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라는 이름이 지닌 뜻
삼국사기』와『수서』에 적혀 있는 기록은 ‘백제’라는 국호를 탁상에서 고안해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백가제해(百家濟海)’해서 ‘백제(百濟)’가 되었다는 주장은 고려(高麗)라는 나라의 이름이 산고수려(山高水麗 : 뫼가 높고 물이 아름답다는 뜻)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삼국사기』에는 서기전 9년에야 비류왕이 마한에 고라니를 보냈다는 기사가 나와 비류의 졸본부여(「▩서기전 9년부터 나타난 백제와 십제라는 이름」참고)는 나라를 세운 지 10년이 지난 뒤에야 마한과 만났음을 알 수 있고, 요서지역의 삼족기(三足器 : 발이 세 개 달린 토기)가 요동반도나 평안도/황해도에서 나오지 않고 바다를 건너 한강유역(경기도)에서 나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서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것은 사실이므로, 중국 사서에 나오는 기록은 백제 사신이 전해준 유래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고구려는 스스로 연호를 만들어 쓰고 부(部)의 이름도 계루, 소노처럼 한식(漢式)이 아니었으며 건국설화에도 ‘물고기와 자라가 모여서 다리를 놓은 일’처럼 ‘비(非)합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데 비해, 백제는 - 칠지도에 ‘태화(泰和)’라는 위(魏)나라의 연호가 새겨져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중국의 연호를 빌려서 쓰고 부(部)의 이름도 동부(東部), 서부(西部)로 한자의 뜻을 그대로 쓰는 중국식이며 건국기록에도 시조가 권력다툼에서 밀려 남쪽으로 달아난 사실을 그대로 적는 등 합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이 ‘백가제해(百家濟海)’라는 한잣말을 줄여서 나라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만약 백제가 한잣말이 아닌 이두문이라면 온조가 나라 이름을 지을 때 굳이 ‘백(百)’보다 적은 숫자를 뜻하는 ‘십(十)’이라는 한자와, ‘제(濟)’라는 돌림자를 쓴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백제가 - 중국 사서에서 설명한 대로 - ‘백가제해’를 줄인 말이고 온조와 열 신하가 비류와 함께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면 온조도 나라 이름을 지을 때 ‘건널 제(濟)’를 쓰는 것이 당연하며, ‘온 백(百)’이라는 한자는 이미 비류가 지은 나라 이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보다는 작은 숫자인 ‘열 십(十)’을 썼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고구려는 한잣말이 아니지만 백제(百濟)와 십제(十濟)는 한잣말이라고 생각하며, 만약 비류가 바다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요서에 뿌리내렸다면『삼국사기』에는 ‘백제(百濟)’대신 ‘졸본부여(卒本夫餘)’의 본기(本紀)가 실렸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이다.
※참고 자료
―『새로 쓰는 백제사』
―『삼한사의 재조명』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글 동이전』
서기전 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백제와 십제라는 이름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보면, 백제는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지었다가, 나중에 비류가 죽고 나서야 백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온조는 서기전 18년에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제 3자인 중국 사서는 비류/온조가 데리고 온 졸본부여인들이 바다를 건넌 다음에야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바꾸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모든 집안(:백가百家)이 바다를 건너왔다(:제해濟海)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지었다.”―『북사』「백제전」
“맨 처음 (나라에 속한) 모든 백성들(:백가百家)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백제라고 하였다.”-『수서』「백제전」
『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조의 편년기록을 보면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마한을 만나지 않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서기전 9년에야 마한을 만난다. 이는 백제가 처음 세워진 곳이 마한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을 뜻한다.
백제가 마한을 만나려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야 했을 것이며, 이는 중국 사서의 백제전에 나오는 시기가 서기전 9년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중국 사서의 기록대로 백제가 본거지에서 달아나 배를 타고 건너왔다면 ‘백제(百濟)’라는 이름은 서기전 9년부터 나타났을 것이다(배로 건너오고 나서야 “바다를 건너온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이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비류가 세운 나라는 서기전 9년 이전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고구려라는 이름은 고구려족의 지도자이자, 주몽(동명성왕)의 맏아들인 유리왕이 쓰고 있으니 유리와 싸우고 쫓겨난 비류가 ‘고구려’라는 이름을 썼을 리는 없을 테고, 백제라는 이름은 마한으로 달아난 다음에야 쓰기 시작했으니 이것도 후보가 될 수 없다.
굳이 추측해보자면 그가 “졸본부여”라는 이름을 썼을 가능성은 있는데, 이는『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비류의 계보를 졸본부여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있는데, 주몽을 보고서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 얼마 후에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두니, 맏이는 비류라 이름지었고, 둘째는 온조라고 이름지었다.”―『삼국사기』「백제본기」
“일설은 이렇다.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태(優台)로서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요, 그의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서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 실린 이설(異說)
“옛 『전기(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계묘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삼국유사』「기이」<남부여와 전백제> 조
비류는 서기전 18년 동생인 온조와 어머니인 소서노와 함께 졸본부여의 백성들을 이끌고 발해만 일대로 내려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옛 땅은 이미 고구려족에게 넘어갔으니 우리라도 망한 나라의 뒤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나라 이름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여왕(연타발은 그의 이름일 것이다)의 외손자였으므로 ‘부여 왕’이라고 칭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이름도 ‘졸본부여’라고 지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서기전 9년 발해만 일대(요서지방)에서 아산만으로 건너왔을 때에는 나라의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을 것이며, 나는 이 때 비류의 세력과 온조의 세력이 갈라져 십제(十濟)가 나타났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바이다(따라서 십제가 세워진 시기는 서기전 18년이 아닌 서기전 9년이다).
출처: 배달 한민족사
글쓴이 : 조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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