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의 제목은 우리 애가 좋아하는 학습만화 시리즈물에서 따왔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사진이지요... 1916년 3월 베르덩 전투에서 어느 무명 프랑스 장교의 전사 장면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반인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프랑스와 독일은 프랑스 북동부의 베르덩(Verdun)에서 서부 전선의 운명이 걸린 혈투를 벌입니다. 이 9개월 동안 참전한 병사들의 숫자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나 독일 모두 지친 병력을 빼내고 새 병력을 집어넣는 로테이션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약 2~3주 단위로 로테이션을 실시하여, 프랑스 전군의 70%가 베르덩에 참전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이 베르덩 전선에 항상 유지했던 병력은 각각 대략 10만 명이 넘는 정도였습니다. 10개월 동안 이들 중 몇 명이나 죽거나 다쳤을까요 ?
베르덩의 전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기관총과 유산탄 포격 속으로 재래식 돌격을 감행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여, 전장은 글자 그대로 도살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양측 통산 5천만 발이 넘는 포탄이 발사될 정도로 집중된 포격 속에서, 그 피해는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37만8천명, 독일군은 약 33만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체 사상자의 약 43% 정도가 전사자였습니다.
(이 수많은 죽음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프랑스군이 2~3주 로테이션으로 항시 10만명을 유지했다고 했으니, 사상자 37만8천 명을 9개월=39주라는 숫자로 나누어보면, 대략 2~3주 동안의 한 로테이션에 참전한 10만 명 당 2만4천 명의 전상자가 발생했고, 그 중 대략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100명이 전투에 참여하면, 그 중 10명은 죽고, 14명은 부상을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체로 따지면, 4년 전쟁 동안 전체 인구 대비 프랑스의 전상자 비율은 약 4%, 독일은 약 3%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는 기관총이나 후장식 라이플 소총 등은 존재하지 않았고, 또 인마 살상용 유산탄도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전사자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
먼저,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부르는 1799년 ~ 1815년 사이의 전체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를 보시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이 숫자는 별로 정확하지 않다는 점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국가 |
전사/병사/실종 |
총인구 |
총인구 대비 % |
프랑스 |
770,000 |
38,000,000 |
2.0% |
러시아 |
400,000 |
41,300,000 |
1.0% |
프러시아 |
200,000 |
5,000,000 |
4.0% |
오스트리아 |
300,000 |
19,000,000 |
1.6% |
스페인 |
300,000 |
10,000,000 |
3.0% |
영국 |
300,000 |
12,000,000 |
2.5% |
합 |
2,270,000 |
125,300,000 |
1.8% |
이 표를 보면 무려 22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탈리아나 라인 연방의 독일 국가들, 그리고 폴란드와 같이 프랑스의 동맹국들의 전상자까지 합하면 약 250만 명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거의 4천만 명이었으니까 (이 인구 통계치도 사실 별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무려 15년 동안 전쟁질을 한 것 치고는 전체 사망자 숫자가 겨우 2%로 매우 적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위의 표에서 인구 대비 사망자 숫자를 보면, 아무래도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예라는 자존심으로 프랑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프러시아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가장 컸습니다. 또 비정규전의 형태로 가장 긴 시간 동안 나폴레옹과 싸운 스페인의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러시아의 피해가 의외로 적다는 점에 놀라셨지요 ? 그건 민간인 피해를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민간인 피해까지 합친다면 러시아 못지 않게 스페인의 피해가 무척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두 국가는 국민 전체가 민족적으로 나폴레옹에게 저항했으니까요. 대략 유럽 전체에서 약 100~20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피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까,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은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스페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명한 고야의 그림 마드리드 1814년 5월 3일의 처형입니다.)
