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메르카바 vs. AK-47의 대결이 벌어지려고 합니다...)
요즘 이스라엘의 대(對)하마스 전면전 선언으로 매우 시끄럽습니다. 사실 시끄럽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하고 몰인정한 소리이고, 정말 비극적인 일이지요. 저는 과격파는 다 싫어하기 때문에 하마스의 노선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저도 일제 35년을 겪은 한국인의 자손인지라, 일단 약한 편에게 심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대개의 한국인들은 마음 속으로는 하마스 편을 들고 있다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근 2천년 전에 자기들 조상이 그 땅 살았다는 이유로, 정말 2천년 동안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력으로 내쫓고 나라를 세운 유대인들의 행동은 사실 정이 가지 않습니다. 특히 강대국들, 그 중에서도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노골적으로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 더더욱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옛땅에 다시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 사실 2천년 동안 고향없이 떠돌다보면 어디가 고향인지 까먹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지요. 그 뿌리는 사실 상당히 깊습니다.
(이 영화 보신 분 있나요 ? 저는 DVD는 사놨는데, 아직 못봤습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사실 12세기 경부터라고 합니다. 유럽의 카톨릭이 점점 배타적이 되어가면서,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박해하면서부터지요.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유대인들도 아랍인들과 함께 십자군의 학살 대상이었습니다. 월터 스콧 경의 유명한 기사 소설 '아이반호'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여주인공인 유대인 미녀 레베카가 템플 기사단의 기사 (즉, Templar 지요. 소설 속 그 템플 기사의 이름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최소한 테사다는 아니었습니다) 에게 부당하게 납치되자, 레베카의 아버지가 템플 기사단의 단장에게 그 석방을 탄원하며 무릎을 꿇고 기사단장의 다리에 매달리자, 기사단장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더러운 손을 치워라. 난 내 검으로 후려칠 때 빼고는 유태인과 접촉하지 않는다."
사실 제가 유대인이라도, 저런 취급받으면서 유럽 땅에 머물고 싶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럽 및 지중해 지역에 많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주로 동유럽 쪽, 특히 러시아에서 다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각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몰려가기 시작합니다. 또 이때 즈음해서 본격적으로 시오니즘, 즉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꼭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아프리카 우간다 또는 신대륙인 아르헨티나 일부 등도 물망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래도 역시 구약에 나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 가장 강력한 후보였는데, 문제는 당시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제 저물어가는 제국 오스만 투르크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 바로 아래에는 영국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가 붙어있었지요. 제1차 세계대전 즈음해서는 이미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 60만명인가 중에 약 10%가 유대인이었고, 그 숫자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나중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대표되는 영국의 중동지방 침공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영화 속에선 엄청 멋있고 잘 생겼는데, 실물은 뭐 별로... 실제 활약도 뭐 별로였다고...)
로스차일드 일가가 나폴레옹 전쟁 전부터 영국 정부에 많은 돈을 꿔주면서 영국 내 유대인 세력을 키웠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창설이라는 밑그림이 대영제국에 의해 가시화된 것은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벨포르가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장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에서였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벨포르 선언이 되는 것이지요.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팔레스타인의 비유대인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없는 범위 내에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긍정적으로 고려한다' 라는, 어떻게 보면 애매모호하고 미적지근한 내용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선언이 현대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벨포르 이 할배는 어쩌자고 남의 땅을 제3자에게 무단으로 양도하고 X랄이야...)
그런데 이 선언,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건국과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포클랜드 해전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클랜드 해전이라고 하는 것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이 아니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같은 장소에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사이에 벌어졌던 해전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남대서양에서 영국의 보급망을 교란하려던 독일 순양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괴멸당한 전투였습니다.
(이렇게 멋있던 독일 중순양함 샤른호스트를 포함한 독일 순양함 4척이 남대서양 아래로...)
영국 입장에서는 좋은 결과였지요. 그런데 영국 해군성에는 나름 충격을 준 전투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바로 화약 때문이었습니다. 포탄을 발사하는데 사용된 장약을 당시에는 코다이트 (cordite)라고 하는 끈 모양의 무연 화악을 썼는데, 그 품질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당시 영국의 중순양함들에서 발사한 많은 포탄들이 독일 순양함에 제대로 명중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진은 1차대전 당시 영국 육군의 Shrapnel, 즉 유산탄. 탄피 속에 든 밧줄 꾸러미같은 것이 코다이트)
코다이트 화약의 부족 내지는 품질 문제는 영국 해군 뿐만 아니라 영국 육군 병사들의 라이플 소총탄이나 야포 탄약 등에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체임 바이스만 (Chaim Weizmann) 이었습니다.
(오른쪽이 바이스만, 왼쪽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
이 양반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벨포르 경에게 접근하여 시오니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벨포르는 콧대 높은 영국 귀족인지라 (원래 백작...) 유대인들에게는 우간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정도였습니다. 결국 뭔가 영국을 위해, 뭔가 결정적인 큰 공을 세우기 전에는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겠지요. 그런데 포클랜드 해전의 충격이 1914년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양반은 원래 화학 박사로서, 미생물에 의한 발효를 공업용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정립하신 분입니다. 물론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유대인이지요. 이 양반은 1916년에 영국 해군 병기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아세톤의 대량 생산 공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전쟁하다 말고 왠 아세톤이냐고 ? 아세톤은 여성들의 매니큐어를 지울 뿐만 아니라, 코다이트 화약 제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약품이거든요. 즉, 영국 군부의 '쌀'이라고 할 수 있는 화약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 것이지요. 그 정도면 아마 충분했나 봐요 ? 1917년, 벨포르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창설을 공식화 해줍니다. 바이스만 박사는 이 공로로 1920년 국제 시오니즘 기구의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나중에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한번 더 역임합니다) 1949년에는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자, 그래서 1914년 남대서양 외딴 섬 근해에서 벌어졌던 해전의 결과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간 것이 조금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요 ? 흠흠... 사실 이 이야기는 제가 어릴 때 읽었던 어떤 책의 줄거리입니다. 하도 오래 되어 책 제목이나 저자는 기억이 안나요. 그 이야기에 Wiki를 뒤져 얻은 정보를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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