황(仁德天皇) 41년조에는 "키노쯔네수쿠네(紀角宿禰 : きのつねのすくね)를 백제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와 군의 경계를 나누어 상세하게 각 지역의 생산물들을 기록하였다."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백제의 생산물을 상세히 조사하고 군국(郡國)의 경계를 나눴다니 이상하지요? 이 말은 거꾸로 반도부여인과 열도부여인이 다르지 않다는 말을 표현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야마토 왕조 자체도 여명기에 속하고 그 존재마저 희미한 상태인데다, 일본 사학계에서조차 '닌토쿠(仁德)'의 시대에 왕권의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전은 전설의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6세기 후반 킨메이 천황조만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위의 기록은 반도부여왕(백제왕)이 일본에 머물러 있으면서 두 지역을 통솔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많이 나타나므로 앞으로 충분히 분석할 것입니다.

조메이 천황(舒明天皇)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백제에서 온 손님들을 조정에서 대접하였다.
상서로운 연꽃이 검지(劍池)에서 피어났다.
한 개의 줄기에 피어있는 두 송이의 연꽃"

이 기록은 조메이 천황 당시에 백제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상서로운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백제와 일본을 하나의 줄기로 보고 있다는 암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텐지 천황(天智天皇) 10년조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죠.

"귤은 저마다 가지가지에 달려있지만
(多致播那播 於能我曳多曳多 那例例騰母)
구슬을 꿴다면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지
(陀痲爾農矩騰岐 於野兒弘儞農俱)

이 동요는 반도부여(백제)의 지배 계층과 열도부여(일본)의 지배계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수많은 반도 부여인(백제인)들이 일본으로 오자 그들에게 관직을 주었다는 말 다음에 바로 나오는 노래거든요. 이것은 열도부여(일본)의 지배층과 반도부여(백제)의 지배층의 관계가 하나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1) 열도로, 열도로 : 새롭게 열리는 일본의 역사

일본 열도는 시기적으로 죠오몬(繩文) 시대 ― 야요이(彌生) 시대(가야계) ― 고분(古墳) 시대(부여계) 등으로 구분이 됩니다. 열도는 기나긴 죠오몬 시대를 거쳐 BC 3세기에서 AD 3세기까지는 야요이 시대를 맞이합니다. 현재의 도쿄대학(東京大學) 자리인 야요이 마을에서 이전과는 다른 토기들이 발견되어 이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릅니다. 야요이 시대는 벼농사와 금속기 및 그 기술들을 가진 한반도의 가야계 사람들이 대거 열도로 이주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야요이인들의 키가 죠오몬인에 비하여 평균적으로 3cm 가량 크다는 것인데 이 같은 변화는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전에 정착했던 사람들보다 더 키가 큰 사람들이 이주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둘째, 일본의 주신인 아마테라스에게서 일본의 통치자라는 증거로 받아온 것은 거울[鏡], 칼[劍], 옥(玉) 등의 이른바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것인데, 이 같은 유물들은 가야 지역의 무덤에서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죠오몬 시대까지의 일본인들은 현재의 일본인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입니다. 즉 죠오몬 시대인은 형질 인류학상으로나 형태학상으로 현대 일본인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죠오몬 시대인들은 야요이인들이나 고분시대인들에 의해 압도당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적 지속성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야요이 시대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는 세형동검이 북규슈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형 동검은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바로 한국인들의 이동을 보여주는 주요한 바로미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석기 시대의 무기와는 달리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참고로 세형동검과 비파형의 분포도를 보고 넘어갑시다.

고조선의 영역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비파형(요령식) 동검과 세형동검의 출토지라고 합니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은 한족(漢族)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고 합니다. 이 분야에 전문가인 미국 덴버 대학의 여성 인류학자 사라 넬슨 교수는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4) 그러니까 이와 같은 세형 동검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것을 소지한 민족의 이동이 광범위하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유물들이 북규슈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런데 4세기가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 또 나타납니다. 즉 이 시기에는 기나이(畿內) 지역과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내의 여러 지역에서 고분이 출현하고 이것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고분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형태로 조성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가 점차 거대해집니다. 거대한 고분의 조성은 그 권력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의 말처럼 열도(일본)의 역사는 '단절과 비약'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한반도 남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이 되고 난 후(야요이 시대) 또 다시 북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거대고분들이라는 것이지요(고분 시대).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지금까지 본대로 바로 부여계의 남하입니다. 즉 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륙부여에서 반도부여로 많은 부여계의 이동이 있었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성립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공손씨(公孫氏) 즉 연왕(燕王)의 몰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선비계와 고구려계가 강성해짐에 따라서 부여계는 한편으로는 끝없는 이동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륙의 개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부여계의 왕권이 강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우진 - 닌도쿠 천황릉과 같이 초기 야마도 정부의 권력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그만큼 외부의 "치명적인" 환경변화나 침략이 없는 비교적 안정적 환경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개략적으로 살펴봅시다. 3세기에 위(魏)나라에 의해 대륙계 부여가 몰락하자 잔존 부여계가 한반도로 이동합니다. 4세기에는 선비계가 잔존 부여계를 궤멸시키자 부여계는 다시 대규모로 한반도로 이동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일시적 약화로 4세기에 부여계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의 주체세력이 바로 근초고왕계입니다. 이들은 열도의 개척을 본격화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도 많은 부여인들이 열도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5세기에 이르러 백제가 멸망(475)하게 되자, 많은 부여계 사람들이 다시 열도로 이주합니다. 이 5세기 말기는 부여계에 있어서는 가장 참담했던 시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5세기는 고구려의 한반도 지배 강화로 인하여 부여인들에게 '천년의 숙적'에 대한 공포도 가장 극심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반도부여(백제)는 4세기말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패배하였습니다. 아신왕(392~405)이 고구려에 항복함(396)으로써 왕제와 대신 10여명이 인질로 잡혀갑니다. 이 시기에 대고구려 전쟁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당시의 집권 세력인 진씨(眞氏) 세력이었습니다. 진씨 세력의 연이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책임을 두고 반도부여 내에서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진씨와 해씨(解氏) 세력 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왕위계승전으로 격화됩니다.