위의 숫자는 사실 매우 부정확한 것입니다. 당시에 컴퓨터가 있었겠습니까 바 코드(bar code)가 있었겠습니까. 인구 조사도 안된 시절이었고, 워낙 전쟁이 많았던 시절이라서 당시의 통계치는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만도 프랑스군 사망자는 50만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숫자에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폴란드군이나 뷔르템베르크 등의 라인 연방의 독일군도 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더더욱 부정확합니다. 게다가 러시아의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프랑스 실종자들 중 몇 명이나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이탈하여 러시아 아가씨들과 눌러 앉아 러시아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학자들은 나폴레옹 전쟁 15년 동안 프랑스의 사망자 숫자를 적게는 5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까지 고무줄처럼 추정하는데, 그래도 대략 100만 명은 넘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생존률은 대략 어느 정도 될까요 ? 여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전장에서 무사히, in one piece로 빠져나오려면 뭐니뭐니해도 줄을 잘 서야 합니다. 가령 1806년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모두 빛나는 영광을 얻었지만, 어디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서 희생자의 수는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했던 예나 전투에서, 10시간 남짓한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프러시아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만, 참전했던 프랑스 병사들 중 절반 이상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도 단 한 발의 머스켓 소총도 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예나 전투 직후 나폴레옹 - 승리가 가장 쉬웠어요)
바로 인근 지역에서 같은 날 벌어진 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는, 다부(Davout) 원수가 지휘하는 약 2만7천명의 프랑스군이, 5만명이 넘는 프러시아군을 패주시켰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과부적이었던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약 4~5천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구댕(Gudin) 장군의 사단은 약 40%의 병력이 상실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전투에서의 프랑스, 프러시아의 사상자 집계는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예나 |
프랑스 |
프러시아 |
아우어슈타트 |
프랑스 |
프러시아 | |
총병력 |
60,000 |
90,000 |
총병력 |
27,000 |
53,000 | |
전사/부상 |
2,500 |
13,000 |
전사/부상 |
4,350 |
15,000 | |
포로 |
|
15,000 |
포로 |
|
3,000 | |
전상자 비율 |
4% |
14% |
전상자 비율 |
16% |
28% |
대략 보면 이긴 쪽은 약 10% 남짓, 진 쪽은 대략 20% 정도의 사상자를 내는 것으로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이긴 쪽의 사상자에 비해 패배한 쪽의 사상자 수가 2배 정도 많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혹시 사상자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시나요 ?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상자의 수가 많아서 졌다기 보다는, 졌기 때문에 사상자의 수가 많아진 것입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니라, 기병대 때문에 그랬습니다. 즉, 패주하는 적병의 뒤에는 거의 반드시 승리한 측의 기병대가 뒤따라가며 무자비한 칼질을 해댔습니다. 원래 기병대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바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었거든요.
(프랑스 엽기병들... 도망치는데 등 뒤에 얘들이 나타나면 끝장)
이때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기병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적의 왼쪽으로부터 접근했습니다. 그래야만 오른손에 쥔 군도나 창으로 적을 공격하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전법은 보병보다도 기병에 대한 추격전에서 더 유용했습니다. 이쪽이 오른손에 쥔 칼로 적 기병을 등 뒤 왼쪽에서 공격할 때, 공격당하는 기병은 오른손에 쥔 군도나 창으로는 저항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요. 기병들에게 추격당하는 보병들은 정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대포에 맞아 두동강이 나거나 머스켓 소총 또는 총검에 가슴을 관통당하면 고통없이 빠른 최후를 맞이했지만, 기병의 군도에 얻어맞으면 치명상이 아닌 긴 자상(刺傷)을 입고 쓰러져, 오래 동안 고통과 갈증에 시달리다 결국 과다출혈이나 감염으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검을 쓰는 경기병이나 흉갑기병보다는 창기병에게 추격당하는 보병들은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에 찔린 깊은 상처는 상대적으로 빠른 죽음을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너 임마 창기병인 내게 걸린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빨리 죽어라)
반면에, 패배하더라도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경우에는 승자에 비해 사상자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또, 사상자 비율이 승자는 10%, 패자는 20% 정도라는 것도 항상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중 가장 빛나는 승리 중의 하나입니다만, 나폴레옹이 항상 손쉬운 승리만을 거두었던 것은 아닙니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 벌인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 전투는 글자 그대로 혈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배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항상 자신의 '밥'으로 여기던 오스트리아군의 분전에 크게 당황하여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는 승부를 내지 못하고 일단 후퇴한 뒤, 지원 병력을 끌어 모아 다시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결국은 승리합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개인적으로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도 패배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저 '작전상 후퇴'라고 주장했을지 모르지만, 나폴레옹 휘하의 병사들은 정말 큰 피해를 입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
프랑스 |
오스트리아 |
총병력 |
66,000 |
90,800 |
전사/실종 |
7,000 |
6,200 |
부상 |
16,000 |
16,300 |
포로 |
|
800 |
전상자 비율 |
35% |
25% |
보시다시피 이 전투에서는 이긴 오스트리아나 진 프랑스나 30% 정도의 참혹한 피해를 입습니다. 특히 이 혈투 속에서 나폴레옹은 자신과 반말을 쓰던 친구 사이였던 맹장 란(Jean Lannes)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다리에 대포알을 맞고 죽어가는 란을 방문한 나폴레옹. 란은 거의 10일간 고통받다 죽습니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전장에서 후퇴했고, 기진맥진한 오스트리아군도 추격의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경기병들에게 난도질을 당하는 치욕은 겪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컸던 것은, 나폴레옹이 무리하게 계속 공격을 명령했기 때문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전투에서의 승리하는 자는 전투에서 피해를 적게 입은 자가 아니라, 이기겠다는 의지를 끝까지 유지한 자라고 말했다는데요, 그 말을 바그람 전투에서 증명해보입니다.
