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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빈조선족백년사화(5)-할빈지구에서의 조선공산당조직

지식창고지기 2009. 6. 22. 16:05

할빈조선족백년사화(5)-할빈지구에서의 조선공산당조직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된후 중앙위원회에서는 해외에 있는 조선인들의 혁명투쟁을 구체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하여 해외부, 만주부, 일본부를 내오기로 결정지었다. 이 결정에 의해 상해에 있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의 조봉암을 만주에 파견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성립사업을 하게 하였다.

 

192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 화요파의 조봉암, 최원택, 서상파의 윤자영, 김하구, 이르크츠크파의 김철훈 등은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일면파 하동에 있는 김철훈의 집에 모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성립하였다. 형식상에서는 공산주의운동 각 파를 통일하였으나 파별싸움은 계속되였고 각 파별들은 각기 자기의 만주총국을 성립하였다. 이때 주요 파별로서는 길돈(吉敦)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서상파(서울 상해파), 반석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엠엘파(맑스 레닌주의파), 아성현 해구에 본부를 둔 화요파 (火曜派) 세개 파가 있었다.

 

이 세개 파별은 모두 할빈에 지방도 혹은 지방부를 두고 각기 자기 나름대로 혁명활동을 하였다.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산하에 동만, 남만, 북만도를 두고 도 산하에 각 지부가 있으며 지부산하에는 소조가 있었다. 할빈에 북만도를 두고 주요간부로서는 장시우, 김봉문, 우룡선이였다. 북만도는 의란, 탕원, 아성, 주하, 녕안, 해림, 목단강 일대에 세포조직을 두었다. 화요파 고려공산청년회 북만도(할빈)간부는 최웅진이였다. 기관지로서 ‘분화구(噴火)’를 출판하였다.

 

엠엘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주요간부 진공목이 할빈에 와서 활동하였고 엠엘파 고려공산청년회 북만도 간부인 리수길, 김인국, 류일근 이 할빈에서 활동하였다.

 

서상파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북만지방부를 두고 최동일, 김성준, 김중환이 주요간부로 있었으며 할빈에 세포조직을 가지고있었다. 서상파 고려청년회는 북만지방부를 두고 김성훈, 김형준, 박일춘이 간부로 있었다.

 

1929년 7월 20일 상해 중공호남구 한국특별지부서기 옥진(玉珍)이 동북3성을 시찰하고 중공중앙에 보낸 ‘동3성 한국교민의 정황’보고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당면임무는 농민대중을 조직하고 청년운동을 령도하며 각 민족혁명단체들을 공동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협동정세에로 나가게 하는것이였다”고 하였다.

 

1929년 7월 25일 중공중앙에서 만주성위로 파견되여 온 강우(江宇 즉 리극화)가 중공중앙에 보낸 ‘조선공산당 조직정황 등 문제’보고에는 “조선공산당이 창립된후 공산국제의 승인하에 조공은 대표를 파견하여 조공의 지부총국을 조직하고 한국혁명 각 단체를 령도하였다. 뿐만아니라 200만 한국교민,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지도하는데 커다란 공적을 이루었다”고 하였으며 “이 총국은 조직이래 사업이 매우 민활하고 활동이 매우 적극적이였다. 그리하여 1927년에는 이미 당적에 등록된 당원이 365명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사료에 의하면 이 만주총국의 산하에 농민조합에 참가한 농민이 4.000여명, 청년회에 참가한 청년이 2만여명에 달하였다.

 

1928년 봄 화요파 북만도는 할빈을 중심으로 하여 아성, 빈주, 빈강 등 3개 현의 여러 농민단체들이 결합하여 근합농민조합(近哈農民組合)을 조직하였다. 이 조합아래에는 9개 지부 69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동북에서 농민운동, 청년운동, 반일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있었으나 중국공산당과의 련계가 없는 형편이였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할빈시위의 락서(洛書)동지가 1929년 9월 5일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대표 장시우를 접견한 내용을 중공중앙에 보고하는 중공만주성위의 보고서에 “내가 본 일부 현상에서 그들의 조직이 매우 엄밀하고 사업정신이 아주 적극적이며 동시에 그들의 처지도 극히 곤난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번 접촉에서 그들은 아주 성실하였고 사업을 에워싸고 우리와 모든것을 토론하였다. 그들의 정치로선은 총적으로 아무런 착오가 없다. 우리 중국의 만주당은 유력한 동맹군을 얻었으므로 금후의 사업에 매우 큰 도움을 받을것이며 그들이 받게 될 도움이 더 많을수 있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여서 우리는 금후 마땅히 더욱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1930년 봄 할빈에서 일어난 황산저자조선농민쟁의단, 해구조선농민들의 감조감식투쟁, 3.1운동11주년시위운동, 5.1절 조선청년들의 일본령사관습격 등 혁명투쟁들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서 령도하였으나 구체적인 사업에 있어서 중공중앙에서 파견하여 온 중공북만특위 위원 리극화(강우)가 해구에 있는 조공만주총국(화요파)에 가있으면서 조공조직 기초를 토대로 하여 사업을 추진했고 조공의 장시우는 중공의 리극화를 적극 도와주었던것이다.

 

조공만주총국의 장시우(본명 장주련 별명 심혁)는 조공만주총국의 선전부장 겸 할빈북만도 책임자였다. 그는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연변에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당교 교원으로 있었다. 장시우는 1930년 2월 할빈에서 열린 중공과 조공의 련석회의에 참석하여 공산국제의 ‘일국일당’의 원칙에서 중국에 있는 조선공산주의 단체를 해소하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공당에 가입할것을 주장하였으며 이해 6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1931년 12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해방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 상업상이 되였고 조선전쟁시기는 조선인민군 후방총국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