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가 되는 데는 중간에 서는 것 이상 바람직한 일이 없다. 적당하고 편안하면 저절로 도를 따르는 것이니, 수양산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모자라고, 유하혜(柳下惠: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현자)는 뛰어나다.
적당한 호흡으로 나아가며 농사짓는 일을 대신하라. 은자인 척 세상살이를 하되, 시류를 거스르지 마라. 재능을 쉽게 드러내면 몸이 위험하고 이름과 성공을 좇으면 화를 입는다. 유산을 많이 남기지 마라. 아무리 써도 혼자서 쓰기 힘들다. 성인의 도는 때로는 용이지만 때로는 뱀이 되는 것이다. 모습은 귀신처럼 감추고 드러내지 말고, 만물과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그저 시류를 따르는 것이지 영원불변한 참이란 없다
우리나라에 ‘삼천갑자 동방삭’으로 알려진 ‘동방삭’이 아들에게 준 ‘계자시(誡子詩)’의 일부다. ‘동방삭’은 우리나라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가상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한(漢) 무제(武帝) 때의 조정 관료다. 그는 귀신같은 처세술로 일생을 즐기며 살았다고 해서 처세의 달인으로 불린다. 환관을 매수해서 조정에 들어가고 조정에서 고위 관직을 갖지 않으면서도 말단 중앙 관료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험난한 세상을 쉽게 헤쳐 나간다. 신출귀몰한 그의 기행이 알려진 것은 사실 그의 처세술이 기가 막힌 탓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그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안빈낙도란 그야말로 모든 ‘물(物)’로부터 벗어나서 오직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그런 인식을 일소(一笑)에 붙여 버린다.
그의 논지는 ‘백이’, ‘숙제’처럼 너무 고고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영화롭지도 말며, 그 중간에서 적당하게 사는 것이 바로 안빈낙도라는 것이다. 그래야 크게 해를 입을 일도 없고 적당히 보호받으며 그만그만한 세상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합리적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지만, 윤리적 입장에서는 위험한 주장이다.
동양 사상사는 대개 성인의 길에 이르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는 유가(儒家)적 입장과,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벗하고 사는 도가(道家)적 입장이 맞서고 있다. 하지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삶은 이 중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동방삭처럼 그저 적당하게 물 흐르듯 원만한 것이 최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돈’에 대해서도 그렇다. 동양은 부귀영화(富貴榮華)라는 말에 이중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넘치면 모자라다거나, 부귀는 근심을 불러오는 원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무소유를 강조하는 불가(佛家)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쓰고, 한 푼이라도 더 늘리는 데 주력한다. 이율배반인 것이다. 서양 역시 다르지 않다. 서양에서도 전통적으로는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존재했다. 특히 노력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이자놀이에 대해서는 배덕(背德)으로 간주했다. 시간은 신의 몫인데,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슬람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듯 사상이나 철학, 혹은 종교는 늘 ‘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은 그 자체가 바로 ‘돈’이나 ‘명예’를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다툼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돈’에 대해 가지는 이중적 가치관을 가지는 이유다. ‘돈’은 지난 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에게 ‘여유’를 선물하는 존재다. ‘돈’으로 가치를 축적함으로써 인간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노동에서 해방이 가능했다(사회학적으로는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노동의 결과물을 교환할 수도 있다. 심지어 돈은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결과물을 교환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살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재테크, 혹은 자산 증식에 몰입하는 원인이다. 노동을 통해서건, 머니게임을 통해서건 ‘돈’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고민의 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가지고 싶지만, 근면과 성실만으로 이 정도의 자산을 축적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돈을 두고 게임을 한다. ‘다수의 돈을 소수에게 몰아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자신의 부를 빼앗기는 사람과, 획득하는 사람이 생긴다. 이것이 자산 투자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속성은 ‘다수의 돈’을 ‘소수에게 몰아준다’는 점에서, 패자가 늘 승자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승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인들이 돈에 대한 해방을 꿈꾸면서도 돈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머니게임은 일정 수준 이상 추가적인 ‘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게임이다.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생존을 위한 게임을 벌이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쯤에서 동방삭의 지혜를 빌려 보자. 근면함으로 ‘돈’을 늘리는 정도 이상의 불로소득에 대한 무리한 탐욕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 물론 현대 사회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인가는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벌이는 ‘머니게임’이 과연 어떤 것인가는 정확히 알고 게임에 뛰어 들어야 한다. 죽어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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