바그람 |
프랑스 |
오스트리아 |
총병력 |
150,000 |
135,000 |
전사/부상 |
23,750 |
27,500 |
실종 |
10,000 |
10,000 |
포로 |
? |
7,500 |
전상자 비율 |
23% |
28% |
즉, 바그람 전투에서는 아스페른-에슬링 때보다도 더 큰 사상자를 냅니다만, 그래도 결국 오스트리아군으로 하여금 후퇴를 강요하여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오스트리아군보다 프랑스 측의 피해가 약간 더 컸지만, 결국 전장에서 물러선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고, 이 전투 결과로 제5차 반(反)프랑스 동맹을 끝장냈습니다.
(바그람 전투... 결국 김성모 화백의 교훈대로, 싸움은 근성이란 말인가)
전투에서 살아남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헤밍웨이의 불후의 명작 "무기여 잘있거라"의 짧은 제1장 마지막 구절은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선에서의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 숫자로 장식됩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콜레라가 발병했지만, 전염을 막아내어 결국 사망자는 7천명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무려 7천명이 전투도 아니고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 '겨우'라든가 '막아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고 처음 읽을 때는 놀랐었습니다. 그래도 '무기여 잘있거라'의 배경인 제1차 세계대전만 하더라도 세균의 존재나 소독의 개념, 각종 약품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만,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 당시 병사들의 희생은 정말 엄청났을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질병으로 희생된 병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당시 전쟁에서 영국군이 기록물을 많이 남겼는데요, 그 중 다음 기록이 대략 당시 전장에서의 병사자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아래는 1804년부터 1815년 사이의 영국 육해군 병사들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치입니다.
사인(死因) |
영국 해군 |
% |
영국 육군 |
% |
전투 중 사망 |
6,663 |
7% |
25,569 |
12% |
파선, 익사, 화재 |
13,621 |
15% |
? |
|
병사 |
72,102 |
78% |
193,851 |
88% |
합계 |
92,386 |
|
219,420 |
|
이건 생각한 것보다 더 끔찍하지요 ? 전투 중 사망자 숫자의 7~12배 정도가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당시 영국 해군에서 이렇게 전투 중에 사망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영국군의 통계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음은 1812년~1814년 사이에 영국군 병원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숫자입니다. 다만, 이는 영국군 병원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수치일 뿐이지, 전체 영국군 병사자의 수치가 아닙니다. 당시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 현장에서 부상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죽거나, 텐트나 나무 그늘 아래서 병으로 신음하다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병원에 실려온 행운아들이 전체의 몇%나 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인(死因) |
1812 |
1813 |
1814 |
합계 |
이질 |
2,340 |
1,629 |
748 |
4,717 |
열병 |
2,235 |
1,802 |
409 |
4,446 |
외상 |
905 |
1,095 |
699 |
2,699 |
티푸스 |
999 |
971 |
307 |
2,277 |
괴저 |
35 |
446 |
122 |
603 |
폐렴 |
58 |
133 |
96 |
287 |
결핵 |
49 |
158 |
72 |
279 |
설사 |
79 |
106 |
34 |
219 |
골절 |
- |
6 |
64 |
70 |
졸증 |
19 |
21 |
16 |
56 |
파상풍 |
4 |
23 |
24 |
51 |
간염 |
5 |
23 |
8 |
36 |
매독 |
19 |
11 |
5 |
35 |
류머티즘 |
5 |
13 |
15 |
33 |
간질 |
3 |
6 |
2 |
11 |
콜레라 |
4 |
- |
- |
4 |
합계 |
6,759 |
6,443 |
2,621 |
15,823 |
