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은 매력적이었는가
홍위병들의 격정에 대한 유럽 좌파들의 향수 중국 자본화에 기여한 후유증은 왜 돌아보지 않나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필자 약력 )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노자 교수는 한국말과 글에 능통하고 한국역사에도 박식한 한국학 박사로서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모스크바국립대에서 한국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에서 강사를 지낸 바 있다.
기성 세대 중국인들의 공동 기억의 핵심을 이루는 문화혁명(1966~76, 이하 문혁)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청년 시절 필자에게 ‘홍위병’이나 ‘대자보’ ‘조반’(造反·혁명적 반란)과 같은 용어들은 귀에 익은 듯했다. 중국과 주도권을 다투면서 문혁 비판을 주된 노선으로 삼은 소련에서 자란 터라 문혁을 알아야 했다.
마오쩌둥은 진정한 ‘사회주의자’인가…
소련의 보수적인 관료들에게는 수정주의를 악으로 규정한 ‘문혁’이 극좌 난동이며 모험주의적 마오쩌둥 일파에 의한 국가행정 파괴였다. 1980년대 소련의 반대파 지식인들마저도 마오쩌둥의 반소(反蘇) 정책을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보면서도, 마오쩌둥에 대한 무분별한 숭배나 수많은 ‘반동 분자’에 대한 폭력을 ‘전근대적인 근황(勤皇)주의와 근대적 파시즘의 결합’으로 여겼다.
필자는 1990년대 초반에 글을 통해서나 직접 중국인 지식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동방홍>(東方紅·마오쩌둥 찬양가)이 울려퍼지고, “사령부를 공격하라!”(砲打司令部·마오쩌둥이 1966년 8월5일에 친필로 쓴 대자보)는 그 시절의 기억은 그들의 상처였다. 당시의 열정과 환희는 사라졌고, ‘구새자’(狗?子·개의 자식-출신 배경이 좋지 않은 반대자에게 사용한 모욕적인 용어)를 때려죽였던 본인들의 잔혹성에 대한 때늦은 자괴감, 인간 존중 부족에 대한 반성은 그 회상의 주류를 이룬다.
황석영의 <손님>과 같은 역사 소설에서의 “좌익이든 우익이든 우리 모두 미성숙하여 폭력병에 걸렸다”는 식의 한국전쟁 때의 학살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꼭 덩샤오핑 집권 이후 중국의 급속한 자본화를 긍정하는 다수의 ‘개방파’만의 자세는 아니었다. 예외도 있지만 좌파적 노선을 살리려는 중국 내외의 지식인들도 마오쩌둥의 ‘무산계급 전정(專政·독재)’ 속의 진정한 민주주의나 인권 존중의 부재를 ‘중국적 사회주의’ 실패의 중대한 원인으로 꼽고 있기도 하다. 마오쩌둥의 전근대적근대주의를 질타하는 소련 말기의 지식인들과 접점이 많은 문혁관(觀)인 셈이다.
“민주주의·인권이 확립되지 못하면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마오쩌둥을 아예 ‘사회주의자’로 보지 않았던 필자는 크게 놀란 바가 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잘 보장돼 있는 노르웨이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마오쩌둥과 문혁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오슬로대학교가 마오쩌둥 사상 열풍의 중심지이던 1970년대 초반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도 노르웨이 좌파 일각에서는 문혁의 잔혹성을 비판하면서도 “혁명 과정에서의 과격한 처사는 이해될 수 있지 않은가”라는 방식의 논리로 ‘주자파’에 대한 공격을 이해하려고 한다.
덩샤오핑 집권 뒤 중국에서 심해진 노동착취와 빈부격차 같은 계급분화의 문제는 그들에게 문혁의 ‘궁극적 정당화’로 보인다. 또한 자본주의 이념 주입의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파헤친 프랑스 사상계의 거두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는 문혁을 ‘상부 구조인 대중적 이념을 바꾸려는 현대사 최초의 진정한 혁명’으로 치켜세웠는가 하면, ‘포스트’ 담론들의 원조 미셸 푸코는 ‘근대적 억압과 결별하려는 시도’로 봤고, 후기 자본주의 이론을 내놓은 유명한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60년대적 해방정신의 진수’ ‘대중 주체화의 위대한 실험’으로 높이 평가했다. 비범한 사상가들의 의견이라 필자는 이와 같은 문혁의 호평을 손쉽게 뿌리치지 못했지만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린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이들이 과연 문혁의 잔혹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문혁에 대한 현실적인 서술들이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서방으로 나온데다, 문혁을 “보수화돼가는 혁명 이후의 사회를 다시 급진화(radicalization)하려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가 실패한 실험”으로 본 지식인 중에는 아리프 디를리크(Arif Dirlik) 같은 중국 현대사의 권위자들도 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선혈이 낭자한 풍경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를 ‘해방적 시도’로 부른다면 일종의 ‘좌파적 오리엔탈리즘’의 프리즘을 통해서 문혁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이질적이고 먼 중국에서의 인권 유린을 구미에서의 인권 유린과 ‘무게가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에 대해 긍정 일변도의 태도를 보인 유명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 등의 1960년대 일부 ‘거물 좌파’들에게 그러한 요소들이 강력하게 느껴진다.
