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과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나라는 어디일까요 ? 바로 오스트리아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마렝고, 아우스테를리츠, 바그람 등등 나폴레옹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준 전투의 상대는 대개 오스트리아였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의 강자이자, 전체 유럽을 좌지우지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나라였기 때문에, 유럽 대륙의 패권을 원했던 나폴레옹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만큼은 아니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독일권의 소패자(小覇子)였던 프러시아도 결국 나폴레옹과 충돌했고, 결국 예나-아우어슈타트에서 실력의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풋, 독일 놈들은 영원한 나의 밥)
이렇게 오스트리아-프러시아를 꺾은 뒤, 나폴레옹이 생각하는 유럽의 정치-외교 판도는 무엇이었을까요 ? 나폴레옹은 뜻밖에도 (사실은 당연히) 프랑스와 러시아가 유럽을 지배하는 2대 강대국이 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유럽 양분론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약간 뜻밖이기도 하고, 사실 당연하기도 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의 대표적인 후진국으로서, 중세의 농노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등 뒤떨어진 경제력과 사회적, 문화적 후진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중서부 유럽과는 전혀 상이한 종교, 문자, 풍습 등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반쯤은 비유럽 국가 정도로 생각했었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문화적 후진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있으실텐데, 러시아 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살아난 것은 19세기 중후반이 되어서였고, 나폴레옹이 쳐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인들은 서구 문화만을 동경했습니다. 당시 왕가나 귀족가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일상에서도 프랑스어를 썼고, 그런 집 아이들이 집에서 러시아어를 쓰면 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러시아 욕만 할게 아니라, 요즘 우리나라의 영어 조기 교육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생, 톨스토이는 1828년 생입니다.)
그런데 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정치/군사/외교에서 파트너로 삼으려 했을까요 ? 바로 인구 때문이었니다.
한때 인구는 곧 국력이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중국이야 요즘 워낙 뜨는 나라니까 그렇다고 치고, 인도나 브라질은 넓은 국토 뿐만 아니라 많은 인구로 인해서 중요한 나라 취급을 받습니다. 인도나 브라질이 아무리 넓은 나라라고 해도, 인구가 시베리아 수준이라면, 그건 중요한 국가라기보다는 그저 이용 대상이 될 것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우디 아라비아의 인구가 지금의 10배 수준이라면, 지금 사우디 아라비아는 주요 산유국 정도가 아니라, 미국-러시아-중국과 패권을 다툴 정도의 강대국이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인구가 많으면 좋은 점이 많습니다. 많은 인구는 큰 경제 시장과 풍부한 노동력을 뜻하고, 또 아무래도 인구가 많을 수록 그 중에 뛰어난 인재들도 많이 생겨날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보다도, 전시에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강력한 군사력을 뜻합니다.
핵무기는 커녕, 폭격기도, 장거리 미사일도 없던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인구 수가 곧 군사력이라는 점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무기라고 해봐야 잘 맞지도 않는 머스켓 소총과 빈약한 화력의 대포, 그리고 총검이 전부였던 시절, 무장 병력의 숫자는 전장에서의 승패를 판가름짓는 제 1요소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무장 병력의 숫자가 많으려면 그 나라 국민들의 머리수가 많아야 했습니다.
이쯤에서 1810년경 당시 유럽 각국의 인구 통계를 볼까요 ? 단, 이때의 인구 통계는 전혀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보셔야 합니다. 통계학이 가장 앞섰다는 영국에서도 1801년에애 최초로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고, 프랑스는 무려 1876년에야 공식 인구 조사 결과가 나왔으니까요. 인쇄술, 통계, 그리고 세금 ( http://blog.daum.net/nasica/6604521 )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표: 1810년 당시 유럽 주요 국가의 인구 추정치)
이 표를 보면 왜 나폴레옹이 "대유럽 연방"의 2대 패권국으로 프랑스와 러시아를 구상했는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사실 지금은 프랑스보다 독일 인구가 더 많쟎습니까 ? 이건 나폴레옹 당시에는 독일이 통일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 위 표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19세기 중후반에 프랑스가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인구 증가가 정체된 반면, 독일에서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1871년 보불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러시아에게 완패를 당한 것도, 그런 인구 변화와 상관이 많습니다.
(스당에서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는 비스마르크...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냐고 ? 글쎄... 독일 남자들이 프랑스 남자들보다 정력이 좋아서 ?)
결과적으로, 나폴레옹도 방대한 영토, 무엇보다 엄청난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저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대해 나름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프러시아를 먼저 예나에서 짓부순 뒤,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의 베니히센 장군의 군대를 패배시킨 나폴레옹은 틸지트에서 역사적인 회담을 갖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알렉상드르 1세와의 "수상 회담"입니다.
(어서 오시게, 러시아의 황제여, 우리가 손을 잡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네.)
여기서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 두 황제는 사실상 유럽을 자기들끼리 나눠 먹습니다. 즉 프러시아의 엘베강 서쪽 땅을 자기들 멋대로 뚝 잘라 베스트팔리아 왕국에게 넘겨주고, 그 왕으로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을 세웁니다. 또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인, 이오니아 해의 달마티아 및 그 연안 섬을 오스트리아로부터 빼앗아 프랑스에게 주고, 대신 러시아는 핀란드와 쇠망해가는 오토만 제국에 대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양보를 얻어냅니다. 이것만 보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자국의 금융 문제 때문에, 패전국에게 전쟁 보상금이라는 명목으로 '삥'을 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러시아에게서는 아무것도 뜯어내지 않았습니다. 프리틀란트에서 완패를 당한 국가에게 한 것치고는 상당히 부드러운 결과였지요. 나중에 결국은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을 하지만, 애초에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하고 맨 처음 결혼 가능성을 떠본 상대도 바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쪽이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러시아와의 굳건한 결합이 무엇보다 더 절실했던 것이지요.
