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고구려의 건국과 멸망

지식창고지기 2009. 5. 6. 08:46

고구려의 건국과 멸망

 

1.고구려의 건국


「옛날 북이의 탁리국왕의 시비가 임신하였으므로 왕이 죽이려고 하니 시비가 변명하여 말하기를 크기가 닭 알 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왔기 때문에 임신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시비가 후에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것을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서 덥게 해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또 그것을 마구간에 넣었더니 말이 역시 입김으로 불어 주어서 죽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왕은 그것을 하늘의 아들인 줄 알고 그 어머니에게 명령하여 기르게 하였다. 그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소,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므로 왕은 그가 왕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여 버리려 하였다. 동명이 이 기미를 알고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서 다리를 놓았으므로 동명이 건너갈 수 있었다. 동명이 건너간 후 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서 추격하여 오던 군사들이 건너가지 못하였다. 동명이 이에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왕이 되었으므로 북이가 부여국을 가지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


2.
영토확장과 전성기


고구려는 소수림왕(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학설립(372), 율령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등 새외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다. 472(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패사시켜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아산만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이북의 땅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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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은 494년 부여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


3.
멸망과정


6
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89년 나제동맹이 체결되고 신라 진흥왕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 ·진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을 단행, 요서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
수나라는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

645
(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장량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 ·3(647년 ·648)에 걸쳐 이적 ·우진달·설만철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668
(보장왕 27) 나 ·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내정은 70여 년에 걸친 수 ·당나라를 비롯한 거란 ·신라와의 투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많은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독재는 민심을 혼란시켰고, 666년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남생·남건·남산세 아들의 불화로 지도층이 분열되었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고,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나 ·당 연합군은 668년 김인문이 이끈 27만의 신라군과 이적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군사 50만으로 평양성을 공격 ·함락시켰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 42()로 나누어 지배하는 한편, 2 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