홍위병의 열정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지만 이들이 재직하는 프랑스 등지의 대학교에서 좌파를 자칭하는 자들이 자산계급이나 우파 가정 출신이라는 죄목(?)으로 동료 학생을 대량으로 타살(打殺)했다면 이들의 반응이 같았을까? 그러나 문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중국과 각종 개인적 인연을 갖고 중국어로 글을 쓰는 친중국적 학자들이 내리는 것으로 봐서는 오리엔탈리즘적 이중 잣대만을 탓하기도 쉽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 문혁의 이면이 밝혀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문혁의 매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아마 좌파의 세계를 매료시킨 것은 마오쩌둥의 어떤 사상(마오쩌둥은 위대한 추상적 이론가라기보다는 실천적 정치인에 가까웠다)보다도 서구에서 보기 드문 홍위병의 거의 무한하다 싶은 반란의 열정이었을 것이다. 그 열정이 과연 어디에서 쏟아져나왔는가? 이념과 현실의 괴리, 이념을 따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이 주된 심적 배경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공식 이념은 ‘평등’과 ‘무산계급의 혁명’이었지만, 인구 이동을 억제하는 호구 제도와 차등적 소비를 공식화한 배급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현실 속에서 간부층과 ‘무산계급’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단위(공장, 대학교)마다 주요 ‘권위’들이 이미 ‘작은 임금’으로 군림했으며, 전국적으로 베이징 같은 시설과 배급이 나은 대도시의 중산층들은 일종의 특권층으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상대적 박탈감·좌절감이 컸던 비간부층·말단 사무원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간부·지식인이던 ‘반동 분자’의 가택 수색·재산 몰수, 이른바 ‘초가’(抄家)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에서의 그들의 추방(베이징에서만 1966년에 추방된 ‘반동’들은 8만5천명이나 됐다)이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오늘에야 “마오쩌둥의 말씀 이외에 세상에서 공부할 게 없다!”는 홍위병의 외침이나 고전 문화와 유교경전 등에 대한 극단적인 파괴는 ‘반문화적인 행위’로 보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도 간부·지식층에 힘을 실어준 ‘상징적 자본’(전통이나 서구 문화 관련의 지식 등)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유럽인에게 ‘혁명성’의 표본으로 보이던 홍위병들은 실제로는 일관성 있는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자파’로 총칭되는 지배층의 한 그룹을 타깃으로 삼았지만 류사오치·덩샤오핑 못지않은 특권을 누린 마오쩌둥과 그 측근들에 대해 무한한 충성을 바쳤다. 결국 국가권력의 위협을 느끼자 마오쩌둥은 홍위병 등의 고학력 도심 청년들을 대량으로 농촌으로 ‘하방’(下放·강제 파견)하는 등 ‘혁명’을 냉각시켰으며(1968년 말~1969년) 그 후계자들이 간부 지배체제를 강화한 뒤에 세계 자본주의에의 편입의 길로 갔다. 한편으로, 홍위병 시절에 잔혹한 행위를 자행하곤 하던 수많은 중국인들이 당시 ‘투쟁’의 허위성이 밝혀지자 자괴감과 함께 정치에 대한 극단적 혐오증을 가지며 보수화돼갔다.
민주화·인권 투쟁의 길로 간 이들도 있지만 예외에 속한다. 남한의 악질적 반노조 재벌을 모범으로 삼으려는 ‘세계의 착취 공장’이라 부를 만한 오늘날의 중국은 이렇게 태어났다. 문혁의 격정에 대한 구미 지역 일각의 좌파들의 향수를 이해할 수 있어도 그에 반해 중국의 자본화에 기여한 문혁의 후유증에 대한 그들의 관심 부족은 매우 아쉽다. 역시 타자에 대한 진정한 전폭적 이해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특히 중국을 유럽과 태생적으로 다른 ‘이질적인 별천지’로 보는 데 의식·무의식적으로 젖은 유럽인들이 좌파적 사상을 가지면서도 남의 일을 ‘우리 일’로, 남의 아픔을 ‘우리 아픔’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섭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동아시아 좌파가 얻은 값진 교훈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벌이려는 중국 진보파들에게 문혁의 교훈은 무엇인가? “나는 마오쩌둥 주석의 충실한 나사다”식의 타율적인 의식을 갖고는 자율적 개인의 연대인 진정한 사회주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이 빠진 사회주의는 결국 더 심한 자본주의로 돌아오고 만다는 것도 동아시아 좌파가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값진 교훈이다.
[ 참고 문헌 ]
1) 嚴家其, 高皐, <中國 ‘文革’ 十年史>, 홍콩, 1986(영문: Yan Jiaqi, Gao Gao, 2) Michael Schoenhals, 〈China's Cultural revolution, 1966∼69: Not a Dinner Party〉, M. E. Sharp, 1996 3) Guo Jian, “Resisting Modernity in Contemporary China: The Cultural revolution and Postmodernism” 4) Gao Yuan, 〈Born Red, A Chronicle of the Cultural Revolution〉,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87 5) Anita Chan, 〈Children of Mao: Personality Development and Political Activism in the Red Guard Generation〉,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85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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