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fe/My Love China

홍수전과 태평천국

지식창고지기 2009. 8. 31. 18:03

태평천국

 

 

1) 홍수전과 배상제회

 

태평천국의 발생배경 : 태평천국의 발생과 확대될 수 있었던 사회적 요인을 살펴보면 몇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사회에 있어서 소수자에 의한 토지집중과 지주소작관계의 긴장고조, 인구증가가 따른 경지면적의 부족, 아편전쟁에 따른 민중의 경제적 부담의 증가 등이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아편전쟁 이후 아편유입이 계속 증가하여 은가의 등귀도 계속 증가되었던 점도 사회불안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양자강 이남의 5개 항구가 개항되자 강남의 무역중심이 광주에서 상해로 옮겨가게 되었다. 원래 광주가 중심이었을 때 수출품이건 수입품이건 내지로 가는 교통로는 모두 광주를 통해 이루어 졌다.

 

그런데 중심지가 상해로 옮겨가자 원래 광주를 중심으로 하던 교통로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생계를 잃게 되었다. 이들은 생활의 최저에 있었던 존재들로서 상해로 옮겨지면서 실업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낳았다. 이들은 후에 태평천국이 일어나자 양자강 유역의 지리에 밝았으므로 태평군의 진격에 지리적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평천국의 직접발단에 대해서 보면 광서지역에 있어 직접 발화점이 되었던 객가인과 본지인간의 대립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북방지역에서부터 이주하여 와서 양자강 이남 광동, 광서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객가인(타향에서 다른 지역으로 떠돌다 정착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본지인은 정착인들과 대립이 있었다. 태평천국의 상제회도 객가인 사이에서 형성되어 확산되었다. 그리고 정착인과 객가인의 마찰이 결국 태평천국을 발생시키게 했던 것이다.

 

홍수전 : 태평천국의 특징에는 명확한 정치목표, 통일된 지도력, 강력한 무장조직, 그리고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태평천국은 분명히 전통적인 일반 농민의 봉기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홍수전은 객가출신이었다. 중소지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과거에 있어 생원으로 현학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나 이후 계속 낙방하였다. 최초 1827년 성에서 실시하는 부시시험을 치루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기독교 선교용 <권세량언>이라는 소책자를 입수하였다.

 

당시 광주에서는 천지회라는 비밀결사가 활약하고 있었다. 1843년 네번째 부시의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나서 홍수전은 천지회의 활동과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가 생각된다.

 

홍수전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농민운동을 준비할 결심을 세웠다. 동지 풍운산과 결합하여 <권세량언>을 연구하고 천산에 올라가 상제를 만나고 난세를 구하라는 상제의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드디어 <상제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배상제회의 활동 : 홍수전은 스스로 예호바의 아들이며 예수의 동생이라 칭하고 선전활동을 벌였다. 상제회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독교의 예호바를 유일신으로 하고 있다. 기타의 신들을 사악한 신이라고 하여 배격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것도 우상숭배라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아마도 교의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점은 당시 봉건질서와 지배세력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반유교적인 모습을 띠게되어 되었다. 이에 중국의 성인이 사악한 신이 된다는 것은 중국역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 한인관료 및 지식인들에게 큰 반발을 사게 되었다.

 

배상제회는 1845년 포교를 위하여 <원도각세훈>을 저작하여 태평천국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원도구세가>를 작성하였는데 내용은 정치상의 평등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원도성세훈>의 내용은 경제상의 평등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원도각세훈>의 내용은 일종의 행동강령지침서로 우상파타, 만주황제타도, 관료와 지주에 대한 저항 등이 담겨져 있었다.

 

우상타파와 평등주장은 지주세력을 자극하게 되었고, 1847년 지주측에 의해서 지방마다 단속이 시작되어 상제회를 모반집단이라고 하여 주모자 풍운산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출행동과 더불어 배상제회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주세력과의 대립항쟁이 심화되면서 조직방위를 위하여 무장화하고, 활동성격도 종교활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1848~1850년 배상제회는 청정부의 부패와 민중의 빈곤을 이용하면서 종교적, 미신적 평등사상을 주장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받으면서 지주측의 억압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수청, 석달개 등이 참가하고 천지회와의 관계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배상제회는 각 지역에서 정착중국인과 지주들의 압박을 받자 드디어 기독교적 교리를 앞세워 투쟁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결의하였다. 회원은 농부, 광산노동자, 교통노동자, 회당, 지식인, 지주, 상인 등이었다. 1850년 지주세력과의 대립악화에서 무력대결을 선언하였다. 회원들에게 가산을 매각하고 광서성 평현촌에 집합할 것을 명령하고 드디어 청정부와 지방 지주세력과 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1851년 홍수전의 생일을 기하여 정식으로 무장봉기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태평천국 운동이다.

 

2) 태평천국의 지향성

 

태평천국의 이상 : 태평천국의 이론적 출발점은 절대적인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상제 앞에서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고 착취하는 자도 착취받는 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남녀간의 차별도 없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라고 하였다.

 

1853년 남경에 진입하여 수도로 정하고 국가를 건설하였다. 태평천국은 사회정책으로서 <천조전무제도>를 반포하였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토지제도를 중심으로 이상적인 형태를 구상했던 것이 특징이다.

 

첫째, 토지는 상상전에서 하하전까지 9등분하고 남녀의 구분없이 사람수에 응하여 가족을 단위로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한다. 곧 지주토지사유제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농업사회주의의 발상으로 공상적이며 실천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평가를 받았다.

 

둘째, 일상의 의식은 모두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다. 셋째, 25가가 조직 단위이다. 단위마다 국고와 예배당이 설치되었다.