위 표를 보시면 이질과 열병이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습니다. 열병은 그렇다치고, 이질은 약간 의외이지 않습니까 ? 이건 당시 야전에서의 식수 공급과 상관이 있습니다. 최근에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의사 협회에서 자체 연구를 거쳐 발표한 것에 따르면, 현대 인류의 평균 수명이 과거에 비해 크게 길어진 이유 중 첫째가 바로 수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건강과 크게 관계된 것인지 알려주는 사례이지요. 당시 유럽인들은 세균이라는 것의 존재를 몰랐고, 또 유럽의 물은 그다지 깨끗한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야전에서의 불결한 식수가 많은 희생자를 낸 것입니다.
저 표에서 특히 마음이 아픈 부분은 파상풍에 의한 사망자가 너무 적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전쟁터에서 치명상이 아닌 부상을 입었다가 결국 사망하게 되는 제1의 원인은 파상풍이라고 합니다. 요즘도 교통사고 사망자의 30%가 결국은 파상풍이 원인이 되어 죽는다는 이야기를 어떤 의사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이 의사분은 전국민이 파상풍 예방주사를 의무적으로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분이었는데, 그 때문에 수치를 부풀려 이야기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군 병원에서 파상풍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저렇게 적다는 것은, 대부분의 부상병들은 제대로 병원에 와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거든요.
실제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대개 전투가 종료되고 나서 한참동안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전투 현장에 내버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패배한 측 병사들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고, 승리한 측도 제1의 과제는 패주하는 적의 추격이었기 때문에, 부상병들은 즉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웠습니다. 응급처치만 제대로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많은 병사들이 덧없이 죽어야 했고, 또 어차피 항생제도 소독제도 없던 시절, 치료라고는 총알을 빼내고 뭉개진 팔다리를 잘라낸 뒤 봉합하는 것 외에는 없었으므로, 많은 부상병들이 군의관의 칼날 아래 괜히 고통만 받은 뒤 결국 죽어야 했습니다. 대개의 전투는 오후 늦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장에 버려진 채 밤을 맞이하게 되면 더욱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시체나 부상자들을 약탈하려는 주변 지역의 민간인들이 어둠을 틈타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저항하는 약탈에 저항하는 부상자를 죽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추격해오는 적의 기병 못지않게 위험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꺄~악 의사인데다 귀족에다 잘생겼어 !! 도미니크-장 라리.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남자들의 질시의 대상)
이 시기에 부상병들을 위한 희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1792년 프랑스의 젊은 군의관 도미니크-장 라리(Dominique-Jean Larrey)가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죽는 병사들이 많은 것을 안타까와하다, 당시 비교적 새로운 병종이었던 기동 포병(flying artillery)을 보고 감응을 받아 기동 앰뷸런스를 만듭니다. 그 외에도 라리는 응급처치 분류법(triage)을 정립하는 등 근대적 육군 응급부대의 기초를 닦습니다. 라리가 창설한 기동 앰뷸런스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이집트에서 벌어진 아부키르 전투에서, 라리는 15분 이상 응급처치를 받지 못한 병사는 한명도 없었다고 보고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앰뷸런스 부대는 프랑스군의 생존률 향상 뿐만 아니라 사기도 크게 진작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나폴레옹은 라리의 공로를 높이 사 1809년 바그람 전투 현장에서 그를 자작에 봉합니다. 라리는 1815년 워털루 전투 때도 나폴레옹을 위해 봉사했고,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라리의 기동 앰뷸런스의 활동을 본 웰링턴 공작은 앰뷸런스 쪽을 향한 포격을 중지하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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