진씨는 왕의 아우인 혈례(碟禮 또는 설례)를 옹립하고 해씨 세력은 일본에 있던 전지(腆支)를 옹립하였는데 결국 해씨가 승리하여 전지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 과정이 『삼국사기』전지왕(405~420) 3년조의 기록에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으니 이들은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해씨 세력이 진씨 세력을 물리치고 집권하게 된 것입니다.

부여계의 일본 열도에로의 대대적인 이동은 4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4세기에는 근초고왕 계열이 한반도 남부의 왜(가야) 세력과 연합하여 열도로 이동하여 야마도 왕조를 수립한 것으로 추정이 되며 5세기에서는 백제의 멸망으로 열도(일본)에서는 강력한 부여계의 왕국 건설이라는 시대적 사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오우진 천황 시기에 많은 부여계의 이주민이 있었음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5세기 백제∙일본사의 주요한 특징은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5세기를 흔히 '이주민의 세기'라고도 합니다.5) 이것은 영락대제[광개토대왕(391~413)] - 장수왕(413~491)의 한반도 압박과 수도의 이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475년 백제의 일시적 패망 이후 백제왕권의 부흥에 야마토 왕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원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6) 이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백제왕실과 야마도 왕실의 관계를 별개로 취급하고 있는 점이 사실과 다른 것입니다. 이 당시 백제 - 야마도 왕조의 관계는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5세기 이주민의 특징은 한반도 남부의 가야인들이나 부여계가 주축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급 기능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일본 열도에 있어서 생산력의 발전이 크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다만 워낙 기록이 없기 때문에 고고학적 연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철과 견직, 농업의 발전은 가장 괄목할만한 것으로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7)

중국의 문헌 사료에서는 266년경부터 413년까지 약 150년간 왜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고구려 영락대제비(광개토왕비)에 왜(倭)라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은 부여계가 제대로 일본 땅에 정착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초고왕(346~375)∙근구수왕(375~384) 등이 한반도 남부를 경략하고 열도 개척에 심혈을 기울인 시기와 일치합니다. 이 두 임금의 기록이 오히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충실히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진구황후의 시기에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두 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고 이 이외의 나머지 기록들은 사실 확인이 어려운 기록들입니다. 이 두 임금으로부터 직계 후손들인 왕들, 예컨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의 침류왕에서 전지왕 등 여러 왕들의 행적이 "실체가 의심스러운" 오우진·닌도쿠 시대의 기록 속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오우진·닌도쿠 천황의 행적이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그 정도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면 중국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마오 유키하사(山尾幸久) 교수는 닌도쿠 천황 이전을 '신화(神話)의 시대'라고 하면서 왕권은 닌도쿠 천황 시대에 시작되었고, 유락쿠 천황 시대에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8) 그런데 야마오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372년 칠지도(七枝刀 : 현재 石上神宮소재)나 칠자경(七子鏡)을 헌상 받은 사람이 닌도쿠 천황이라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시기적으로 존재가 불확실한 왜왕이 초고왕(근초고왕을 말함)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의 강한 국가권력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외에는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칠지도는 앞서 말한대로 근초고왕이나 또는 근구수왕이 일본 지역의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필자 주

(1) 실제로 한국에서 옥광맥이 발견된 것은 일제시대때부터이며, 현재 한반도 남부에서 유일하게 옥이 생산되고 있는 곳은 춘천시 동면 월곡리이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한겨레』(1994.5.27)
(2) 『한겨레』(1994.5.27)
(3) 호탄(和田,和阗,和闐)은 현재 신장(西藏) 자치구인 호탄주의 주도로 중국인에게 유티안(于窴)으로 알려져 있었다.
(4) Sarah M. Nelson 『The Archaeology of Korea』(1993) 133쪽.
(5) 山尾幸久「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989)
(6) 山尾幸久, 앞의책.
(7) 小林昌二「日本古代鐵生産集團に關する一試論」『社會科學硏究 9』, 太田英藏 「月の古墳の絹帛」『太田英藏染織史著作集 上』(文化出版局 : 1986) 231쪽, 角山幸洋「古代の染織」『講座 日本技術の社會史』(日本評論社 : 1983)
(8) 山尾幸久, 앞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