 

생산물은 각자가 필요한 분량을 공제한 나머지는 모두 국고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즉 천하는 상제의 가족으로서 사유재산을 부정하며 빈부의 불균형을 부정하려 하였으며 혼인 등의 출자는 국고에서 지급되었다. 말하자면 25가의 단위는 공유공존, 자급자족, 절대평균을 유지하는 경제단위였던 것이다.

 

군대의 편성은 최고단위가 군이며 이하의 사수, 의수, 졸장, 양사마, 오장, 오졸 등이 있었다. 토지균등분배 원칙 하에서 일가족 1인을 병사로 선출되도록 하였다. 이는 병농일치의 결합관계를 설정한 것이었다.

 

현실적인 문제 : 현실적으로 태평천국에서 실시하려 했던 <천조전무제도> 아래에서의 토지균등분배는 실제로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대부분 옛 방식을 답습하여 토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형태를 취했다. 지주가 도망간 토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소작인이 소유하고 경작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지주의 수조권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태평천국은 공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수도 남경에 ‘성고’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모든 잉여물은 여기에 저장하였다가 다시 공동분배한다는 정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실시되었으나 실제로는 영속적이지도 못하고 제대로 실시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잘못된 관습에 대해서는 과감한 폐지운동이 있었다. 만주지배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변발을 폐지시켰다. 변발은 만주지배에 복종한다는 상징이 있었기 때문에 태평천국이 더욱 강조하여 폐지시키려 하였다.

 

동시에 모든 사람은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부인에 대해서도 남녀평등관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전족을 금지시키는 획기적인 조치를 실시하였고 노비매매금지, 창기, 축첩 등에 대하여 과감한 금지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등사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지배체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전통왕조의 체제를 도입하고 있다는 잘못된 모순을 보여주고 있엇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태평천국은 새로운 사회를 실현해 보려고 높은 이상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역사적 현실을 넘어서 과도하게 설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상과 현실의 와중에서 괴리감이 너무 커 쇠퇴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이상이 현실에 발묶여 현실과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토지정책의 후퇴는 태평천국의 혁명성의 가치를 약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3) 반혁명세력의 재편

 

상군과 회군 : 1853년경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할 때 각 지방의 향신과 지주들이 체제방어라는 입장과 각자 자기재산 보호라는 이름하에 지방마다 지방의 향촌군대인 <단련>을 조직하였다. 청정부도 역시 단련에 의지하여 국가 직무를 부여하고 방어를 명령하였다. 증국번의 상군, 이홍장의 회군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들 단련은 곧 지방적인 무장집단으로서 필요한 자금은 공공비용에서 지출되거나 지방의 향신, 지주, 상인 등에 의해서 갹출되었다. 정부의 군대적 보급을 받은 것도 아니며 정부의 정규군도 아니었다. 사실상은 팔기병을 보조 지원한다는 것이었으나 팔기병의 약화로 말미암아 지방의 단련은 그 힘이 강화되었다.

 

단련은 태평천국의 진압을 위하여 각 지방에서 향군을 조직한 것인데, 한인지주, 관료들이 청왕조 만주정권을 타도하는 민족적 저항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결국 전통지배체제의 옹호라는 계급적 이익을 선택하였다. 단련은 만한의 모순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결국 지주정권인 청조봉건지배체제를 옹호하며 자기이익을 추구해 갔던 것이다.

 

상군이 최성기를 이룰 때에는 군사가 10만명까지 되었다고 한다. 상군은 1860년 이후에는 사실상 전국의 유일한 중심병력이 되었다고 하며 증국번은 강소, 절강, 강서, 안휘 등의 각 지역 군무를 통괄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증국번에 의하여 발탁된 인물이 좌종당, 이홍장 등이다.

 

상군은 증국번의 상군과 좌종당의 상군으로 분리되었고 이홍장은 1961년 증국번의 지시에 의하여 상군의 방식과 똑 같은 회군을 안휘성에서 설립하였다. 회군은 성격은 상군에 비해서 사적인 성격과 군벌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또 양식병기로서 무장하였다. 결국 청왕조가 태평천국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태평천국의 정치강령에 위협을 느꼈던 한인지주층에 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열강 : 태평천국의 또 하나의 적대세력은 서양 열강이었다. 처음에는 서양 열강들이 태평천국의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라고 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접촉과정에서 태평천국은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저항하겠다는 의사를 듣고 열강은 태평천국의 방향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확인하고 대립관계로 전환하였다.

 

서양은 권리획득을 위해서는 청왕조를 옹호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태평천국 진압에 적극성을 띤다. 상승군이라는 외인부대(용병대)를 조직하고 진압에 참가하여 1860년에는 중국의 단련과 협조하여 태평천국은 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청정부 또는 단련에게도 무기와 군사훈련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양의 무기를 지원 받아 강한 군대로 성장한 단련이 바로 이홍장의 회군이었다.

 

태평천국의 실패원인 : 가장 큰 원인은 농민의 소박한 절대평균주의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사회를 위한 구상이 청조에 대항해서 빈곤과 차별에 시달리는 중국민중을 집결시켰지만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민중의 실질적인 요구를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태평천국이 가진 종교성에서 기독교의 우상숭배타파가 중국에 잘못 전달되어 중국의 수 천년동안 이어져 온 전통적 유교문화를 부정했다고 하는 점은 보다 심각한 마찰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열강의 청왕조 지원은 태평천국이 국내의 지주세력과도 대적해야 하는 동시에 열강과도 대항을 해야하는 이중적 부담의 가중이 있었다. 태평천국이라는 민중운동이 정부의 탄압과 열강의 지원사격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천국을 건설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