(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가 브랜드 빨은 죽이지만, 역시 실속은 로마노프 가문의 공주가 좋은데...)
다만, 이 틸지트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아주 중요한 부탁(내지는 강요)을 러시아에게 했고, 알렉상드르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에 대항한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은 너무 큰 주제이므로 나중에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시지요.)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러시아를 대륙 봉쇄령에 끌어들임으로써, 나폴레옹 제국의 힘은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당시 유럽 인구 6명 중 1명은 프랑스인이었고, 또 1명은 러시아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 인구 1/3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동맹을 맺었으니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
사실은 두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돈이지요.
(나폴레옹을 꺾은 실질적인 주인공... 웰링턴이 아니라 기니 금화입니다.)
저는 서머셋 모움의 '인간의 굴레'를 무척 좋아합니다. 이 소설은 사실 19세기말 ~ 20세기 초반 영국 배경의 성장 소설인데, 나중에 제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꼭 이 책을 읽게하고 싶습니다. (혹시 압니까 ? 그래서 나중에 제 아들이 의사가 될지 ?) 이 소설 내용 중에 어느 응급실 수간호사가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실려오는 자살자 중에 사랑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다. 모두 돈 때문에 자살한다."
돈은 사람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고, 사람보다 더 소중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목표입니다...라고 하면 '저런 속물'이라고 하시겠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폴레옹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영국은 당시 인구 1천2백만 ~ 1천5백만 정도로, 프랑스 인구의 1/3 정도에 해당했습니다. 그 인구에 따른 1805년 영국 병력 통계치가 있는데, 보실까요 ?
(표: 1805년 영국 인구 및 무장 병력 통계)
결국 영국의 건강한 남자 10명 중 1명은 현역으로 복무 중이었고, 실제로는 10명 중 2명이 무장 병력으로 동원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대략 건강한 남자 14명 중 1명이 무장 병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의 20%에 비해, 그 비율이 7% 정도였지요.
이렇게 전체 인구 대비 무장 병력 비율은 바로 돈과 상관이 있습니다. 전에 나폴레옹 시절 젊은이들이 앞니를 뽑아야 했던 이유 ( http://blog.daum.net/nasica/6862352 )에서 잠깐 이야기되었듯이,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처음에는 자기 영지의 농촌 청년들을 징집하여 군대를 만들었다가, 결국은 용병으로 대체해야 했습니다. 일을 해서 세금을 내야 할 청년들이 군대에 가 있으니 세금이 확 줄어들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자기 국민들 중 상당수를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산업 혁명이 막 시작되었고, 또 로열 네이비 덕분에 수익성 좋은 인도 무역을 독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재정적으로 유럽 최강의 국가였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많은 인구수로 인해 병력을 무한정 퍼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에게 겁을 줄 때, '난 1년에 20만명 씩 새로운 병력을 뽑아낼 수 있다'라고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영국 육군 전체에 해당하는 병력을 거의 매년 새로 육성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랬을까요 ? 다음에 1804년 프랑스의 징집 대상자에 대한 통계가 있습니다.
(표: 1804년 프랑스 징병 대상자 통계)
위 표를 보면, 나폴레옹이 허풍을 쳤던 것을 '징병 대상자'의 숫자일 뿐이고, 실제로 군에 들어와 군복을 입었던 것은 그 숫자의 1/5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징집법에는 기혼자는 징병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일단 숫자가 확 줄어듭니다. 또 질병이나 신체 조건이 안좋아서 면제되는 청년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남성들의 '기대 수명'은 40여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의 위생 상태나 의료 기술, 영양 상태가 안좋았던데다, 전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도, 그리고 그의 의붓아들 으젠 보아르네도, 나폴레옹의 친아들 로마 왕도 제 명보다 훨씬 일찍 병으로 죽지요. 그리고 위 표에는 안나와 있지만, 군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면제되는 사람들도 1만여명 정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 지방 관리들은 '정말 프랑스 남자들을 다 군대에 보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농사는 누가 짓고, 집 수리는 누가 하며, 공장은 누가 돌립니까 ? 각 지방 관리들과 주민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징병에 저항했고, 나폴레옹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 위의 표는 아직 나폴레옹이 한창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의 상황입니다. 1812년 이후로, 국민들의 징병에 대한 저항은 더욱 격렬해져서, 이미 정예 병력이 다 고갈된 나폴레옹은 결국 '마리 루이즈'로 불렸던 소년병들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 빠집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천하의 나폴레옹도 뭐 병력이 있어야 해 볼 것이 아닌가 ?)
나폴레옹이 영국으로 인해 고생을 한 것은 단지 영국의 병력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나폴레옹을 직접 괴롭힌 영국군은 스페인에 달라붙은 웰링턴의 몇만명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영국의 돈이었습니다. 영국에게서 뒷돈을 받는 유럽 정치인들이 너무나 많았던 탓에, 힘으로 눌러놓았던 유럽 각국의 궁정들이 결국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틸지트에서 굳은 우정을 맺었다고 나폴레옹이 '착각'했던 러시아의 젊은 황제도, 영국과의 무역이 너무나 짭짤했으므로, 결국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서 탈퇴하게 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대포보다는 영국의 기니 금화의 위력이 더 강했다는 뜻입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 펜은 검보다 더 강하다고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돈은 확실히 대포보다 더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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